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진은 오늘도 지각이다. 알람 소리에 맞춰 기상을 했지만, 침대를 벗어나는데 한참이 걸렸다. 이를 닦을 때도 '아~가기 싫다'는 한숨과 함께 이를 닦다 보니 영 속도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늘 간당간당한 시간에 헐레벌떡 어제 입던 옷을 대충 걸치고 나가는 것이다. 박영진이 구겨진 신발을 바로 신으며 계단을 내려갈 때 검은 양복의 남자들을 마주쳤다.
'어? 어제 봤던 남자들이잖아?'
남자들은 계단을 내려가는 박영진을 시시하게 보며 기싸움을 벌였고, 금방 기가 죽은 박영진은 애써 딴 곳을 쳐다보며 계단을 내려갔다. 밖으로 나갈 때쯤 남자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없는 건가? 딸이 하나 산다고 했는데?"
"그냥 문 따고 들어가시지요 행님~"
"무식하기는~쯧. 함부로 남의 집에 들어가면 그.. 그 뭐야... 입주 침입.. 뭐 그런 거 걸리는 거 몰라? 어차피 아직 날짜가 남았으니 내일 다시 오자고"
"옙. 그럼 분부대로 이 종이만 문틈으로 넣어놓겠습니다."
박영진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에 놀라 얼른 경비실에 들어가 숨었다. 남자들이 차를 타고 사라지자 현관문 앞에서 망을 보던 이유리가 털썩 주저앉는다. 유리가 문틈 밑으로 밀어 넣어진 종이를 집었다. 하얀 손이 바들바들 떨고 있다. 거기엔 유리의 부모님이 사채를 써 집이 넘어갔으니 일주일 안으로 집을 비우라는 내용이었다.
정상태가 갑자기 경비실로 들어온 박영진에게 검은 옷의 남자들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cctv를 통해 어느 정도 의심을 하고 있던 때였다. 하지만 집이 넘어간다는 것은 몰랐다. 정상태는 큰일이라는 생각에 천문자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건 레드 상황이에요. 오늘 저녁에 다들 모이세요."
"음! 그럼 위험하다는 소리지요? 알겠어요. 301호 총각에게 오라고 하겠소."
"조용히 움직여야 하니 밤 10시로 하세요. 경비실에 불은 켜지 말고요. 그리고 혹시 모르니 201호 총각 동태 좀 살펴놔요. 이상!"
"이상 무!"
통화를 마친 정상태는 빗자루를 들고 경비실 밖으로 나갔다.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그런지 일할 맛이 나지 않았다. 먼지만 대충 뒤적거리다 이내 멈추곤 허리를 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세먼지 가득한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전깃줄엔 까마귀 떼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한 번씩 부는 바람은 들릴 듯 말 듯 한 휘파람 소리를 내는 것 같았고, 그 박자에 맞춰 경비실 새시 문이 끼익~ 소리를 냈다. 정상태는 지금 이 순간이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음... 폭풍전야 같군... 꼭 뭔 일이 일어날 것 같단 말이야.'
정상태는 로얄골드맨션을 바라보았다. 다 쓰러져가는 폐건물처럼 생명력을 잃은 것 같았다.
'내가 여기 왔을 때가 봄이었나? 그때는 주위에 꽃들이 화사한 게 참 좋은 땅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아. 건물도 사람 따라가는 건가...'
정상태는 입주민들이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와 더불어 자신 또한 행복한 삶을 살기를 열망한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행복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부모 잘못 만나 또래들이 겪지 않아도 되는 고통을 겪고 있는 선아와 유리를 보면 정말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한때는 잘 나갔던 건물이지 않았는가? 자네도 말년에 사건 사고로 이렇게 손가락질당하면서 삶을 마무리하고 싶진 않을 테지. 유리 학생, 선아 학생 모두 참 착한 아이들이야. 자네가 외면하면 쓰겠나. 그 아이들을 위해 마지막 불꽃을 피워주게.'
정상태는 로얄골드맨션이라고 쓰여 있는 현판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밤 10시, 경비 할아버지 정상태와 102호 천문자, 301호 박영진이 경비실에 모였다. 눈을 감고 침묵하고 있는 천문자의 모습에 분위기는 더 가라앉았다. 박영진이 무거운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자 정상태가 옆구리를 쿡하고 찌른다. 실 눈을 뜨고 그 모습을 보던 천문자가 쯧~하고 혀를 차더니, 크음~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