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까무잡잡하고 키 작은 아빠가 작업복을 입고 안전화를 신고 집을 나서다 옥상에서 손을 흔드는 시우를 본다.
"아빠! 아빠! 여기야, 여기~~"
"시우, 또 옥상 간 거야? 위험, 위험. 조심 놀아. 아빠 저녁 온다. 빠이빠이~"
한국에 온 지, 7년이 지났지만 아직 한국어는 어렵기만 하다. 그래도 눈칫밥으로 대충 배운 말은 시간이 지나면서 소통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시우는 까치발을 하고 옥상에서 아빠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든다. 꼭 돌아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아빠 출근하셨냐?"
"할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헤헤~ 아빠 이제 갔어요. 또 풀에 물 줘요?"
"풀이 아니고 채소라고 몇 번을 말하냐, 잘 봐. 요건 상추, 요건 부추, 요건 고추..."
"채소가 다 '추'로 끝나네요? 저건 뭐라고 하셨더라? 시.. 시금.. 시금추?"
"요놈은 시금치야. 허허~ 우리 시우 말처럼 요놈만 '치'로 끝나네. 김밥 쌀 때 제일 중요한 놈이야. 자식보다 중하지. 이놈들 춥겠다. 나가자."
천문자가 옥상에 만든 비닐하우스에서는 채소들이 봄 들판처럼 푸릇푸릇하다. 반 원의 철골 위에 몇 겹의 비닐을 씌워 만든 비닐하우스에 찬 기운이라도 들어갈세라 천문자와 정시우는 얼른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시우야, 오늘도 옥상에서 아버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심심하지 않냐?"
"안 심심해요 할머니. 옥탑방 안에 책도 있고, 장난감도 있어요. 가끔 유리 누나랑 선화 누나도 놀러 와요. 오늘도 온다고 했는걸요? 헤헤~ "
옥상에 있는 한 칸짜리 방을 치우고 놀 수 있는 공간으로 바꿔준 건 시우 아빠였다. 시우는 어렸을 때부터 혼자 집에 남겨져서 그런지 집이라는 공간에 혼자 있는 것을 무서워했다. 오히려 옥상이지만 마당이 있고, 시야가 트인 옥탑방에서 안전감을 느꼈다. 그리고 퇴근하고 걸어오는 아빠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빨리 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시우는 그렇게 밤늦게 때로는 자정이 될 때까지 옥탑방에서 돌아오는 아빠를 기다렸다. 멀리서 아빠가 돌아오면 자신이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위안을 받았다.
"할머니, 시장에 가시는 거죠? 다녀오세요. 내일 만나요. 헤헤~"
"오냐오냐, 착한 것... 시우야, 넌 분명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인사를 잘하는 놈은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야. 그러니 책도 읽고 글자도 열심히 외우고 해~~"
해맑게 웃는 시우를 보는 천문자의 눈에 연민이 스쳐 지나갔다. '딱한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시우를 쳐다보았지만, 사실은 젊은 천문자가 세상을 극복할 수 있게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시우에게 투영된 것일지도 몰랐다. '문자야, 결혼 생활이 지옥 같았던 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냥 상황이, 살다 보니 상황이 그렇게 된 거야. 잘 버텨왔어. 잘했어.'라고 자신에게 되뇌었다. 이렇게 문자는 딱한 사람만 보면 그 사람이 젊은 문자처럼 느껴졌고, 그럴 때면 자신에게 '잘했어, 잘했어'라며 속으로 위로를 했다. 그게 문자를 지금까지 살게 했다. 살 수 있게 해 주었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저녁 8시가 되자 천문자는 경건한 마음으로 거실에 앉았다. 거실 탁자 위에는 복권 종이 10장이 가지런히 놓여있고, 그 옆에는 종이와 볼펜이 있다. 텔레비전엔 뉴스가 끝나고 광고가 시작되었다. 천문자는 눈을 감고 두 손바닥을 맞댔다.
"할머니, 오늘이 그날이지? 할머니가 말한 날 말이야. 왜 이리 애간장을 태우고 그러실까? 진짜 사과가 한 말처럼 똥 마려운 꼴 보고 싶어서 이러시는 거야? 살아생전에도 나를 힘들게 하더니 죽어서까지 이렇게 신경 쓰이게 해? 오늘은 놀리지 않을 거라 믿어요, 할머니~ 하나님 부처님 공자님 아멘~~~~"
어설픈 기도를 마친 뒤 감았던 눈을 가늘게 뜨고 텔레비전을 보았다. 방송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가슴이 뛰고 속이 타기 시작했다. 부엌 냉장고로 가 차가운 물을 컵에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설마 그 꿈이 거짓이었겠어? 망할 할망구 같으니. 이번에도 아니기만 해 봐라. 다시는 무덤 근처도 안 갈 테니...'
광고가 끝나고 방송이 시작되었다. 천문자는 남은 물을 한 입에 벌컥 마시고는 전의를 다지는 마음으로 거실로 향했다.
젊은 천문자는 시집살이가 힘들 때면 할머니 무덤에 와서 울었다.
"아이고, 할머니. 나는 못 살겠어요. 이게 무슨 결혼이야. 나는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살아. 할머니가 그리워... 나 그냥 할머니한테 갈까? 응, 할머니. 말 좀 해봐요. 나 안 보고 싶어요? 할머니.... 흑흑..."
