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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자 이야기-1

by Eun

"아그야, 복권 한 장 줘라."

라고 말하며 천문자는 몸뻬 바지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리고 바지에 달린 줄에 매달려있는 천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지폐 다섯 장을 꺼냈다.

"아이고, 시장에서 김밥 팔아 얼마를 번다고 매주 복권을 사는지 원.."

천문자는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아그' 소리를 듣는 편의점 주인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든지 말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산 복권을 반으로 접어서 천주머니에 넣은 뒤 천 주머니를 다시 몸뻬 바지 속으로 쑥~하고 집어넣었다.


천문자는 동네 작은 시장 입구에서 김밥 장사를 한다. 세모난 땅을 가진 과일 가게의 각진 부분을 잘라 자리를 마련한 곳이라 3평도 되지 않는 모난 곳이지만 천문자는 그곳에서 20년 넘게 김밥을 팔았다. 김밥을 보관하는 투명 아크릴 케이스와 김밥 재료가 담긴 통들을 올릴 수 있게 제작한 나무 널빤지 너머에 있는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하루 종일 김밥을 만다. 버려진 택배 상자를 뜯어 '시장 김밥 한 줄 이천 원'이라고 글을 써서 과일 가게에 노끈을 얻어다가 앉은뱅이 의자가 있는 공간의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아 놓았다. 천문자의 손맛을 거친 김밥은 맛있다고 나름 소문이 나 있기에 하루 100줄은 너끈히 팔리는 효자상품이다.

"김밥 할머니 또 복권 사네. 아니~ 복권 안 사도 20년 넘게 장사했으면 그 돈만 모아도 몇 십억은 되겠구먼. 그 돈 다 뭐 하고 매번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복권을 산데?"

과일가게 주인이 편의점에서 나오는 천문자를 보자 몸을 꼬며 실실거린다. 과일가게 주인과 천문자는 처음에는 깍듯하게 서로를 '사장님'이라고 불렀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사과'와 '김밥 할머니'로 부른다. 오래 보아 온 사이라 허물이 없다지만 과일가게 사장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뱉고 보는 성격이라 애먼 소리를 듣는 쪽은 늘 천문자였다. 특히 매주 복권을 사는 천문자의 행동을 가만히 보지 못하고 늘 한 마디를 거들 고야 만다.

"돈 음따! 김밥 이거 얼마 한다고 돈이 있겠냐, 근디 사과 너는 오늘따라 장사가 안 되나 왜 또 지랄이여?"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서 그렇지. 버스 타고 다니지, 점심은 김밥 먹지, 하루도 안 쉬지, 또 뭐야~~ 채소는 집에서 키운다고 하지. 옷을 사 입기를 하나~ 화장을 하기를 하나~ 돈을 쓸 때가 없단 말이지. 그런데도 매주 복권을 사니까 안 이상해? 그러지 말고 나한테만 말해주소, 그 돈은 다 어디 가 숨겼데? 어? 안방 전기장판 밑에 깔아놨나?"

뒤를 따라오며 빠른 손놀림으로 김밥 한 줄을 꺼내 먹는 과일가게 주인을 보며 천문자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장판은 무슨.... 나.. 나 전기장판 안 써. 그리고 맨손으로 먹지 말아. 위생! 청결! 몰라?"

"왜 놀래? 진짜 집에 숨겨놓은 거 아니야? 하하항~~ 이건 긴 밥값, 요즘 사과가 비싼 거 알죠? 옆집에 있으면서 과일도 사 먹고 그러세요, 그게 정이지. 하하항~~"

천문자는 뒤돌아가는 사과와 투명 쇼케이스에 올려진 색 바랜 사과를 번갈아 보다가 요즘 사과가 안 팔리고 남는 모양이구만이라며 혀를 찼다. 그러곤 벽에 걸린 배낭을 내려 조심스레 사과를 넣었다. '돈 대신 매번 과일을 주고 지랄이여'라고 중얼거렸다가, 그래도 '오지랖 많은 과일가게 사장 덕에 과일을 먹는 거지'라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오늘 장사는 이만 끝낼 참이다. 겨울이지만 가을 하늘처럼 파랗고 붉은색들의 잔치가 하늘에 벌어졌다. 천문자는 노을을 보며 오늘도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천문자는 남은 김밥 여섯 줄을 가만히 쳐다보다 두 줄씩 포장해 각각 검은 봉투에 담아 배낭에 넣고 집으로 향했다.


