타인으로 인해 화가 나는 이유는 명확하다. 바로 상대가 나를 무시한다고 느낄 때다. 삶이란 육체를 건사하기 위해 목적한 바를 행하고, 생각은 그 방향을 잡는 과정이다. 누구도 죽음을 목적으로 살지는 않으며, 모두가 어제보다 나은 삶을 위해 각자의 노력을 기울인다. 비록 그 결과가 의도와 다를 때가 많을지라도 말이다.
지금의 내 모습은 내가 쌓아 올린 탑이다. 그 안에는 노력의 흔적이 배어 있다. 나를 위해 쓴 시간의 집합체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 집합체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가치, 그 이상을 바란다. 남들이 '나'라는 사람을 알아주기를 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고 오히려 그 기대와 상반되는 상황을 마주하곤 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타인은 다르게 생각한다. 생각이 다른 사람은 내 생각이 틀렸다고 말한다. 그 말에 나는 무시당했다는 기분을 느끼며, 내 시간과 노력에 대한 부정과 직면한다. 이런 상대에게는 이해보다는 부정적인 감정과 행동을 되돌려주려 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짧은 통쾌함 뒤에 긴 불안을 남길 뿐이다.
자신의 정체성이 훼손되거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덜하겠지만, 그 또한 대응이 과격하지 않을 뿐 마음속까지 평온한 호수 같기는 어렵다. 이는 단지 수양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 새겨진, 마음의 ‘업(Karma)’과도 같은 흔적이다.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긴 시간과 거대한 압력의 결과물인 셈이다.
인간은 본래 불안과 분노의 존재다. 평생을 이 감정들에 흔들리며 산다. 이를 해결하면 내공이 되지만, 해결하지 못하고 깊은 곳에 숨겨두면 상처 입은 '내면 아이'가 된다. 해결한다 해도 한정된 시간과 양 안에서만 가능하다. 결국 누구나 어느 정도는 묻어두고 살아가게 된다. 삶의 시간이 길어지면 기억이 희미해지고 마음이 무뎌져, 그 상처가 선명하지 않기에 다시 베이는 고통이 반복되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두려움과 분노를 어찌해야 할까? 벗어날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나쁜 일의 실체는 짧은 결과와 그 뒤에 이어지는 긴 부정적인 예상의 시간이다. 많은 연구가 내놓은 해답은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찬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심리적 문제의 해결책은 그 실체를 더 자세히,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좀 더 따뜻하고 유연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 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세상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은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 열쇠와 같다. 우리는 이 도구를 얼마나 제대로 사용하고 있을까? 돌이켜보면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은 내 생각과 감정의 결과다.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일을 부른다. 실현되는 모든 일 중 생각의 형태를 거치지 않은 것은 없다. 생각이 현실을 만들고, 현실의 질은 감정이 결정한다.
눈에 보이는 것에는 답이 없다. 우리가 찾는 열쇠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보이고 만져지는 것에서만 소원을 찾는다면 결코 손에 잡히지 않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을 보려 하고, 만져지지 않는 것을 느끼려 하며, 온 마음과 몸이 깨달을 때까지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좋은 방법은 명상이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다시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이 과정을 곱씹어 보자.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지 않을까? 너와 내가 하나라면,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부정적인 감정이 마음속에 숨을 공간은 사라질 것이다.
건강과 돈을 대하는 마음도 이와 같지 않을까? 그것들을 두려움과 분노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 우선이다. 병에 걸릴까 걱정하는 마음이 병을 부르고, 돈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돈을 밀어낸다. 건강함과 풍요로움이 우리 내면에 자연스럽게 흐를 때, 비로소 건강과 부는 현실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