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시우 아빠, 퇴근하시는구나. 오늘은 일찍 마치셨네. 시우가 좋아하겠어요~ 호호"
"예~~ 예, 흐흐~ 일찍 퇴근했어요. 시우랑 오랜만에 고기 구워 먹어요. 고기 좋아요."
장바구니를 손에 들고 퇴근한 시우 아빠가 쓰레기를 들고 나온 천문자와 마주쳤다.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으며 사라지는 시우 아빠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천문자는 오늘따라 유난히 어깨가 축 내려앉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에이 무슨 일이 있을 게 뭐 있겠어 주책없는 할망구의 기우겠지라고 중얼거린 천문자는 쓰레기를 버리고 손과 옷을 탈탈 턴 후 경비실로 향했다.
"수고가 많아요. 오늘은 어땠어요?"
컵라면에 물을 붓던 정상태가 천문자를 보며 반갑게 인사한다.
"오늘도 라면 이유? 밥 챙겨 먹어요. 청승맞게 맨날 라면이야 라면!"
천문자는 정상태를 타박하면서도 외투 호주머니에 넣어둔 김밥 한 줄을 꺼내 책상에 올려놓는다.
"허허~~ 이 김밥이랑 같이 먹으려고 했지요. 김밥에 라면, 얼마나 좋소 허허~ 그건 그렇고 내 할 말이 있는데...."
"안 그래도 오늘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오긴 했는데... 무슨 일 있어요?"
정상태는 오전에 천문자에게 전화해할 말이 있다고 했다. 평소답지 않은 목소리에 천문자는 그 내용이 사뭇 궁금했지만 기다려주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떤 말을 해도 받아들이자고 생각했다.
"저... 사실은... 그게... 참..."
"됐고! 본론만 이야기해요. 뭐든지 다 들어줄 테니."
"허허~~ 그러니까... 참... 그렇게 됐소. 사실은 딸아이가 며칠 전에 전화가 왔소."
"외국에 있다는 자식 말이에요? 왜요?"
"허허~~ 그러니까... 딸이 한 말들이 다 진짜였지 뭐요. 몇 년만 기다려달라는 말... 한국에 갈 거라는 말... 아빠랑 살 거라는 말... 이 말들이 다 진짜였지 뭐요. 허허~~"
세계지도가 지워질 정도로 문지르던 두 손을 비비며 어색하게 웃는 정상태의 얼굴은 행복으로 가득 찼다. 며칠 전 받았던 전화 통화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얼굴을 바라보는 천문자를 향해 정상태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지금 한국에 도착했다고 합디다. 놀라게 해 주려고 숨겼는데 여기 생활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미리 이야기했다고 하네요. 딸아이가... 집을 마련했다고... 그래서 이제 같이 살자고 하는데... 허허~ 여기 내가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돼서 미안하게 됐소. 허허~~"
"무슨 소리예요. 정말 잘 됐어요. 축하해요. 축하해. 여기 일은 걱정하지 말고 얼른 준비해요. 언제 가기로 했어요? 아니지 당장 가요. 당장!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가요."
천문자가 정상태의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여기 와서 힘든 일만 겪었지요. 미안했어요. 미안해... 이제 자식이랑 행복하게 살아요. 그간 힘들었던 마음은 여기 남겨두고 가요. 좋은 일만 생기길 바랄게요."
"고맙소. 힘들지 않았어요. 다들 착한 사람들이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이 들었소. 그래서 남을까도 생각했는데 늙은이 하나 보고 한국에 온다는 딸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문자 씨 아니었으면 내가 이렇게 건강하게 지낼 수 없었을 거요."
