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5.

by Eun

오래된 창호 문이 삐그덕 소리를 낸다. 햇살이라고 할 것도 없는 날씨에 겨울바람이 신이 난 건지, 마른나무에 붙은 한 두 개 잎을 마저 떨어뜨리며 이리저리 몰고 다닌다. 바람에 실려가던 나뭇잎 하나가 지쳤는지 창호 문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려 한다. 그러자 매몰찬 손이 문고리를 잡아당기고는 바지춤을 올려 의자에 앉으며 말한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쳐. 참 이상하더란 말이지..."

"아니 그러니까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 말이유? 세상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그 총각이 그럴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네. 이게 참,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경비실 안 쪽방에 앉은 경비 할아버지 정상태와 천문자가 조용히 밀담을 나누고 있다. 낮게 쯧쯧 거리던 천문자는 믹스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두 손으로 쥐고 후후 불며 한 모금 마신다. 그런 문자를 쳐다보던 정상태가 핸드폰을 열어 사진을 한 장 보여준다.

"이게 그날에 찍은 사진이야. 흐릿하긴 해도 이거 찍느라고 얼마나 손이 떨렸는 줄 알아?"

"원래도 손 떨잖아요. 새삼스럽기는, 어디 함 봐요."

문자는 평소에도 자잘한 생색을 내는 정상태의 말을 무시하고 핸드폰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팔을 쭉 뻗고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에이~진짜. 하나도 안 보이네. 핸드폰 좀 좋은 걸로다가 바꿔요. 그 뭐야~~ 접고 펴고 할 수 있는 것도 있더구먼."

"에엥? 내 핸드폰을 왜 문자 씨 시력에 맞춰야 돼? 아직 좋기만 한데."

"됐고! 저기 입주민들 몰래 cctv 하나 답시다. 이대로는 불안해서 안 되겠어요. 그 뭐야~~ 물증! 그렇지 심증 말고 물증이 있어야 된다잖아요."

"알겠어요. 이래 봬도 내가 왕년엔 내 손 하나 거치면 안 되는 일이 없었어요. 내가 말했었나? 군대 다닐 때~~"

"그럼 일 진행시키고 중간 보고 해 줘요."

"거~~ 참! 사람 말하는데 매몰차게 일어나기는... 알겠어요. 또 연락하겠소."

문자는 종이컵을 구겨 휴지통에 던진 뒤, 몸빼 바지를 툭툭 털며 경비실을 나선다. 정상태는 팔을 뻗어 핸드폰을 쳐다보다 '잘 안 보이긴 하네'라고 중얼거리며 책상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빗자루를 들고 밖으로 나간다. 핸드폰에는 건물 귀퉁이 나무 뒤에 쪼그린 길춘남과 주위에 놓인 여러 개의 생수병이 찍혀있다. 자세히 보면 어둠 사이로 물을 길에 부으며 웃고 있다. 적목현상으로 붉어진 길춘남의 동공은 흡사 악마의 눈처럼 어둠 속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경비실을 나와 집으로 향하던 문자는 구름이 걷힌 자리에 햇빛이 비치자 걸음을 멈추었다. 동장군의 기세가 한풀 꺾인 것인지 햇빛을 받은 언저리 공기가 따뜻해져 왔다. 자연의 이치가 그렇듯 때가 되면 봄이 올 테지만 그래도 나뭇가지에 새순이 올라오려면 아직은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문자는 아련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쩌다가 이지경이 됐을까'

그 옛날 화려한 외관은 어디로 가고, 이렇게 초라하게 늙어버린 걸까. 건물이나 사람이나 늙으면 초라해지는 건 똑같구나. 문자의 시선이 건물 벽에 새겨진 로얄골드맨션이라는 글씨에 머물자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로얄이라는 글씨는 빨간색으로, 골드라는 글씨는 골드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지금은 맨션이라는 검정 글씨처럼 모두 다 비슷하게 칠이 벗겨져있다. 자신의 마지막 보금자리라고 생각했던 집이 흉물이 되어가는 모습도 보기 싫은데, 남들 손가락질하는 사건들이 벌써 몇 번째인가. 문자는 한동안 아파트 주물현판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할머니, 내가 잘하고 있는 거 맞지? 이번에도 도와줄 거지?'라고 마음속으로 읊조리며 건물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똑똑!

"영진 씨~~~ 영진 씨~~~"

"..."

"집에 있는 거 다 아니까 얼른 문 열어. 하나, 둘~~"

셋도 다 세기 전에 문이 빼꼼히 열린다.

"또 왜요... 주말이라 자고 있는데... 아 진짜~이렇게 불쑥불쑥 찾아오시고... 제 사생활은 존중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노란색 병아리가 그려진 잠옷을 입은 영진이 누가 봐도 억울한 얼굴을 하고 중얼거린다.

"됐고! 따라 들어오기나 해."

문자는 답답하다는 듯이 문을 획 열어졌히고는 영진을 밀치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아니~ 여긴 제 집이에요. 할머니 집이 아니라... 그러니까 내 말은..."

영진은 또다시 중얼거리다가 주위를 한번 둘러본 뒤 조용히 문을 닫는다.

문자는 요즘 경비원인 정상태와 301호 박영진을 몰래 만나고 있다. 둘 다 문자의 눈엔 미덥지 않지만 손이 하나라도 아쉬운 판인니 어쩌겠는가. 소파 가운데 앉은 문자는 영진도 앉으라고 눈짓을 한다. 뭐가 잘 안 풀리는지 머리를 벅벅 긁던 영진이 문자 맞은편 바닥에 앉는다.


"영진 씨, 내가 알아보라던 건 어떻게 됐어?"

"어떤 거요?"

습관적 모르쇠 버릇이 나오던 영진은 천문자와 눈이 마주치더니 급하게 태세를 전환한다.

