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9

by Eun

"우리가 오늘 모인 이유는 로얄골드맨션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미스러운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서예요. 그리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그간 있었던 일련의 상황들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어요. 어떤 일들이 있었죠?"
천문자의 시선이 정상태로 향했다. 정상태는 마치 물어주길 기다렸다는 듯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호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준비해 둔 페이지를 펼쳤다.
"흠흠~~ 그러니까 첫 시작은 선아 아빠의 죽음이었지. 경찰은 단순한 사고사로 결정지었지만~"
"사실은 그놈 짓이었죠! 그리고 그건 할아버지 핸드폰에 증거가 있고요. 그리고~~"
"아~ 그 참! 성격도 급하구먼. 내가 이렇게 정리를 해서 말하고 있으니 끼어들지 말게!"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흠흠~ 그리고 내가 왜 영진 씨한테 할아버진가? 겉모습만 보면 그렇게 차이도 안 나는데... 그냥 아저씨라고 하게. 형이라고 해도 되고 흐흐~"
"그럼 그럴까요? 상태 형~~ 흐흐흐"
정상태와 박영진은 서로 히죽거리며 웃다가 침묵하고 있는 천문자를 보곤 다시 자세를 곧추세웠다. 정상태는 이렇게 농담할 때가 아닌데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하고 이야기가 딴 길로 새냐고 말하는 듯한 천문자의 표정에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흠흠~ 그래서 사진을 보고 201호를 의심하게 된 거지. 그리고 희망이 사건. 이건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아니까 말해보게."
"네, 그럼 이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아가 키우던 희망이를 죽여 선아네 현관 앞에 놔뒀던 사건이죠. 그것도 그냥 죽인 게 아니라 토막 내서... 으으~~~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 사건이었죠. 그때 다들 정신이 없어서 우왕좌왕할 때 제가 춘남 씨와~ 아니 덕재 씨와? 아무튼 201호와 눈이 마주쳤어요. 그 눈빛이 마치 '내가 죽였다. 그 사실을 말하면 너도 죽는다'는 눈빛이었다니까요. 전부터 봐오던 춘남 씨가 아니었어요. 전혀 다른 사람, 살기를 가진 굶주린 맹수 같았어요~ 그 이후로 최대한 안 마주치려고 피해 다니긴 하는데 그래도 아예 안 마주칠 수는 없더라고요. 계단에서 마주칠 때마다 너무 무서워요... 으흐~~"
"됐고! 201호 총각이 다른 사람 같다고 해서 나도 유심히 보긴 했어요. 얼마 전엔 현관 앞에서 마주쳤는데 나를 위아래로 쳐다보더니 휘파람을 불더라니까요. 확실히 그전과는 다른 면이 있더군요. 혹시 증거가 있는 거예요?"
정상태가 수첩을 넘기며 말한다.
"원래 201호 총각은 술을 안 마신다고 했어요.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술 마시고 불미스러운 사건을 일으켰나 봐. 그래서 입에도 안 댄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요즘은 매일 술을 마신다니까. 한 번은 내가 재활용 쓰레기를 정리하다가 술병을 놔두고 가길래 '춘남 씨'라고 불렀더니 처음엔 자신을 부르는 줄 모르고 가더라고, 그래서 다시 '춘남 씨, 요즘 매일 술이네. 무슨 일 있어?'라고 했더니, '아~춘남이요, 그거 춘남이가 마신 거 아니에요. 제가 마신 거예요.'라고 하더라니까. 그때 얼마나 소름이 끼쳤는지...."
정상태가 한 손으로 팔을 문지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박영진이 마침 생각이 났다는 듯이 핸드폰을 꺼내 말을 이었다.
"제가 회사에 출근해서 좀 알아봤더니 '해리성 정체감 장애'라고 딱 201호 총각과 같은 증상 있더라고요. 흔히 말하는 다중 인격 장애 말입니다. 한 사람 안에 여러 사람이 존재한다는 거, 서로 다른 이름과 경험, 정체성을 가지는데 이 인격들이 서로 지배권을 가지려고 한다는 거예요."
박영진의 이야기를 듣던 천문자는 이제야 모든 의심이 맞아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은 201호 총각, 그러니까 춘남 씨가 예전의 춘남 씨가 아니라 다른 인격이라는 이야기지요? 흠...."
경비실 안이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 찼다. 두 차례의 끔찍한 사건을 보면 당장이라도 경찰서로 달려가 신고하고 싶지만, 이 말을 경찰이 믿어줄까 생각하면 또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수룩하고 조용한 성격이지만 입주민들을 만나면 가볍게 인사를 하며 살짝 미소 짓는 길춘남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천문자는 길춘남이 성장하면서 겪었던 과거의 일들이 오늘날 이런 괴물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과거는 과거에서 끝나지 않는다. 어떤 형태로는 현재에 표현된다. 천문자는 길춘남이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죗값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201호 총각 개인만 생각하면 참 안타까운 부분이 많아요. 하지만 죄는 죄지요. 벌 받을 일이 있으면 받아야죠. 틈나는 대로 cctv 확인하고, 증거 될 만한 거 있으면 사진 찍어놔요. 그다음!"