"하하~~ 이제 늙은 할망구한테 문자 씨라고 불러줄 사람이 없겠네요. 그건 아쉽네요. 하하~~"
어느덧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 일기예보에서 오늘은 올겨울 최고 기온이라고 했다. 따스한 날씨처럼 온기가 경비실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잠시 후 유리와 선아가 건물에서 나와 경비실로 뛰어갔다. 그리고 노란색 병아리 잠옷을 입은 박영진이 터덜터덜 경비실로 걸어갔다. 다신 없을 웃음소리와 대화 소리가 경비실을 중심으로 건물을 감싸고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놀란 까마귀가 푸드덕 날았다. 그리고 그 소리에 놀란 길춘남이 계단에서 멈칫했다.
"에잇~~ 씨, 저 까마귀 새끼!"
길춘남은 뭐라도 던질 생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씩씩대다가 다시 몸을 낮추고 102호 문을 살짝 열었다. 그리곤 불도 켜지 않고 집안을 훑기 시작했다. 거실과 부엌을 뒤졌다. 생각보다 단출한 살림에 별로 찾아볼 곳이 없었다.
'아닌가? 분명 어딘가 있을 텐데... 춘남아, 기억 좀 해봐.'
"어~ 알겠어. 그러니까~ 뭐랬더라? 시장에서 과일 살 때 과일 집 아줌마가 김밥 할머니는 그러니까 102호 할머니는 집에 돈을 쌓아놓고 살 거라고 했어. 은행도 이용 안 하고, 돈을 쓸 줄도 모른다면서. 맞아~ 틀림없이 그렇게 이야기했어, 덕재야."
'흣~ 그래? 그럼 어딘가에 있겠지. 조금 더 찾아보자. 돈 냄새가 어디서 나냐~~'
달빛에 비친 하나의 그림자가 안방으로 들어갔다. 방 한가운데 서서 날카로운 눈으로 돈을 어디에 숨겼는지 둘러보았다.
'어디 숨겼을까~~ 보자~~ 뻔하게 옷장은 아니겠지? 그럼 재미없는데 키키키~'
길춘남은 천천히 옷장을 향해 발을 뗐다. 그러다 짧은 보폭으로 옷장을 향하던 발이 전기장판에 걸렸다. 전기장판은 켜져 있지 않은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그 위에 이불이 세 겹으로 쌓여있었다.
'에잇~ 구두쇠 할망구 같으니라고. 돈 아끼려고 전기장판은 켜지도 않고 이불만 덮고 사는가 보네.'
갑자기 짜증이 난 길춘남이 이불을 발로 걷어찼다. 두꺼운 이불이 힘겹게 밀렸다. 그러자 이불 밑에 숨겨둔 노란 고무줄로 돌돌 말린 돈뭉치 두 묶음이 데굴데굴 굴러 나와 길춘남의 발에 부딪쳤다. 길춘남이 발밑에 있는 돈뭉치를 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빙고!'
경비실을 나와 집으로 온 천문자는 자려고 누웠다가 선아와 유리를 거실로 불렀다. 천문자네 집에 같이 사는 유리와 선아가 잠옷 차림으로 거실 바닥에 앉았다. 선아와 유리는 진지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천문자를 보며 숨소리를 죽였다. 눈을 감고 침묵하고 있던 천문자가 결심을 했다는 듯 조용히 눈을 뜨며 말했다.
"선아야, 유리야, 할머니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말해도 될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줄 수 있겠냐?"
선아와 유리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선아 엄마는 집을 나간 이후로 전화도 받지 않았다. 생활비도 처음엔 조금씩 보내주더니 이제는 그마저도 잊은 듯했다. 선아는 지금 유리와 함께 천문자네 집에서 같이 산다. 혈육도 아닌데 자신을 이렇게까지 챙겨주는 천문자가 너무 고맙지만 한 편으로는 미안한 마음 때문에 괴로웠다. 그런데 오늘 할 말이 있다고 하니 혹시 집을 나가라는 말은 아니지 걱정이 되었다. 그럼 난 어디로 가야 하지? 선아는 울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사정은 유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집을 빼앗겼다. 그 집엔 검은 양복을 입은 덩치들이 들락거렸다. 집은 더러워졌고, 소란스러워졌다. 돈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복도에서 유리를 만날 때마다 욕을 하며 부모가 어디 있는지 캐물었다.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은 유리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뒤 집은 자물쇠로 채워졌고 현관문엔 '들어가면 죽는다!'라고 쓴 종이를 붙여놓았다. 유리는 이제 갈 곳이 없었다. 그런 유리에게 천문자는 하늘에서 내려준 구세주였다. 그런 천문자가 심각하게 말할 것이 있다고 하니 혹시나 내쫓기는 것은 아닐까 불안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유리와 선아는 서로를 쳐다보며 마음속으로 말했다.
