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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신촌을 걷다

가을, 신촌을 걸으며

by Eun

4시 10분 알람이 울렸다. 사위는 아직 어둡다. 재깍 일어나는 나를 보고 선잠이 깬 남편은 평소에는 못 일어나더니 오늘은 칼같이 일어나네라고 말하며 웃는다. 남편의 꿀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불도 켜지 않고 컴컴한 방바닥을 더듬더듬 훑고 일어나 본다. 핸드폰으로 날씨를 확인하니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다. 전날 준비해 둔 옷을 입고 조용히 나갈 채비를 한다. 잠이 깬 남편의 잘 놀다 오라며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아직은 매섭지 않은 새벽바람을 맞으며 설렘으로 가벼운 발걸음이 때어본다.

오늘은 친한 동생 혜정과 당일치기 서울 나들이를 간다. 3번째 여행인데 첫 시작은 작년 봄이었다.

"집에 가족들이 있으니까 주말을 다 쓰는 건 좀 그렇고, 당일로 어디 힐링 여행할 데가 없을까? 힐링이 필요해."

"그래 힐링 좋지, 가족이랑 가면 챙겨야 되고 신경 쓸 게 많지. 그래서 여행 갔다 오면 힘들잖아. 나도 힘 안 들이고 쉬는 여행하고 싶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툭 던진 우리의 넋두리는 가볼까?라는 호기심으로 바뀌었고 호기심은 다시 가자!라는 행동으로 바뀌었다. 우리가 선택한 여행지는 서울이었다. 서울을 몇 번 갔었는데 가족들이 걷는 것을 싫어해 차만 타다 왔다는 혜정의 말에 영향을 받은 것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나도 큰딸을 보러 가는 서울 일정은 늘 빠듯했던 것 같다. 도착해서 볼일을 보고 딸을 만나 밥을 먹고 나면 하루가 금방 가는 것이다. 서울관광은 고사하고 딸과 있는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돌아갈 때는 늘 아쉬웠다. 오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장소와 서울이라는 곳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문화를 나만의 방식대로 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젊지 않은 나이에 새벽같이 출발하고 지하철을 타고 뚜벅이로 걸어 다녀야 하는 일정이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도 들떠하며 계획을 잡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이 여행이 어지간한 해방감을 주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작년엔 경복궁과 창덕궁, 북촌, 인사동 등 제법 여러 곳을 다녔다. 이번엔 가을이 물든 창덕궁을 걸을까 하다가 이화여대와 연세대가 있는 신촌을 둘러보기로 했다. 이화여대는 1930년대 지어진 역사적 건물들과 조선시대 능 터로 쓰일 만큼 수려한 수목을 자랑한다. 그리고 연세대에는 1920년대에 지어진 언더우드 관과 윤동주 기념관, 윤동주 시비가 있다. 또한 세브란스 의과대학도 고종이 설립한 광혜원을 전신으로 하는 역사가 깊은 장소이다. 지금 서울은 만추가 절정이라고 하니 일상의 고단함을 내려놓고 가을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다.

4시간의 버스여행이 시작되었다. 2시간은 푹 자고 나머지 시간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창밖 풍경을 감상했다. 평소 오가는 차 안에서 듣는 아이들 위주의 노래가 아닌 내 취향이 듬뿍 담긴 노래를 들으니 이마저도 즐겁다. 창밖은 흐린 날씨 탓에 수묵화처럼 색이 사라진 풍경이지만 오후에는 구름이 걷힌다고 하니 제 색깔의 자연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휴게소에서 산 커피를 마시며 음악소리에 발을 까딱거려 본다. 느림의 미학을 즐기며 가을 감성에 젖는 사이 차는 경부 터미널에 도착했다.

먼저 지하철을 타고 이화여대로 향했다. 대학 정문을 향한 노란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보자 제때 잘 맞춰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3~4층 높이의 웅장한 은행나무들이 모두 노랗게 물들어 있었고, 그 길을 따라 생각 외로 많은 관광객들이 투어를 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전국에서 제일 큰 지하 캠퍼스라고 하는 ECC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바다가 열린 것 같은 디자인의 건물 사이로 난 계단을 오르면 그 뒤로는 중세 유럽풍의 지붕과 굴뚝이 있는 석조 건물을 만날 수 있다. 나이 든 건물은 멋스럽고 벽을 따라 자란 덩굴식물의 줄기는 주름처럼 중후한 느낌을 더해준다. 그 느낌을 배경으로 학사모를 쓰고 사진을 찍는 졸업생들의 모습을 보니 졸업한 지가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나의 모습이 어색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이화여대 교정을 둘러보고 연세대로 향했다. 연세대 교문을 지나 주작 대로 같은 넓은 길을 따라 걸었다. 학생들의 기금으로 세워졌다는 연세대의 상징 독수리 탑을 보니 졸업생들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탑을 지나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표어와 함께 언더우드 관이 보인다. 유럽의 귀족들이 살 것 같은 중세 건물인 언더우드 관과 잘 꾸며진 정원은 정말 이색적이다. 1925년에 준공된 옛 연희전문학교 건물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를 기념하기 위해 명명된 사적 제276호 건물이라고 한다. 잘 꾸며진 정원 벤치에 앉아 일제강점기를 버틴 건물을 본다. 중앙에 있는 중세 고딕 스타일의 아치형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과거로 시간 여행이 가능할 것 같은 상상을 하며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느껴본다. 잠깐의 휴식 뒤 건물을 따라 한 바퀴 돌아 윤동주 기념관과 윤동주 시비로 향했다. 비석 주위로 폭신하게 쌓인 낙엽들과 색이 진하게 밴 나무들과 어디서 들리는 음악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시구가 한 컷의 사진처럼 머릿속에 박힌다. 어쩌면 우리는 찰나의 순간을 마음에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이런저런 여행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음에 남는 사진하나 없다면 그 여행은 좋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추억을 사는 일이 여행이라고 하는데 같이 온 혜정은 어떤 것을 눈에 담고 마음에 담았을지 궁금하다.

여행은 때로는 휴식이고, 도전이고, 만족이다. 나에게 이번 여행은 휴식이었다. 별거 아니지만 하고 싶었던 것을 하고 소소한 만족을 얻었다. 다른 환경에서 모르는 사람들의 삶에 섞여 마치 나도 이 동네 사는 사람인 양 별거 없는 하루를 같이 살아가는 것, 그러면서 인생은 별거 없고 내가 했던 고민들도 사실은 지극히 일반적이며 평범한 것이라 깨닫는 것.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서로의 사진을 공유하며 하루를 되돌아보는 시간조차 앞으로 가끔 되새겨볼 추억일 것이라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드는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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