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0

by Eun

종이를 들고 있는 천문자는 좀 전까지 서럽게 울던 이유리의 모습이 생각나 마음이 아팠다. 이유리는 자신보다 더 큰 짐을 지고 살아가는 아이였다. 사랑받지 못한 부모 밑에서 대물림되는 냉대를 부정하며 자신이 노력하면 부모도 결국 사랑해 줄 거라 믿는 아이였다. 하지만 그들의 부모는 사랑이라는 단어조차 몰랐다. 그건 밥을 먹여주는 수단도 아니었고, 들으면 행복해지는 단어도 아니었다. 이유리의 부모를 계속 봐왔던 천문자로서는 더 이상 나올 것도 없는 정에 매달리는 이유리가 가엽기만 했다. 그래서 이대두가 사고가 났을 때 마냥 걱정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 천벌을 받은 거야. 그러게 자식한테 몹쓸 짓 하면 벌 받는다는 것도 알아야 해. 이제 정신 차리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사람한테만 기댈 수 있는 용서였다. 용서라는 단어를 아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정서였다. 그들에게 이유리는 그냥 돈이거나 짐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종이가 뭐요?"

종이를 들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천문자를 향해 정상태가 말을 걸었다. 정상태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천문자가 종이를 내밀었다. 옆에서 답답한 마음에 침만 삼키고 있던 박영진이 종이를 잡아 채 읽기 시작했다.

"경고장? 안사영과 이대두는 윗 집을 담보로 일천만 원을 대출하고, 매달 이자 일백이백사십만 원을 내기로 했으나 육 개월째 이자와 원금을 내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원금과 이자가 삼천만 원을 초과하였으므로 계약서에 작성한 내용대로 담보로 잡았던 집을 팔아넘길 예정이니 일주일 안으로 집을 비워야 한다. 만약, 집을 비우지 않으면 이 또한 계약서에 작성한 대로 딸 이유리의 신체포기를 하는 것으로 알게ㄷ..."

글을 읽어 내려가던 박영진의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멈춰버렸다. 천문자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었고, 정상태는 벌떡 일어나 손에 들고 있던 수첩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씩씩거렸다. 반면 박영진은 편지를 읽고 나서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게 불편했다. 가까이 살지만 속 사정을 어떻게 알겠는가, 옆집에 살인이 일어나는지, 죽는지 모르고 사는 세상이 아니던가. 각자 자기 살기 바쁜데 이웃에 누가 사는지 어떤 일이 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이렇게 경찰이 찾아오고 사채업자가 찾아와야.. 그래서 사건이 일어나야.. 그제야 '그런 일이 있었어?' 정도로 반응하고 다시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던가. 박영진은 속으로 이 사실을 몰랐던 자신을 위해 변명거리를 찾았다. '아무리 이웃이라도 내가 어떻게 유리 학생 사연을 알 수 있겠어. 오며 가며 얼굴만 보는 정돈데... 그리고 다들 나처럼 몰랐을걸? 유리 학생도 그래~ 이런 일이 있으면 경찰에 신고하면 되지... 괜히 나섰다가 역이기라도 하면...' 줏대 없는 박영진은 자신은 이만 빠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해결할 범위를 넘어선 것 같아요. 차라리 지금이라도 경찰 신고하고 저는 이만..."

들릴 듯 말 듯 한 박영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상태가 다시 의자에 앉더니 화가 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영진 씨 말이 맞아요. 지금 경찰에 신고합시다. 사채는 신고하면 되지 않아요? 아니 어쩌다가 사채까지 써서 유리 학생을 힘들게 하는 거요. 이게 사람이 할 짓이요?"

