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댄스

by Eun

"그런데 할머니, 처음에 말한 확신이라는 게 뭐예요? 그 마음의 확신이요..."

선아의 말이 끝나자 잠시 침묵하던 천문자가 등 뒤에 감춰두었던 서류 봉투를 선아와 유리 앞에 살며시 내려놓는다.

"얘들아, 여긴 이제 안전하지 않단다. 깡패 같은 놈들이 유리 집을 빼앗은 이유로 이 건물은 동네에서 멸시를 받고 있어. 그놈들이 들락거리면서 동네 사람들을 위협하고 시비를 건다고 하더라. 그뿐만 아니라 201호 총각도 조심해야 해. 언제 누구한테 해코지를 할지 몰라.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데 너희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 더구나 이젠 경비 할아버지도 떠나셨잖니..."

천문자는 '경비 할아버지'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정상태를 떠나보냈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먹먹해졌다. 짐을 챙기고 마지막 인사를 하는 날, 정상태는 자주 연락하자며 천문자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해하던 정상태의 얼굴 그리고 아버지를 챙겨주셔서 감사하다며 울던 딸의 얼굴을 보며 천문자는 누구보다 기쁘게 그들을 배웅했다. 그래, 이런 게 인연이지, 이런 게 사람 사는 정이지. 천문자는 둘을 태운 검정 벤츠가 골목을 빠져나가 멀어지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그동안 맘고생한 거 다 잊고 딸이랑 못다 한 정 나누면서 행복하게 사시구려.'

천문자는 불 꺼진 경비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늦게 퇴근하는 날에도 불 켜진 경비실에서 나와 '오늘은 퇴근이 늦으시네요. 무리하시면 탈 나요. 쉬엄쉬엄하세요'라고 말하던 모습이 잔상으로 남았다. 그래, 갈 사람은 가야지. 잘 됐어. 이제 미련 없이 떠나면 되겠구먼. 천문자는 이제 자신도 마지막을 준비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선아와 유리를 앉혀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할머니와 둘이 살았단다. 가진 것이 없다 보니 어릴 때부터 악착같이 살아야만 했어. 그래서 결혼도 일찍 했지. 원해서 한 결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삶이니까 최선을 다해 살려고 했어. 힘든 시집살이에 서러움도 많았지. 그래도 열심히만 살면 다 잘 될 줄 알았단다. 하지만 어찌 그리 인생이 호락호락하더냐. 안 되는 것을 기를 쓰며 억지로 살다 보니 결국엔 한계가 오더구나. 죽고 싶었지. 아니 죽이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마음보다 더 힘든 건 외로움이었어. 세상에 나 혼자 버려졌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단다. 지금도 종종 생각해. 그때 나를 돌봐주던 어른이라도 한 명 있었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나는 살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천문자는 회상에 젖은 촉촉한 눈망울로 유리와 선아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선한 눈을 보며 따스함을 느끼자 생각이 굳건해지고 용기가 났다. 천문자는 힘주어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너희들이 나처럼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너희들에겐 아직 많은 인생이 남아 있단다. 그리고 그 인생은 밝아야 해. 할머니에겐 나를 이끌어주는 어른이 없었지만, 너희들에겐 그런 어른이 필요해. 내가... 너희들만 원한다면 내가 그런 어른이 되어주고 싶단다. 그리고 너희들은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할 시우에게 나 같은 어른이 되어줘야 하고 말이지."

천문자는 엉덩이 밑에 깔고 있던 서류봉투를 꺼내 손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이 봉투 안에는 내가 우리 모두를 위해 마련한 집이 들어있어. 조만간 우린 여기로 이사하게 될 거다. 너희들을 버린 부모, 자식을 뼛속까지 등쳐먹는 부모에게서 떠나 자유롭게 사는 거야. 강요하는 건 아니야.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은 하늘이 맺어 준 것 아니냐. 많이 생각해 보고... 확신이 생기거든... 할머니한테 이야기해 주겠니?"

천문자의 눈이 촉촉해졌다. 갈망하는 마음이 천문자의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선아와 유리도 쉴 새 없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선아가 할머니의 손을 잡고 울먹이며 말했다.

