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등한시하다

나를 표현하는 단어-2

by Eun

17년 전 구입했던 빨간색 에어컨과 이별하고 새 에어컨을 맞이하는 날이다. 실외기가 있는 안방 베란다를 청소해야 하는 날이기도 하다. 짐으로 가득 찬 베란다는 언제부턴가 '어? 거기 베란다가 있었어?' 할 정도로 나의 기억에서 삭제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 당연히 그 속에 많은 짐들도 먼지를 덮어쓰고 있다. 모른척하고 살 때는 좋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오늘은 정말 저 베란다를 정리해야 한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의 마음가짐으로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아침 햇살에 부딪힌 먼지들을 보니 반딧불이처럼 반짝거린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무한 긍정도 나름 지금 할 작업에 도움이 될 것이니 굳이 외면하지 말자. 집 청소를 안 한 지 오래되다 보니 하나를 들이는 데 여러 가지를 버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일단, 쓰지 않는 훌라후프 2개와 반신욕을 하려고 산 욕조 덮개(쓰지도 않을 것을 왜 샀을까)를 버려야 한다. 등교하는 아이들 손에 하나씩 쥐여주며 같이 분리수거장으로 향했다. '엄마 이건 뭐야?'라고 묻는 아이 말을 안 들리는 것처럼 가볍게 무시하고 걸었지만, '엄마 이건 새거 같은데 왜 버려?'라고 하는 말에는 머쓱한 부끄러움이 따라와 충동구매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들이 때 썼던 교자상도 치워야 한다. 15년 전에 사서 쓰고, 이후로는 상을 폈던 날이 손에 꼽을 정도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커버에 씌워놔서 그런지 제법 멀쩡하다. 이건 주말에 시댁에 가져다 드리면 잘 사용하실 것이다. 이번엔 한때 유행했던 '000 스팀청소기'가 눈에 보인다. 그 옆에는 여름에 거실에서 사용했던 '대나무 돗자리'가 그리고 그 밑에는 몇 년 전 일할 때 썼던 미술도구가 든 가방이 있다. 남편의 낚시 도구들도 한편을 차지하고 있다. 말하기 부끄럽지만 죽은 식물을 버린 뒤 남겨진 빈 화분들도 거실 한편에 모아져 있다. 모두 '한때'라는 단어에 속하는 물건들이다. 고장 나고 사용 안 한 지가 한참 되었지만 혹시나 또 사용할까 봐, 아니면 나중에 치우지 뭐 하는 마음으로 모두 베란다로 옮겨진 것들이다. 하나를 들이기 위해 열 개가 넘는 물건들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은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요즘 들어 청소를 등한시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청소뿐만 아니라 집안일도 흥미를 잃었다. 일 때문이라는 핑계가 제법 잘 먹히긴 하지만 이렇게 대충 치우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왜 집안일을 미루게 된 것일까?

얼마 전 '유퀴즈'라는 프로그램에 이동귀 교수님이 출연해서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난다. 완벽주의와 지연행동에 대한 연구를 하시는데, <나는 왜 꾸물거릴까?>라는 책도 쓰셨다. 꾸물거리는 지연행동에는 현실감이 부족한 낙관주의자, 죄책감에 시달리는 자책주의자, '네'라고 대답만 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 현실저항형, 작심삼일인 자극추구형 그리고 완벽주의형이 있다고 한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완벽주의형 중에서도 '사회부과 완벽주의자'라고 하는데 이는 완벽주의자이고 싶었던 적이 없지만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다 보니 액면만 완벽주의자인 사람이 해당된다. 따르고 싶지 않은 마음과 해야 하는 마음의 불일치가 심리적으로 우울과 불안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잘해야 돼'라는 말이 내면화되어 각인되어 있다고 말하며,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미루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 안에 이런 모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간의 행동이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었다.

정리해 보자면 나는 청소를 잘하고 좋아하는 완벽주의자가 아니지만 과거 내 집이라는 것을 장만했던 기분에 빠져 꾸미고 관리했던 이력이 있다 보니 '잘해야 돼'라는 마음이 이어져 불편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또 결국 깔끔하고 정리가 잘 된 집에 사는 것은 가족들이 원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수동적인 행동을 하는 것 같다. 100%가 되지 않을 바엔 그냥 안 하고 말지라는 생각과 마음만 먹으면 이것 치우는 것은 일도 아니지라는 시답잖은 생각들로 미루고 미루었던 청소는 집안 구석구석을 물건들로 채웠다. 옷장 안에 모아놓은 종이가방들과 버리지 않은 옷들과 이불들, 녹슨 냄비와 부엌 서랍의 잡다한 물건들. 15년을 산 아파트에서 15년을 같이 산 물건들을 보니 어쩜 그 속에 사는 우리들까지 방치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있는 공간의 방치, 늘 같은 공간에서 내 생각은 뻔하고, 한결같고, 변화 없음에 무감각하게 방치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눈에 익다 보니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으로 인식될 수도 있지만, 습관이 형성되고 감정이 자라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공간은 죄책감보다는 자신감으로, 변명보다는 실천으로, 완벽주의자이고 싶었던 적 없었던 완벽주의자가 아닌 현실만족형으로 성격이 형성되는 공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늘 어지럽고 방치된 물건들로 가득한 공간은 자책을 가져오고, 타인의 눈치를 의식하게 한다. 미루는 습관은 회피 성향을 강하게 만들어 다른 문제에서도 회피하는 성향을 보이게 한다. 변명은 변명을 낳고, 변명을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 논리를 머리에 각인시키기도 한다. 이런 인격 형성의 흐름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우리가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공기처럼 스며들어 혈액을 타고 온몸을 돌아다닐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은 나를 대변하게 될 것이다. 머무는 공간과 일하는 공간과 타고 다니는 차의 공간을 떠올려보니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공간에 대한 이해가 너무 낮았다는 생각이 든다.

에어컨 설치 기사님들이 다녀가신 뒤 깔끔하고 산뜻해진 거실과 베란다를 쳐다보니 한결 기분이 가볍다. 공간을 비웠더니 공간에 방치된 물건들을 볼 때마다 느꼈던 부정적인 감정까지 비워진 기분이다. 방치된 물건들을 치우는 것은 단지 노동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감과 좋은 성격 형성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이제는 공간에 대한 책임 의식을 더 높여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등한시하다 : 소홀하게 보아 넘기다.


이렇게 마무리하고 보니 작심삼일로 끝나는 자극추구형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여기저기 해당되지 않는 구석이 없구나.) 결국 나는 모든 것에 등한시하는 성격의 소유자인지도 모르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