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인도 여행에서 아찔했던 순간
인도 비베카난다요가대학교에서 같이 공부했던 인도 친구를 만나러 가기 위해 푸쉬카르(Pushkar)에서 자이푸르(Jaipur)로 이동하면서 푸쉬카르 버스터미널에서 있었던 일이다.
푸쉬카르에서 자이푸르까지 이동하기 위해서는 아지메르(Ajmer)라는 곳으로 조그만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가서 아지메르에서 자이푸르까지 가는 버스를 3시간 정도 타고 가면 된다. 푸쉬카르에서 아지메르까지 가는 버스는 성냥갑 같은 버스였는데, 우리나라 45인승 버스의 절반 정도 되는 버스였다. 그 버스는 약 30도 정도의 내리막 경사에 정차에 있었다. 10분마다 있다는 그 버스는 사람들로 이미 가득 차 있었다. 아마도 오전 10시 정도여서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버스정류장까지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비포장도로를 걸어가서 비스듬히 서 있는 그 성냥갑 같은 버스를 발견하고, 버스 직원에게 아지메르까지 얼마냐고 물었다. 여행용 캐리어와 나를 번갈아 보고서는 짐이 있으니 나한테 100루피(약 1,500원)를 내라는 것이다. 속으로 어라? 100루피 너무 많은데?? 물가가 많이 올라서 100루피인가라고 생각을 하며 빨리 이동하고 싶은 마음에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안은 현지인들이 빽빽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디에 서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나를 보고 그 직원은 운전사 옆 쪽의 공간으로 가라고 손짓을 보냈고, 나에게서 내 캐리어를 건네받아 나름 안전한 장소에 놓아두었다.
버스 운전사 옆에 서기 위해 무거운 백팩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내 무거운 백팩이 어깨에서 내려오는 순간 가방이 운전사의 왼쪽에 있는 수동기어를 내리쳤다. 순간 P에 있던 기어가 풀려 버렸고, 내리막에 정차되어 있던 버스가 움직였다. 순간 나는 버스 유리창을 통해 전방을 바라봤다. 성냥갑 같은 버스 바로 앞에는 연세가 지긋한 인도 할아버지 2명과 어린아이 1명이 지나가고 있었다. 버스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놀랐고 운전사도 놀랐고, 아찔한 그 순간에 나는 두려움에 비명을 질러댔다.
다행히 운전석에 앉아 있었던 운전사는 바로 브레이크를 밟았고, 그 성냥갑 같은 버스는 내리막 경사에서 꿀렁거리며 경사를 내려가다 멈출 수 있었다. 운전사는 재빨리 기어를 P로 놓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순간 너무 놀래서 "어떡해! 어떡해"라는 소리만 질러댔다. 그 아찔했던 순간 튀어나온 것은 영어도 아니었고, 어설프게 말하던 힌디어도 아닌 한국말이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연속해서 "미안합니다"라는 한국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너무나 놀라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 주위에 있는 인도인들은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은 것에 괜찮다며 제스처를 취해주었다.
정말 십년감수하는 상황이었다. 만약 그 버스가 내리막 경사에서 앞으로 더 전진했다면, 그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에 버스 앞을 지나가는 인도할아버지들과 아이는 어떻게 됐을까라는 생각만 하면 정말 아찔했다. 상상만 해도 대형사고였다. 정말 다행이었다.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음을 알고 버스 앞에 놓인 가네쉬상과 이름 모를 불상에 감사의 인사를 쉴 새 없이 전했다. 운전기사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연거푸 전하며 크게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말이다.
몇 분이 흘렀을까? 더 이상 사람이 탈 수 없을 때까지 사람들을 더 태우고 나서, 버스는 아지메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100루피라고 말하는 그 직원은 버스 뒷 쪽에서부터 탑승자들로부터 버스 요금을 받으며 버스 앞 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런데 버스비를 내는 현지 인도사람들을 보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탑승자가 목적지를 이야기하면 직원은 그에 맞는 버스요금을 말하고 돈을 받는 것이다. 대부분의 그 승객들은 푸쉬카르에서 아지메르까지 이동하는 것이었고, 한 사람당 20루피를 내는 것이 아닌가. 옆에 앉아있는 인도인에게 힌디어로 푸쉬카르에서 아지메르까지 버스비가 얼마냐고 물었더니 20루피(약 300원)이란다. 아무리 여행용 캐리어가 있어 두 명의 버스요금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40루피 밖에 안되는데 나한테 100루피라고 한 것이다. 인도인들의 경우는 무거운 짐이 있어도 추가 요금을 받지 않는데, 외국인에게는 꼭 짐 무게를 부과하는 것도 전부터 맘에 들지 않았는데 그 순간 화가 치밀었다. 버스 직원은 내 주위에 있는 인도 사람들로부터 버스비를 다 받고 나서 나에게 버스요금을 내라며 고개를 들며 사인을 보냈다.