"할머니... 저는 엄마가 없는 것보다 희망이가 없는 게 더 슬펐어요. 희망이가 그렇게 어이없게 죽고 나선 모든 게 싫었어요. 그런데 엄마는 그런 저에게 관심도 없는 것 같았어요. 일이 많아서 집에 며칠 못 들어온다는 문자를 보내고 어떤 남자랑 해외여행을 갔다 온 것을 알게 된 것이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어느 날, 그 남자랑 통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어요. 재혼을 하고 싶어 하는 엄마는 상대방이 저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자, 저를 포기하겠다고 말하더라고요. 저는 화가 나서 엄마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따졌었어요. 그런데 엄마가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나만 보면 죽은 아빠 생각이 나서 소름이 끼친데요. 재혼을 안 하더라도 더 이상은 나랑 못 살 것 같다고. 서로 제 갈 길 가자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엄마는 집을 나갔죠..."

선아는 감정이 북받치는지 큰 숨을 쉬며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잠시 후, 잠깐 침묵하던 선아가 결심을 한 듯 핸드폰을 꺼내 천문자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할머니, 얼마 전 엄마한테서 문자가 왔어요. 집을 내놨다고 그전까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지 생각하래요. 엄마는 돌아갈 생각이 없으니 집 팔리면 연락도 하지 말래요. 우리 인연은 끝이라고 했어요. 할머니, 저에게 부모의 인연은 이제 없어요. 끊어야 할 악연만 있을 뿐이에요. 할머니, 저는 어제까진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할머니 말을 듣고 나도 무엇인가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작은 희망이 생겼어요. 할머니, 제가 다시 꿈꿀 수 있다면 희망이처럼 주인 없는 강아지를 돌봐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요."

천문자는 선아를 안으며 들썩거리는 작은 어깨가 잠잠해질 때까지 등을 쓸어내려주었다.

"그래그래~~ 뭐든지 꿈꿀 수 있지. 우리 작은 희망을 가지고 천천히 시작해 보자꾸나."

그 모습을 보던 유리가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할머니, 전 할 수 있다면 다시 공부하고 싶어요. 부모님은 공부는 필요 없다, 돈이나 벌어오라며 어릴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켰어요. 시험을 백 점을 맞아와도 찢어버리셨어요.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일찍부터 돈 버는 게 부모 도와주는 거라면서요. 거짓말 시키고, 사기 치는데 이용당했어요. 그러면서도 우린 가족이고 너는 부모를 위해 뭐든지 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부모라는 단어만 아니었다면 진작 도망쳤을 거예요. 아니면 죽었거나요... 할머니, 저희를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할머니는 제 생명의 은인이에요. 아니, 우리 둘의 생명의 은인이에요."

"유리야, 선아야, 우리는 서로에게 은인이야. 나도 고맙다. 우리 서로 행복하게 잘 살아보자꾸나~~~"

서로 얼싸안고 울고 있는 거실로 달빛이 밀려들었다. 달빛은 하나의 큰 그림자를 이리저리 비춰보다 따뜻한 기운 하나를 살포시 내려놓았다. 만물의 온기가 거실 가득 펴지자 불안했던 마음과 걱정들이 힘없이 사라졌다. 세 사람의 표정에서 평온하고 밝은 기운이 맴돌았고, 조용한 웃음이 펴져 달까지 닿았다.


불꽃이 일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었다. 낡은 전기장판에서 시작된 불꽃은 아직 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울세라 조용히 천천히 일어나고 있었다. 시우는 매캐한 냄새 때문에 잠에서 깼다. 찬바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꼭꼭 닫아 둔 창문들 때문에 연기는 빠져나가지 못하고 집안을 계속 맴돌고 있었다.

"아빠? ... 콜록, 콜록... 아빠~~"

눈이 매어왔다. 코가 매웠다. 눈물과 콧물이 흘렀다. 애타게 아빠를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시우는 안고 자는 강아지 인형을 얼굴에 대고, 아빠가 자고 있는 큰 방으로 가보았다. 그때였다. 큰 방에서 찌지 직~하는 소리와 함께 조금 전보다 더 큰 불꽃이 솟아올랐다. 시우는 놀라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찌었다.

"아빠! 아빠!"

자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런데 꼼짝을 하지 않는다. 전날에 마셨던 소주 병들이 안방에 뒹굴고 있었다. 그랬다. 시우 아빠는 무국적자로 신고되어 직장을 잃었다. 회사 측에선 모르쇠로 일관하며 밀린 임금도 주지 않고 쫓아냈다.