"그렇게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지 않아도 된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니까. 다만 확신이 필요해서 부른 거야. 마음의 확신 말이여."
"확신이라니? 무슨 확신이요?"
유리와 선아가 멀뚱하니 천문자를 쳐다보았다. 그 눈망울을 보는 천문자가 미소를 지었다.
"할머니는 로얄골드맨션에 이사 왔을 때부터 너희들이 좋았단다. 경비실 앞 평상에서 소꿉놀이를 하다나 지나가는 나를 보며 '할머니 밥 먹고 가세요'하며 웃었지. 가방을 메고 학교 간다며 뛰어가다가도 뒤돌아서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소리치는 모습도 아직 눈에 선하구나. 김밥을 줄 때면 눈을 똥그랗게 뜨고 최고라며 폴짝폴짝 뛰는 게 얼마나 예뻤던지. 애틋했지... 안타깝기도 하고... 잘 살았으면 좋으련만. 할머니도 이때까지 살아보니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구나.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해답을 몰라 알려줄 수 없단다. 안타까운 일이지.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란다. 우리는 과거에 살아선 안 돼. 더구나 너희들은 더 그렇지."
천문자는 유리와 선아를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용기가 생겼다.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오지랖 넓다고 생각할까 봐, 혈육도 아닌데 책임지지도 못할 말이라고 할까 봐 두려워서 말하지 못했단다. 하지만 이젠 용기를 내보려 한다. 나는 지금까지 행복이 뭔지 모르고 살았어. 아니 가족이 뭔지 몰랐다고나 할까. 하지만 너희들과 산 요 며칠이 나에겐 진정한 행복이고 이게 가족이란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래서 앞으로도 같이 살고 싶구나. 너희들만 괜찮다면 말이야."
천문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선아와 유리의 눈에서 툭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죽고 싶었던 날들이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던 날들이었다. 새벽에 눈을 뜨면 밧줄을 어디에 묶어야 할까를 생각하며 거실을 배회한 적도 있었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막살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나쁜 마음이 들 때마다 그들을 계속 쳐다봐주며 관심을 주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천문자였다. 그런 천문자가 자신들과 가족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믿기지 않은 말에 선아와 유리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른 유리가 말했다.
"할머니~ 저희들을 이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희들은 할머니가 너무 좋아요. 선아와 잠잘 때마다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고, 이 행복이 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어요. 저희들에게 부모는 혈연으로 묶인 족쇄였어요. 평생 맞아도 모자랄 매를 맞았고, 멸시를 당했어요. 이번 생은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흑흑~ 할머니가 저희를 가족이라고 생각해 주신다니 흑흑~~ 감사.. 감사합니다 흑흑~~"
유리의 말을 듣던 천문자도 마음이 울컥했다. 자신을 원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천문자에게도 낯선 감정이었다. 오래전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느껴보았던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문자야~'라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따뜻한 할머니의 손길이 느껴지는 듯했다. 천문자는 마음속으로 '할머니, 이게 할머니가 원하는 거였지? 그래서 이렇게 기다리게 한 거지? 이때를 위해서... 그 번호가 말이야... 이제야 할머니의 깊은 뜻을 알게 된 것 같아. 할머니,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선아와 유리가 울다가 서로를 보며 웃었다. 선아가 말했다.
"그런데 할머니, 처음에 말한 확신이라는 게 뭐예요? 그 마음의 확신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