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자 이야기

by Eun

"아그야, 복권 한 장 주그라."

라고 말하며 천문자는 몸빼 바지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리고 바지에 달린 줄에 매달려있는 천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지폐 다섯 장을 꺼냈다.

"아이고, 시장에서 김밥 팔아 얼마를 번다고 매주 복권을 사는지 원.."

천문자는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아그' 소리를 듣는 편의점 주인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든지 말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산 복권을 반으로 접어서 천주머니에 넣은 뒤 천 주머니를 다시 몸빼 바지 속으로 쑥~하고 집어넣었다.

천문자는 동네 시장 입구에서 김밥 장사를 한다. 세모난 땅을 가진 과일 가게의 각진 부분을 잘라 자리를 마련한 곳이라 5평도 되지 않는 곳이지만 천문자는 그곳에서 30년 넘게 김밥을 팔았다. 가게 전면에 김밥을 보관하는 투명 아크릴 케이스와 김밥 재료가 담긴 통들을 올릴 수 있게 제작한 나무 널빤지가 있다. 하루 종일 김밥을 마는 앉은뱅이 의자뒤로는 작은 중고 냉장고와 주워 온 옷장이 있다. 버려진 택배 상자를 뜯어 '시장 김밥 한 줄 이천 원'이라고 글을 쓰고, 노끈으로 앉은뱅이 의자가 있는 공간의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아 놓았다. 이 정도가 가게 살림의 전부다. 허접해 보이는 장소지만 천문자의 손맛을 거친 김밥은 맛있다고 나름 소문이 나 있다. 어릴 적 할머니께서 시래기를 양념에 졸여 싸준 김밥에서 힌트를 얻어 개발한 김밥이다. 당연히 양념 비법은 문자만 안다. 거기다 하루에 딱 100줄만 팔고, 행여나 다 팔리지 않더라도 4시가 되면 그날 장사는 끝이다. 주말은 또 쉰다. 경제성과 희소성, 거기다 맛까지 갖춘 김밥이기에 아침 출근 시간이 빠르긴 하지만 이른 퇴근과 주 5일제 근무라는 점이 문자에겐 정년퇴직 없는 평생직장이 되었다.


"김밥 할머니 또 복권 사네. 아니~ 복권 안 사도 30년 넘게 장사했으면 그 돈만 모아도 몇 십억은 되겠구먼. 그 돈 다 뭐 하고 매번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복권을 산데?"

파리채로 파리를 쫓던 과일가게 주인이 편의점에서 나오는 천문자를 보자 심술궂게 툴툴거린다. 과일가게 주인과 천문자는 처음에는 깍듯하게 서로를 '사장님'이라고 불렀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사과댁'과 '김밥 할머니'로 부른다. 오래 보아 온 사이라 허물이 없다지만 과일가게 사장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뱉고 보는 성격이라 애먼 소리를 듣는 쪽은 늘 천문자다. 특히 매주 복권을 사는 천문자의 행동을 가만히 보지 못하고 늘 한 마디를 거들 고야 만다.

"오늘은 어쩐지 조용하다 했네~ 돈 음따! 김밥 이거 얼마 한다고 돈이 있겠냐, 근디 사과댁은 오늘따라 장사가 안 되나 왜 또 지랄이여?"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서 그렇지. 버스 타고 다니지, 점심은 김밥 먹지. 아프다고 쉬기를 해, 날씨가 안 좋다고 쉬기를 해? 또 뭐야~~ 김밥에 들어가는 채소는 집 옥상에서 키운다면서요?"

사과댁이 살랑살랑 웃으며 천문자의 비위를 건드리자, 천문자가 사과댁을 째려본다. 오랜 시간 봐왔지만 영~~ 정이 안 가는 사람이다. 장사할 때도 싱싱한 과일을 앞에 두고 정작 팔 때는 똑같은 거라며 상자 안에 든 지난 과일을 파는 인간이었다. 가격도 비싸게 받으면서 덤으로 한, 두 개 더 끼워주며 사람 좋은 척을 했다. 거기다 장사가 안 되는 날엔 문자가 번 돈을 어떻게 하는지 쓸데없이 캐물었다. 사과댁이 그럴수록 문자는 속으로 고소해했다. 내가 돈을 어떻게 하면 왜? 어쩔 것이여~네가. 훔쳐가기라도 할 것이여? 웃기고 자빠졌네 흥.


문자는 사과댁이 가게 주위를 어슬렁 거리며 중얼거리거나 말거나 다시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경건한 마음으로 김밥을 싸기 시작했다.

"옷을 사 입기를 하나~ 화장을 하기를 하나~ 돈이 쓸 때가 없단 말이지. 그런데도 매주 복권을 사니까 안 이상해? 에이~~~ 김밥 할머니, 그러지 말고 나한테만 말해줘용~ 그 돈은 다 어디 숨겼데? 응? 안방 전기장판 밑에 깔아놨나? 항항항~~"

금방 싼 따끈한 김밥을 잽싸게 잡아 채 먹는 사과댁을 보며 천문자는 속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장판은 무슨.... 나.. 나 전기장판 안 써. 그리고 맨손으로 먹지 말아. 위생! 청결! 몰라?"

"깜짝이야~~ 왜 놀래요? 누가 보면 진짜 장판 밑에 숨겨놓은 줄 알겠네. 그러니까 내 말은 옆집에 과일가게가 있으면 과일도 좀 사 먹고 그러라는 말이에요, 그게 정이지. 내 말이 틀려요? 그리고 이건 김밥값, 요즘 사과가 비싼 거 알죠?"