"시우야~~ 우리 착한 시우~~ 아빠가 미아내... 아빠가 미아내.."

울다가 웃던 아빠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술을 얼마나 마신 건지 전기장판 모서리가 타들어가고 있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시우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숨이 헐떡거려졌지만 정신을 차리고, 얼른 복도로 나가 앞집 문을 두드렸다.

"아저씨! 아저씨! 살려주세요. 불이 났어요. 아저씨!"


박영진은 곤한 잠에 빠져있었다. 얼굴엔 마스크팩을 붙이고 노란색 병아리가 그려진 잠옷을 입고 있었다.

'내가 잘못했네. 용서하게. 자네는 우리 회사 최고의 사원이네. 제발 우리 회사에 머물러주게나. 그렇게만 해준다면 대리, 아니지 과장으로 승진시켜 주겠네.. 네.. 네..'

박영진은 단잠에 빠져 흐르는 미소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쾅! 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자신을 애타게 부르던 사장의 모습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박영진은 마스크팩을 집어던지며

"에잇! 누가 새벽에 이렇게 난리를 치는 거야!"

라고 말하고, 현관문을 획 열어젖혔다. 그리고 순간 집 안으로 들어오는 매캐한 냄새를 맡았다.

"윽~ 이게 무슨 냄새야. 너 앞집 꼬맹이 아니야? 무슨 일이야? 왜 울어?"

"아저씨, 우리 아빠 좀 살려주세요. 집 안에 있어요. 집에 불이 났어요. 아저씨~"

"뭐라고? 불이라고? 불이야! 불이다! 불이 났다!"


박영진은 로얄골드맨션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찢어질 듯한 박영진의 목소리에 하나 둘 잠에서 깨어 문을 열기 시작했다. 밤 귀가 밝은 천문자가 제일 먼저 나왔다. 연기는 3층 시우네에서 번지고 있었다.

"할머니, 아빠! 우리 아빠 좀 살려주세요. 아빠가 안 일어나요. 엉엉~"

천문자는 툭 튀어나온 두 눈을 굴리며 빠르게 사태를 파악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문자는 멀뚱멀뚱하니 발만 구르고 있는 박영진의 멱살을 냅다 잡고는 시우네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했다.

"아~아~ 이게 뭐 하는 거예요? 저기 들어가자고요? 들어갔다가 나까지 죽으면 어쩌라고요. 난 못 가요. 못 가! 안 가!"

철썩! 철썩!

"아이코~~ 왜 이래요? 왜 때려요?"

"영진 씨, 정신 차려! 아직 죽을 정도는 아니야. 눈 크게 뜨고 똑바로 봐. 아직 안방에만 불이 붙어있잖아. 얼른 가서 시우 아빠 업고 나오자고."

그리고 뒤늦게 나온 이유리에게 고함을 쳤다.

"유리야, 119에 신고해! 얼른!"

"아~ 네! 119! 알겠어요."

"다들 빨리 대피시켜. 귀중품만 챙기고 얼른 건물에서 나가라고 해! 빨리!"

문을 두드리는 소리, 사람들의 발소리, 고함소리가 삽시간에 건물을 가득 매웠다.

시우 아빠는 몽롱한 눈이지만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었다. 뜨거운 열기와 매캐한 연기 때문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어제 술을 너무 마신 탓에 몸은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자빠졌다. 그때 양쪽 옆구리에 손이 들어왔다. 천문자와 박영진이었다.

"시우 아빠, 정신 차려! 어서 여기서 나가야 해! 안 그러면 죽어!"

"콜록~콜록, 이게 무슨 일이에요? 우리 집 왜 이래?"

"아이고, 한가한 소리 하네. 빨리 일어나 봐요, 이러다나 나 죽겠네. 으익~ 무거워"

시우 아빠를 부축하고 집을 나서자마자 불꽃은 이제 시작해 볼까라고 마음먹었는지 갑자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안방을 삼키고 천장을 타고 거실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시우 아빠를 데리고 건물 밖으로 나온 천문자가 유리를 불렀다.

"유리야, 119에 신고했냐?"

"네, 할머니! 신고했어요."

