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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 May 10. 2024

미륵산을 오르며

 아침 일찍 친구의 문자를 받았다. 봄이 되어 날씨도 풀렸으니 등산을 하자는 것이다. 얼마 전 모임에서 같이 한번 가자는 말을 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며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서 산에 오르기 괜찮겠다고 한다. 드디어 봄이 시작되었구나, 설레는 마음으로 텀블러에 물을 담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미륵산 입구인 봉숫골에 도착하니 벚꽃 축제를 기다리는 벚나무들이 꽃망울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오늘 같은 봄 날씨가 이어진다면 축제 당일에 화려한 벚꽃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고 산행을 시작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조용하고 한적해서 더 여유로운 마음이 생긴다. 용화사에서 띠밭등을 지나 미래사 전망대까지 가는 코스다. 우리는 등산객들의 발걸음으로 정돈된 길을 따라 숲으로 들어섰다. 곧게 뻗은 편백나무들과 얼기설기 제각각인 덩굴들, 그늘진 곳에 몰려있는 고사리와 이끼들, 봄을 알려주는 쑥과 이름 모를 풀꽃을 눈으로 훑어본다. 나무 사이로 정화된 맑은 바람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다. 언제 와도 그대로인 자연이 좋아 콧노래가 나온다. 작년 봄에 미륵산을 올랐고 1년 만에 오르는 산이지만 어제 본 것처럼 기억 속에 익숙하고 선명한 장면으로 다가온다. 산을 오를수록 늘 그 자리에서 계절을 묵묵히 이겨내고 꽃을 피우거나 잎을 떨궈내는 나무 하나하나에 고마운 마음을 담아본다.

 산은 나무와 풀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체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만들어내는 하모니다. 평생을 그늘에서 살아야 하는 나무는 묵연한 자세로 생명을 이어간다. 시든 꽃과 썩어가는 이파리들은 새 생명을 위해 가지고 있는 양분을 흔쾌히 내어 놓는다. 진정 산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이것들이다. 있어야 할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는 생명들이 있기에 다양성은 조화로움을 만들어내고, 차이는 빈자리를 채워준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고 하였는데 자연을 이루는 생명체들도 그런 것 같다. 혼자 살포시 지어보는 미소 끝에 나는 사회 속에서 저 풀과 같은 존재일까 바위와 같은 존재일까라는 질문이 대롱거린다. 사회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고 있는지, 늘 그 자리에서 내가 할 몫의 일을 다 하고 있는지를 생각한다. 내 자리가 평생을 그늘에서 살아야 할 자리이거나, 새 생명을 위해 양분을 내어 놓아야 할지라도 결코 쓸모없는 삶이 아니라고 숲은 가르쳐준다. 가지고 있는 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제 몫을 다 하고 있는지가 가치 있는 인생인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기준이라고 말한다.

 끊임없이 질문하는 산을 걸으며 미래사에 도착했다. 대웅전이 보이는 앞마당을 지나 누각 앞 툇마루에 앉아 숨을 고른다. 귀를 기울여보니 주위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저 멀리 아득한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한 고요가 느껴진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바람은 멈추었고 햇빛도 발목 아래에 섰다. 그때 나는 이런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이라는 법정 스님의 말처럼 고요의 순간은 얽매이지 않는 '무소유'의 순간이기도 하다. 나를 얽매인 생각들은 삶의 집착으로 이어졌고, 집착의 결론은 늘 이기적이었다. 이기심을 채우고, 소유하기 위해 내었던 소음으로 지쳐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고요의 순간에 내가 얼마나 심한 소음공해 속에 살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한 발짝 떨어져 나를 만나는 이 순간이 감사한 마음으로 한껏 찬다. 찰나의 순간으로 하루를 보상받은 것 같아 마음이 홀가분하다.

 우리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을 내려와 비빔밥을 먹으러 근처 식당으로 갔다. 오길 정말 잘했다고 말하는 친구의 환한 얼굴을 보니 나처럼 산의 물음에 대답을 얻은 것 같아 나의 얼굴도 환해진다. 신발을 벗고 자리를 잡고 보니 양말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오랜만에 구멍 난 양말을 본다며 친구가 웃었다. 옛날이었으면 부끄러웠을 양말, 집안 형편이 가난하여 양말을 꿰매어 신었을 시절이 아니어서 나도 같이 웃었다. 좋은 계절을 같이 느끼고 소소한 일상에 웃음을 주는 벗이 있기에 뻐근한 다리도 기분 좋게 느껴지는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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