천문자는 투명 쇼케이스 위에 올려진 색 바랜 사과 두 개를 보며 혀를 찼다. 요즘 경기가 안 좋다더니 사과가 영~ 안 팔리는 것 같았다. 문자는 '그래, 내가 인심 썼다. 돈 주고 사는 것도 아니고, 김밥보다 비싸다니 이익이겠지'라고 중얼거린 뒤, 벽에 걸린 배낭을 내려 조심스레 사과를 넣었다. 그래도 그렇지 돈 대신 매번 과일을 주고 지랄이여라고 또 중얼거렸다가, 두 개니까 선아 학생 한 개, 유리 학생 한 개 주면 되겠구먼이라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겨울이라 낮이 짧은 데다, 난방시설이 변변찮다 보니 해가 지면 갑자기 추워졌다. 문자는 오늘 장사는 이만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문자는 남은 김밥 여섯 줄을 가만히 쳐다보다 두 줄씩 포장해 각각 검은 봉투에 담아 배낭에 넣고 집으로 향했다.


천문자는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가져온 김밥을 경비실 영감에게 하나 주었다. 그리고 거기다 사과를 넣어서 앞집 선아네와 윗집 유리네에 문고리에 하나씩 걸어두었다. 선아는 학교에서 아직 안 왔을 것이고, 유리는 아르바이트 가서 늦게 집에 오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컴컴해진 복도에 서서 공기가 전해주는 소리를 들어본다. 다행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평화로운 밤이다. 그려, 이런 날도 있어야지. 암, 감사한 일이구먼. 천문자는 얕은 한숨을 쉰 뒤 집으로 들어갔다.


보일러도 켜지 않은 집은 서늘한 냉기로 가득하다. 천문자는 불도 켜지 않고 곧바로 안방으로 향한다. 가로등 불빛으로 생긴 문자의 그림자가 안방을 가득 채운다. 문자는 가로등도 보지 못하도록 등지고는 가방을 열어 오늘 번 돈을 노란 고무줄로 묶은 뒤 전기장판 밑에 밀어 넣는다. 그리고 돈뭉치로 울퉁불퉁한 전기장판을 두툼한 손으로 매만져본다. 만족감이 밀려온다. 천문자는 가방을 옆으로 툭 던져두고 장판 위에 펴 둔 극세사 이불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부드러운 촉감에 몸이 노곤해진다.

'그나저나 사과는 내가 장판 아래 돈을 숨겨놓는 것을 어떻게 알았데? 하여튼 쓸데없이 촉이 좋고 지랄이여.'

극세사 이불을 칭칭 감던 천문자는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이건 내 돈이여. 이 집은 내 집이여. 아무도 못 가져가. 아무도...'


로열 골드 맨션 102호에 사는 천문자는 이 건물의 첫 입주자다.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고 바둥바둥 거리며 장만한 집, 장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천문자는 자신처럼 늙어 볼품 없어진 건물에 한없는 동정과 연민이 밀려왔다. 스물다섯만 넘어도 노처녀라고 불리던 시절 중매쟁이의 거짓말에 속아 물건 떨이하듯 팔아넘겨진 결혼이었지만 그런대로 살아지는 삶이었다. 손자 타령하는 시어머니에게 사내아이를 안겨주고, 몸도 풀지 못한 채 식당에 나가 일했지만 원래 결혼은 이런 거라고 생각했다. 가시 같은 말만 하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한 직장을 오래 다니지 못하는 남편 탓에 집안의 가장이 되어버린 천문자였지만 불평 한마디 없이 악착같이 돈을 모아 이 집을 샀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남편과 다 큰 아들이 버티고 있는 집에 자신의 공간은 없었다. 자기 삶을 보상해 줄 한 줄기 빛이라 생각하며 오냐오냐 키웠던 아들은 무능했고, 커가면서 천성이 부지런한 천문자와 늘 부딪쳤다. 시어머니 성화에 대출을 받아 차려 준 PC방은 늘 적자였고, PC방을 접은 뒤 동업을 하기로 한 고깃집은 사기를 당해 남은 돈을 홀라당 날려먹었다. 아들은 천문자에게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며 또다시 돈을 달라 떼를 썼고, 실업자인 남편과 시어머니는 한 번만 더 믿어주자고 했다. 하지만 잘 될 리가 없었다. 밤늦게까지 식당에서 일해서 번 돈은 무능력한 부자에게 몽땅 들어갔고, 죽을 때가 되어서야 미안하다며 몇 푼 남겨준 시어머니의 재산도 아들 빚으로 들어갔다. 아들은 천문자와 심하게 다툰 뒤 눈에 쌍심지를 켜고 "그럼 내가 나가서 죽으면 될 거 아니야. 엄마가 바라는 대로 해줄게. 나 죽고 어디 잘 사나 보자"'라고 저주를 퍼부은 뒤 집을 나가 몇 년째 연락이 없다. 그리고 끝까지 자기 죽으면 제사 지내 줄 아들이라며 돌아올 거라 굳게 믿던 남편은 깊은 밤 '아들'만 찾다 영영 눈을 감았다. 남편 상을 치르고 혼자 집으로 돌아온 날, 천문자는 형기를 마치고 석방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전생의 업을 끝낸 것 같았다. 이제는 환생만 하면 되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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