정상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첩을 넘겼다.
"101호 선아 엄마가 집을 나가서 선아가 혼자 남겨졌지. 그 참~ 그렇게 잡았는데도 뿌리치고 가다니... 매정하게..."
그랬다. 정상태와 천문자가 몰래 짐가방을 싸서 도망가는 선아 엄마를 붙잡았었다. 달래도 보고 혼내도 보고 사건 현장의 사진을 보여주며 협박 아닌 협박도 해보았지만 선아 엄마는 말을 듣지 않았다. 떠나면서 했던 선아 엄마의 말이 천문자의 귓가에 아직도 맴돌고 있다.
"나는 지금껏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워진 옷을 입고 살았어요. 하지만 이젠 더 이상 이렇게 살진 않을 거예요. 첫 단추가 잘못되었으면 다른 옷을 입으면 돼요. 아니 단추가 없는 옷으로 입으면 돼요. 지금 만나는 사람과는 잘 살 자신 있어요. 저도 남은 인생은 남들처럼 보란 듯이 살고 싶어요."
천문자는 그 단추란 것이 대체 무엇이길래 자식까지 버리나 이해가 안 되었지만, 남은 인생이라도 잘 살고 싶다는 말에는 어쩌지 못했다. 매정한 년.. 인정 없는 년..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자기 발로 간다는 사람 데려와봐야 또다시 나갈 게 뻔한 이치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천문자에겐 남겨진 선아를 잘 돌보는 일이 더 중요했다. 상처받지 않아야 할 텐데... 버려졌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할 텐데...
"요즘 선아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가요? 한 번씩 들여다보긴 하는데 낮엔 가보질 못하니..."
천문자의 말을 듣던 정상태가 수첩을 접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책상 위에 있는 서류함에서 밀린 고지서를 꺼내 천문자에게 주었다.
"몇 달째 내지 않았더라고... 방학이라 학교는 안 가는 것 같아요. 가끔 유리랑 같이 지내기도 하는 것 같고..."
"이 여편네가 정말! 자식을 버리더라도 살게는 해줘야 할 것 아니야! 어휴~~ 고지서는 날 줘요. 내가 낼게요."
천문자가 고지서를 낚아채서 책상 위에 탁! 하고 내리쳤다. 또다시 무거운 침묵이 경비실에 내려앉았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박영진은 괜히 미안한 마음에 목덜미만 만지작거렸고, 정상태도 천장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어른이란 것이 미안했다. 어른이라는 이유로 잰 채는 다 하면서, 정작 아이들이 필요할 때는 그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한없이 미안했다.
"저... 그런데 202호 학생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 집도 문제가 한둘이 아니던데... 제가 봤다던 그 검은 양복 사람들이요. 또 올 것 같던데요. 그때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건 아니겠지요? 칼부림이라든지...."
"아이고, 이 사람이 정말 왜 이러나? 절대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되지. 일단 그 이후론 안 오긴 했네. 내가 경비실에서 계속 쳐다봤거든."
이번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천문자가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경비실에 오기 전 유리 학생에게 들려 자초지종을 듣고 받아 온 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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