내 캐리어 비용까지 포함해 40루피를 내겠다고 힌디어로 이야기를 하자 나에게는 100루피를 내라고 하는 것이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직원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100루피의 돈을 내지 않겠다며 버스 앞 유리창쪽으로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그 직원이 분명 나를 바라보며 내가 돈을 내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고 버스 앞 유리창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심퉁이 난 것이다. 마치 나 지금 너 때문에 화가 나 있다고 그대로 표출하고 있었다.
십 년 전인가 내가 푸쉬카르를 왔을 때는 기차를 타고 아지메르까지 왔었고, 아지메르에서 푸쉬카르로 오는 버스를 타고 주변을 둘러보면서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었다. 심퉁이 나고 불편한 감정이지만 여전히 그 주변은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그 경관을 놓치고 싶지 않아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그 와중에 내 마음속은 요동치고 있었다.
나한테 버스요금 바가지를 씌우다니, 그것도 자유자재로 이야기를 하지 못하지만 힌디어로 소통이 가능한 나에게 바가지요금이라니 말이다. "나를 잘못 봤구나", "나 이래 봬도 인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야"라고 속으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너무 웃긴 것이다. 불과 10분 안된 시간에는 세상의 모든 신들에게 아찔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음에 감사함을 표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는데, 우리나라 돈으로 1,000원도 안 되는 바가지요금 때문에 화가 나있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 있지만 나 너 때문에 화났어라는 내 감정을 그 직원에게 온몸을 통해 강력하게 뿜어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 순간 내면에서 지금 뿜어대고 있는 이 분노가 어디서 왔지라고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내 마음 한 켠에서는 이 감정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원인을 분석하고자 하는 내 안 부분의 자아에게 집중을 더 해보기로 했다. 진중하게 그곳을 들여다보니 나에게 부과된 그 바가지요금을 나에 대한 무시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감히 나를 어떻게 보고 지금 나한테 바가지를 씌운단 말인가? 네가 나를 무시하고 있구나."
너무 웃겼다. 너무 웃기지 않은가?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음에 다행이라며 안도를 하며 마치 세상의 모든 신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더니, 바가지 버스요금에 화가 치밀어올라 그 버스 직원에게 무언의 화를 내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큰 감정의 변화가 있을 때 나를 관찰할 수 있고 그 근원에 무엇이 있는지 찾으려고 애쓰는 내면 한 부분의 나에게 감사했다.
내가 이런 감정의 변화를 겪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버스 직원의 바가지요금은 "무시"라는 깊숙이 박혀있는 나의 낮은 자존감을 건드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지 않은가. 그 순간의 알아차림이 가능한 것은 내가 나이를 먹어서 가능한 것인지 요가와 명상을 해왔기에 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이건 내가 이뤄낸 일종의 성장이라는 것에는 틀림이 없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마음에서 있는 그대로의 것을 인정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마음의 고삐를 잡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인내하는 것이다.
이제야 생각해 보니 이러한 알아차림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 갑자기 나에게 선물처럼 다가오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묵혀둔 장아찌나 김장김치처럼 텁텁한 냄새 같은 것과 함께 내게 왔던 것 같다. 내 안에 오래전부터 있었던 비슷한 사건들이 켜켜이 쌓여 있고 연관된 감정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평온한 시간이나 통제가 가능한 순간에는 깊숙이 묵혀져 있는 감정들은 내 마음 깊숙한 곳 어딘가에 잘 포장되어 있다가 삶이 조금이라도 흔들렸을 때 미세한 틈을 뚫고 갑자기 툭하고 튀어나온다. 김장김치의 텁텁한 냄새처럼 은근하게 퍼져 나간다.
나를 살짝 흔들어주는 이런 사건 들을 겪으며 나는 나이 때문인지, 요가 때문인지 아니면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성장하여서 인지 모르지만, 그것을 통해 얻은 내 안의 다져진 힘으로 삶의 균형을 잡는 것이다. 몸과 마음의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면 내 영혼은 어느새 안정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런 경험이 쌓여 시간이 흘러 돌이켜보면 나는 자신과 내 삶이 너무나 감사하다.
이런 알아차림은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나 자신에게 선사하는 것이다. 나에게 알아차림이라는 선물을 줌으로써 나를 더 명료하게 바라볼 수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