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진이 터덜터덜 걸어온다. 오늘도 회사에서 깨지고 오는 길이다. 자신보다 한참 늦게 입사했지만 먼저 대리를 단 김 대리가 한 말이 아직 귀 속에서 나가지 않고 맴돌고 있다.
'아니, 박영진 씨! 입사 몇 년찬데 아직 주문 물량 계산이 틀립니까? 서류는 확인하고 결재 올리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결제 나고 물량 착오 생기면 그 책임은 당신이 질 겁니까? 제대로 좀 합시다. 네?'
'박영진 씨! 오늘 00 거래처 가는 날 아닙니까? 거래처와의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거 몰라요? 알만한 사람이 말이야~~ 거래처 떨어지면 당신이 책임질 겁니까?'
'박영진 씨! 결재 서류가 왜 이렇게 더럽습니까? 화장실 가서 손 안 씻고 나옵니까? 이거야 기분 상해서 결제해 줄 수가 없네. 거래처에 갈 서류는 깨끗하게 관리하고 있습니까? 서류 더러워서 거래처에 밉보이면 그 책임은 박영진 씨가 지세욧!'
영진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할 줄은 모르고 굳이 사원들이 다 있는데서 큰 소리를 쳤다는 생각 때문에 열이 뻗어 있다. 자신보다 나이도 어린데 꼬박꼬박 '박영진 씨'라고 힘주어 말하는 그 입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싶은 마음이다.
"어휴~~ 진짜! 내 주먹 한 방이면 나가떨어질 대리놈이 뭐? 박영진 씨? 책임지세요? 어휴~~ 참지 말고 진짜 한 방 갈겨버려?"
영진은 권투 선수처럼 주먹을 이리저리 휘두르는 폼을 좀 취하다 다시 한숨을 내쉬곤 구부러진 어깨를 맥없이 흔들며 로얄골드맨션으로 들어선다. 오늘도 선아는 희망이를 옆에 두고 평상에 앉아 있다.
"안녕하세요..."
오며 가며 안면을 튼 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서먹한 둘이다.
"어... 어. 추운데 밖에 있구나. 얼른 들어가. 감기 걸려..."
"네..."
영진은 말을 더 할지 말지 생각하다 그냥 발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선아가 안고 있는 강아지 숨소리가 이상하다. 영진은 발을 멈추고 강아지를 쳐다보았다. 몸을 떠는 것 같기도 하고 목에 뭔가가 걸렸는지 '캑캑'거리기도 한다. 영진은 선아 쪽으로 가 쪼그리고 앉아 강아지를 조심히 쓰다듬는다.
"강아지 이름이 희망이지? 좀 아픈 것 같은데..."
"네.. 설사를 하고 밤새 낑낑거려요."
"병원에서는 뭐래? 데리고 가 봤어?"
영진의 질문에 선아는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힘없이 고개를 젓는다.
"엄마가... 엄마가 오면 병원에 갈 거예요. 그래서 엄마 기다리고 있어요."
영진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본다. 10시가 넘었다. 이 시간에 하는 동물병원도 없겠지만, 언제 엄마가 와서 병원에 간단 말인가. 영진은 선아가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자꾸 시선을 피하는 모습을 보며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한다.
"그래. 알았다. 그래도 추우니까 집에 들어가서 기다려. 감기 걸려."
"집에 들어가면... 윗집 아저씨가 또 내려와서 현관문을 발로 차고 날리칠 거예요. 좀 전까지 희망이가 낑낑 거리는 소리 듣기 싫다고 가만 안 두겠다고 협박하고 갔어요. 그렇게 큰 소리도 아니었는데..."
영진도 요즘 201호 길춘남이 아랫집 현관 앞에서 난동을 부린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원래 자신처럼 존재감도 없이 조용히 사는 사람이었다. 계단에서 만나도 고개만 까딱거리며 인사한 뒤 얼른 집안으로 들어가서는 뭘 하는지 아무 소리도 안 나다가 아침이면 다시 조용히 집을 나와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101호 선아 아빠가 죽고 난 뒤부터 다른 사람이 되었다. 201호 앞 계단을 지날 때 큰소리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마주치면 평소처럼 지나가다가도 어떨 때는 눈빛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영진은 뭔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자신도 처음 보는 살기 가득한 눈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영진의 께름칙한 기분은 현실이 되었다. 로얄골드맨션 입주민들은 귀가 찢어질듯한 소리와 울음소리로 주말 아침을 맞았다. 모두 이게 무슨 일인지 놀라 잠옷을 입은 채로 소리가 들리는 복도로 나갔다. 영진은 모른 척 잠을 청하려고 했지만 소란한 소리는 커져만 갔다. 할 수 없이 점퍼만 걸치고 복도로 나갔다. 소리의 근원지는 101호였다. 영진이 계단을 내려갔을 즘엔 천문자 할머니가 울고 있는 선아를 안고 있었고, 선아 엄마는 주저앉아 벌벌 떨고 있었다. 경비 할아버지가 포대자루와 삽을 들고 와서 무언가를 주워 담는 중이었다. 묵직하고 경직되어 있는 무언가가 붉은 피를 흘리면서 포대자루 속으로 하나, 둘 들어갔다. 바람이 불자 비릿한 냄새가 났다. 영진은 갑자기 잃어버린 물건을 찾듯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희망이는? 왜 희망이 소리가 안 들리지?'
영진은 천문자에게 기대어 들어가는 선아를 따라 홀린 듯이 집안으로 들어갔다. 힐끗거리며 집안을 둘러보았다.
'없다!'
영진은 집안에 희망이의 존재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복도에서 보았던 경직된 것, 하나 둘 포대자루에 담기던 붉은 덩어리들, 그것은 어제까지 낑낑거리며 선아의 품에 안겼던 살아있는 존재였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이야? 아무리 소리가 듣기 싫어도 그렇지 어떻게 저렇게 잔인하게 훼손해서 문 앞에 던져놓을 수 있어? 미치지 않고서야 이게 인간이 할 짓이야? 도대체 그 새끼는 뭐 하는 놈이야?'
공포감을 느끼며 목을 움츠리고 천천히 주위에 사람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영진의 시선이 천문자를 지나 울고 있는 선아를 지나친다. 현관 쪽에 기대서 울고 있는 202호 유리를 지나 시우를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우 아빠를 지나친다. 시우 아빠가 위층으로 사라진 자리에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히죽 웃고 있는 길춘남과 눈이 마주친다. 영진은 자신이 희망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길춘남이 조용히 검지 손가락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간 뒤 엄지 손가락으로 천천히 목을 긋는다. 영진은 마른침을 꿀꺽 삼킨다. 움츠린 어깨 위의 머리가 보일 듯 말 듯 위아래로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