젊은 천문자는 시집살이가 힘들 때면 할머니 무덤에 와서 울었다. 어려서부터 할머니 손에 자란 천문자는 할머니 사랑이 애틋했다. 할머니는 좋지 않은 형편에도 문자가 좋아하는 거라면 무엇이든 해주려고 했다. 해줄 수 없을 때는 '할머니가 미안해, 미안해'라며 문자를 안고 울었다. 할머니의 바다 같은 사랑을 가슴에 품고 자란 천문자는 성공하면 꼭 할머니를 호강시켜 드릴 거라고 다짐하며 열심히 공부했고, 집에 오면 밭일이며 집안 살림을 도왔다. 하지만 세상은 천문자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시골 촌뜨기가 서울에 상경해서 느껴야 했던 수치심과 좌절감은 할머니 사랑으로도 치유가 되지 않았다. 서울살이를 하면서 천문자는 시든 꽃처럼 말라갔다. 잘 살고 있냐는 할머니의 전화에 잘 살고 있다 바빠서 못 내려간다 이번에 시간 내서 가 보겠다 그전까지 아프지 말라고 말하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런 날엔 공장 기숙사에서 새벽이 될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그러다 그리움의 한도가 목구멍까지 밀려와 숨이 쉬어지지 않을 때쯤 모든 것을 접고 고향으로 향했다. 할머니는 버선발로 뛰쳐나와 천문자를 반겨주었다.
이후 오 년이 되지 않는 시간은 천문자가 오롯이 행복한 삶을 누렸던 시간이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시간이 천문자에겐 거인이 눈을 감았다 뜰 정도의 찰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다음에 맞이할 역경에 가려 흔적조차 생각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작은 사무실에서 경리 일을 할 때 늙은 할머니는 가끔 딴 세상 사람이 되었다. 자신을 보고 누구냐고 했다가, 누가 밤새 자신을 쳐다본다고 하며 잠을 자지 않는 날들이 생겼다. 그러다 의식이 현실로 돌아올 때면 '내가 이게 무슨 꼴이냐. 너 볼 면목이 없다. 너 시집가는 모습은 보고 죽어야 하는데, 왜 이런다냐' 라며 천문자의 손을 잡고 울었다. 이때쯤, 동네 소문난 중매쟁이가 천문자의 소식을 듣고 슬그머니 혼사 이야기를 꺼냈다. 천문자는 '나를 버린 부모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나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지만, 마침맞게 어울리는 남편감이 있다는 중매쟁이의 말에 할머니는 홀딱 넘어갔다. 선을 보자는 잔소리는 내가 죽어야 볼 거냐로 바뀌었고, 진짜 숨넘어가는 척을 자주 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정신이 멀쩡할 때 너 시집을 가야지, 안 그러면 고아인 너를 누가 데려가겠냐. 문자야, 할머니는 괜찮다. 나는 괜찮아. 아무 걱정 하지 말고 가. 너 결혼식 보는 게 할머니 마지막 소원이야. 응?"
"알겠어요. 알겠어. 결혼할 테니 마지막 소원 이런 소리 좀 하지 마, 응? 나 결혼하면 손주도 보고 해야지. 할머니가 손주 봐주기로 했잖아. 기억하지? 할머니 없으면 난 못 살아. 그러니까 끝까지 정신 줄 놓지 말고 잡고 있어 할머니, 알았지?"
"아이고, 딱한 것... 할머니가 미안해, 미안해...."
그렇게 천문자는 시집을 갔다. 그리고 천문자가 아들을 낳은 날, 할머니는 눈을 감으셨다.
시어머니는 중매쟁이에게 속았다고 했다. 집도 있고, 땅도 있고, 직장도 반듯한 아가씨라고 소개를 받았다고 했다. 중매쟁이는 살아생전 할머니에게 이 상태로는 시집 못 보낸다. 돈 가진 것 좀 있으면 내가 어떻게 좋은 자리로 알아봐 줄 수는 있겠지만... 이라며 넌지시 말을 흘렸었다. 그 말은 들은 할머니의 옷장 속 금부치는 중매쟁이 호주머니로 들어갔는데 시댁에서도 빈 손으로 돌려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이후 맞선이 성사된 것을 보면 중매쟁이만 좋은 일 시킨 꼴이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시어머니는 장화홍련을 구박했던 허 씨 부인보다 더 악독했다. 따지고 보면 천문자도 속은 결혼이고 억울한 입장이었지만 '할머니가 그렇게 가르치셨니? 부모가 없어서 그런지 못 배워먹은 티를 팍팍 내는구나.'라는 말이 듣기 싫어 벙어리 행세, 봉사 행세를 했다. 시어머니는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일일연속극의 가련한 주인공의 시어머니에 빙의된 듯했다. '내가 너무 오래 산 것 같구나, 내가 죽어야 속이 시원하겠니, 어디서 두 눈 똑바로 뜨고 대들어'라며 대사 같은 말들을 했고, 때로는 감독의 큐 사인에 맞춘 연기자처럼 물컵에 물을 얼굴에 들이 붓기도 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날엔 부엌에서 칼을 손에 들고 있는 자신을 의식하고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그날, 그날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화창한 날이었다. 천문자는 시어머니와 장을 보다가 갑자기 모든 것을 내려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스를 탔다. 놀란 시어머니가 소리 지르며 자신을 불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눈에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빨리 할머니 무덤으로 달려가 안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몰랐다. 그렇게 할머니 무덤을 안고 울었다. 그러다 지쳐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귓가에 '우리 아가, 문자야~~'라며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부스스 눈을 떠보니 할머니가 자신을 보고 웃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꿈이야, 생시야? 진짜 할머니야? 천문자는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