천문자는 집으로 가는 길에 가져온 김밥을 경비실 문고리에 하나, 앞집 선아네와 윗집 유리네에 하나씩 걸어주었다. 그러고는 컴컴한 복도에 서서 공기가 전해주는 소리를 들어본다. 다행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평화로운 밤이다. '그려, 이런 날도 있어야지. 암, 감사한 일이구먼'이라고 생각하고 얕은 한숨을 쉰 뒤 집으로 들어갔다. 보일러도 켜지 않은 집은 서늘한 냉기로 가득하다. 천문자는 불도 켜지 않고 안방으로 직진한다. 그리고 가방을 열어 오늘 번 돈을 노란 고무줄로 묶은 뒤 전기장판 밑에 밀어 넣는다. 돈뭉치로 울퉁불퉁한 전기장판을 두툼한 손으로 매만지고 있자니 만족감이 밀려온다. 천문자는 가방을 옆으로 툭 던져두고 장판 위에 펴 둔 극세사 이불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부드러운 촉감에 몸이 노곤해진다.

'그나저나 사과는 내가 장판 아래 돈을 숨겨놓는 것을 어떻게 알았데? 하여튼 쓸데없이 촉이 좋고 지랄이여.'

팔다리의 피로를 털어내던 천문자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건 내 돈이여. 이 집은 내 집이여. 아무도 못 가져가. 아무도...'


로열 골드 맨션 102호에 사는 천문자는 이 건물의 첫 입주자다.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고 바둥바둥 거리며 장만한 집, 장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천문자는 자신처럼 늙어 볼품 없어진 건물에 한없는 동정과 연민이 밀려왔다. 스물다섯만 넘어도 노처녀라고 불리던 시절 중매쟁이의 거짓말에 속아 물건 떨이하듯 팔아넘겨진 듯한 결혼이지만 그런대로 살아지는 삶이었다. 손자 타령하는 시어머니에게 사내아이를 안겨주고, 몸도 풀지 못한 채 식당에 나가 일했지만 원래 결혼은 이런 거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집안의 가장이 되어버린 천문자였지만 불평 한마디 없이 악착같이 돈을 모아 이 집을 샀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남편과 다 큰 아들이 버티고 있는 집에 자신의 공간은 없었다. 오냐오냐 키웠던 아들은 무능했고, 천성이 부지런한 천문자와는 늘 부딪쳤다. 시어머니 성화에 대출을 받아 차려 준 PC방은 늘 적자였고, PC방을 접은 뒤 동업을 하기로 한 고깃집은 사기를 당해 남은 돈을 홀라당 날려먹었다. 아들은 천문자에게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며 또다시 돈을 달라 떼를 썼고, 실업자인 남편과 시어머니는 한 번만 더 믿어주자고 했다. 하지만 잘 될 리가 없었다. 밤늦게까지 식당에서 일해서 번 돈은 무능력한 부자에게 몽땅 들어갔고, 죽을 때가 되어서야 미안하다며 몇 푼 남겨준 시어머니의 재산도 아들 빚으로 들어갔다. 아들은 천문자와 심하게 다툰 뒤 눈에 쌍심지를 켜고 "그럼 내가 나가서 죽으면 될 거 아니야. 엄마가 바라는 대로 해줄게. 나 죽고 어디 잘 사나 보자"'라고 저주를 퍼부은 뒤 집을 나가 몇 년째 연락이 없다. 그리고 끝까지 자기 죽으면 제사 지내 줄 아들이라며 돌아올 거라 굳게 믿던 아버지는 깊은 밤 '아들'을 찾다 영영 눈을 감았다. 남편 상을 치르고 혼자 집으로 돌아온 날, 천문자는 형기를 마치고 석방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전생의 업을 끝낸 것 같았다. 이제는 환생만 하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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