"선택지가 없었겠죠. 돈은 필요하고 나올 때는 없고. 그나마 유리 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보내줬다는데 그마저도 못 보내주게 됐나 봐요. 경기가 안 좋다 보니 일하는 곳에서 제일 먼저 잘렸나 보더라고. 집에 가봤더니 냉장고며 찬장이 텅텅 비었더라고요. 어찌나 안타깝고 미안하던지... 흑흑"

"아이고~~ 그런 사정이 있었구먼. 난 그것도 모르고 나갈 때마다 아르바이트 잘 다녀오라고 매번 인사했구먼. 웃으면서 대답하길래 진짜인 줄 알았지 뭐요."

"그 속 깊은 것이.. 그랬을 거예요. 남들한테 폐 끼치며 살고 싶어 하지 않더라고요. 이것도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하다며 우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몸이며 마음이 얼마나 상했을 거야. 진짜 천벌 받을 인간들이 왜 이리 많아? 302호 시우도 불쌍하고, 우리 유리, 선아도 불쌍하고 나도 불쌍하고 다 불쌍해 다! 어휴~~ 흑흑"

"아니 저는 왜...? 저는 괜차ㅇ~"

눈치 없이 말하는 박영진의 옆구리를 정상태가 급하게 찌른다. 마음 같아서는 젊은 사람이 이렇게 정이 없냐고 한마디 하고 싶지만 지금 그럴 단계가 아니다. 정상태는 박영진의 어깨를 손으로 꽉 눌렀다.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천문자의 눈물이 마른 뒤 다음 할 임무를 기다리자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박영진은 모르겠지만, 정상태는 천문자가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할지 다 생각을 해두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모진 풍파를 해치고 좌초된 로얄골드맨션이라는 배를 무사히 육지에 댈 수 있는 능력 있는 선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일등 선원이 되어 선장이 따르는 지시를 성실히 수행하리라 다짐했다.


한참을 울음과 침묵으로 일관하던 천문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됐고! 이제 지시를 내리겠어요. 모두 내 지시를 잘 따라주기를 바라요. 먼저 이번 주 주말에 유리네 짐은 우리 집으로 옮겨줘요. 유리는 그럴 수 없다며 사양했지만 이게 사양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어요. 선아 학생은 그래도 엄마가 돌아올 수도 있으니 짐은 놔두고 경과를 지켜보자고요. 선아랑 유리 먹이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안 그래도 혼자 사는 거 적적했는데 잘 됐지 뭐. 그리고 내가 유리 학생 피붙이도 아니고 결정 권한도 없지만! 난 그 집 부모한테 유리 학생 못 보내요. 절대 안 보내요. 알겠어요?"

"알겠어요. 그럼 영진 씨, 주말 비워놔요~ 토요일 일찍 움직입시다."

"네~ 그런데 우리 둘만으론 힘들 텐데...."

"됐고! 다음 임무예요. 당분간 cctv에 신경을 써줘요. 201호 총각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야 해요. 수상한 행동 하면 즉시 전화하고요. 그리고 영진 씨는 혹시 아는 경찰이나 변호사가 있을까요? 지금까지 로얄골드맨션에서 일어난 일들을 같이 공유하고 조언을 구할 전문가가 필요해요. 좋은 사람으로 알아봐 줘요. 이날 이후로 경비 월급은 따블, 영진 씨는 시급으로 계산하겠어요. 그리고 일체 경비도 제가 부담하죠. 이의 있나요?"

"알겠어요. 월급은 신경 쓰지 마시오. 지금 하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아요."

천문자는 자신이 제안한 경비 자리가 별 볼일 없는 자리인데도 두말 않고 지켜주는 정상태가 너무 고맙고 미안했다.

"... 고마워요. 여기 와서 좋은 일만 있었으면 했는데... 미안해요."

천문자는 정상태와 손을 맞잡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나서 영진 씨를 쳐다보았다.

"영진 씨, 괜찮겠어요?"

"아~~~ 네. 그럼요~ 도와야죠. 그런데 저는 왜 시급..."

"이상!"

천문자는 몸뻬를 추켜세우고 경비실을 나섰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천문자의 뒷모습은 마치 불속으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거침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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