"아~~~ 그거요? 네.... 뭐... 알아보긴 했는데..."

"아휴~~ 답답해. 알아봤다는 거야. 안 알아봤다는 거야?"

"그러니까 내 말은... 알아보긴 했는데요, 확실하진 않은데..."

"됐고! 요점말 말해. 된데? 안 된데?"

"안 된답니다. 아니... 안 될 것 같다고 했던가?"

문자는 뭐 하나 똑 부러지는 것 없는 영진을 보면서 괜히 끌어 들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봐왔지만 언제나 그렇듯 믿음이 안 생기는 얼굴이다. 그래도 직장은 꾸준히 다니는 것을 보면 한 사람 몫은 한다는 얘긴데... 모르겠다. 설마 다된 밥에 코 빠뜨리겠어?

"그래 알겠어. 나도 그럴 것 같았어. cctv도 없고, 괴로워하는 선아를 진정시키다 보니 현장은 훼손돼버렸고..."

"네, 네.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제가 봤다는 것도 증거로 쓰일지도 안 쓰일지도 모르고, 중요한 것은 무턱대고 들쑤시다가 2차 가해가 생길 수도 있다고..."


문자도 그래서 불안했다. 요즘 들어 다른 사람이 돼버린 길춘남을 어떻게 설명할까. '원래는 착하고 조용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다른 사람으로 변했어요. 마치 사람이 화가 나면 헐크로 변하는 것처럼요. 헐크 알죠? 초록 괴물.'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믿어줄까? 하지만 이건 사실이다. 건들거리는 행동 하며,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 그리고 변해버린 목소리와 말투... 생각할수록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핸드폰은 뒀다 뭐 했을까? 왜 다들 사진 한 장 남겨놓을 생각을 못했냐고. 하기야 나도 칠십 평생 이런 험한 꼴을 처음 보는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어? 놀란 턱이 안 빠진 게 다행이지..."

"사실 어제 퇴근하는 길에 오토바이에서 내리는 그놈을 봤거든요. 요 아래 편의점에 들어가길래 제가 몰래 따라 들어가 봤죠. 제가 또 맡은 임무가 있잖습니까?"

"그래? 잘했구먼. 그래서?"

"에흠~~ 그러니까 몰래 음료수를 고르는 척하면서 보니까 좀 화가 난 것 같더라고요. '돌팔이 의사지. 지가 뭘 안다고 지껄여? 인격 같은 소리, 자아 같은 소리 하고 앉아있네. 난 나야. 이제 이게 나야. 이제 내 이름이 덕재라고.' 이러더니 갑자기 또 실실 웃는 거예요?"

"뭐라고? 왜 웃는 거야?"

"윽~~~ 지금 생각하니까 소름이 돋네."

영진이 말하다 말고는 어깨를 들썩이며 한쪽 팔을 문지른다.

"실실 웃더니 한다는 이야기가 글쎄 '이제 춘남이 너는 없어져야겠어.!' 이러는 거예요? 자신을 전혀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더라니까요. 자기 이름이 춘남인데, '춘남이 너는'이러잖아요?"

"그래서 동영상은 찍었고?"

"네? 에... 그게... 할머니가 무슨 일 있으면 사진이나 동영상을 무조건 찍어야 한다는 말은 생각이 나긴 했는데... 그러니까... 내 말은..."

문자의 반응에 영진은 당황했다. 자신도 춘남이 편의점을 나가고 나서야 소리라도 녹음을 했어야 했는데라며 뒤늦게 후회했기 때문이다.

"하기야 그 상황에서 어떻게 자료를 남길 생각을 할 수 있었겠어. 그래도 소득이 없는 건 아니야. 우리가 저번에 경비실에서 한 이야기가 맞아떨어지잖아. 춘남 씨가 덕재고, 덕재가 춘남씬거야."


문자의 말이 끝나고 둘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깍~ 하는 까마귀 소리에 정신이 든 문자는

"경찰에 신고할 때 하더라도 지금 우리 신변도 위험할 수 있어. 그래서 경비 영감한테 복도 쪽에 cctv를 몰래 한 대 설치해 달라고 했고, 경비실 앞에도 한 대 설치해 달라고 했어. 기계는 젊은 사람이 잘 다루니까 영진 씨가 신경 좀 써줘. 왔다 갔다 할 때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바로 연락해요. 동영상이나 녹음, 알지?"

문자는 더 들을 말이 없다고 생각하고 두 손으로 양 무릎을 짚으며 일어났다. 영진은 자신이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문자는 영진이 역할을 다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하는 이야기는 확신을 가지기에 도움이 되었다. 어떡하지? 문자는 해결책은 떠오르지 않고 고민만 더 깊어지는 것 같았다. 문자의 말을 들은 영진은 신변이 위험할 수 있다는 말에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아~~ 진짜! 이제 어떻게 해요? 예? 그 인간이랑 출퇴근 시간도 비슷하던데 혹시 나한테 무슨 일 생기는 건 아니겠죠? 아니 한 며칠 찜질방에서 지낼까?"

문자는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나가려다 고개를 획 돌려 한심하다는 듯이 영진을 쳐다본다.

"됐고! 침착해. 걱정은 아랫집 선아랑 유리가 먼저지 자네야 건장한 남잔데 뭐 그리 호들갑을 떨어. 정신 차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계획이나 생각해 봐. 알겠나?"

영진은 한 소리를 듣고도 할 말이 남았는지 나가는 문자의 뒤통수에 대고 기어이 한 마디를 보탠다.

"알겠어요. 그건 알겠는데요... 그럼 혹시 cctv설치하는 거는 우리가 돈 내는 거예요? 그거 비싸던데...."


월요일 연재
이전 11화에피소드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