"선아는? 선아는 어디 있냐?"

"할머니, 저 여기 있어요. 우리 집 어떡해요. 엉엉~~"

천문자는 울고 있는 선아와 유리를 두 팔로 꽉 안았다. 그리고 거친 숨을 쉬며 건물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시우는 바닥에 퍼져 앉아있는 아빠에게 안겨있었고, 박영진은 턱도 어깨도 축 처진 채 망연자실한 눈으로 건물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누가 빠진 거지?

"그런데 할머니, 201호 아저씨가 안 보여요...."

선아가 당황해하며 말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서로 눈빛이 오갔다.

"제가 문을 두드리고 불이 났다고 빨리 나오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아무 소리도 안 들리더라고요, 그래서 집에 없나 싶어서.. 저도 경황이 없어서 끝까지 챙기지 못했는데.. 201호 아저씨가 집에 있는 거면 어떡해요?"

이때까지의 길춘남이 한 짓을 생각하면 목숨을 구해주고 싶지도 않다. 살인자 새끼 구해서 뭐해. 자업자득이지. 천문자는 시우네집을 삼키고 몸집을 부풀리고 있는 불기둥을 보았다. 거친 숨이 조금 가라앉자 이때까지 살아온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지금껏 악착같이 살아온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집인데, 벗어나려고 해도 안 되더니 이렇게도 벗어나지는구나. 천문자는 어려운 고비를 만날 때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호흡을 하고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할까 생각했다. 정신을 차리자, 생각을 해 문자야, 생각을... 아 참! 순간 문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천문자가 갑자기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순식간의 일이라 말릴 틈도 없었다. 다들 자신의 집을 보며 오만가지 생각으로 혼란했다. 천문자가 건물 안으로 뛰어가는 것도 시우가 '할머니, 가면 안 돼요. 돌아와요"라고 해서 알게 되었다.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는 천문자를 보며 다들 입을 막고 헉! 하는 숨소리만 낼 뿐이었다. 그리고 몇 초 뒤, 애타는 소리들을 질렀다. 아직 불길이 내려오지 않았지만 건물 주위로 나무들이 타들어가며 아래층에도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애타는 마음과 별개로 천문자는 얼른 집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거실로 들어선 순간, 안 방에서 자신의 전기장판을 뒤집고 그곳에 모아 둔 돈을 쓸어 담는 길춘남을 발견했다.

"키키키키~ 정신없는 할망구, 내가 모를 줄 알고. 언제 기회를 봐서 다 털어가야지 생각했는데 이게 웬 재수야? 가져가라고 문까지 열어주는데 어떻게 그냥 가겠어. 안 그래? 키키키키"

"맞아 덕재야, 넌 여전히 똑똑해. 그래도 할머니 운은 좋네. 죽이진 않아도 되잖아. 키키키"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괴이한 목소리를 내는 길춘남은 뒤에 천문자가 온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돈을 가방에 넣고 있었다. 길춘남의 말을 들은 천문자는 공포를 느끼며 새어 나오는 말을 삼키기 위해 숨을 참아야 했다. 식은땀이 흘렀다. 발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소리를 낸다면 길춘남에게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문자는 길춘남이 돈을 가져가도록 가만히 놔두었다. 그리고 뒷걸음질 치며 소파에 놔두었던 서류봉투가 든 가방을 조용히 챙겨들고 집을 나왔다.

소방차가 왔다. 경찰차가 도착했다. 로얄골드맨션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여기 상황을 말해 줄 사람이 있습니까? 안에 남은 사람은 없습니까?"

경찰이 확성기를 들고 소리 질렀다. 사람들도 저마다 소리를 질렀다. 다들 서로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때였다.

"도망간다. 잡아라!"

"부르릉~~"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길춘남이 가방을 어깨에 메고 오토바이에 올라타고 있었다. 누군가가 '방화범이다'라고 외쳤다. 경찰들이 길춘남을 잡으려고 몰려들었다. 길춘남은 오토바이 속력을 높였다. 사람을 치더라도 도망가겠다고 마음먹은 것 같았다. 어깨에 둘러맨 가방을 한 번 더 곧추 올리고, 속도를 내 달리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와 라이트 빛에 경찰들도 주춤하며 옆으로 빠지고 있었다. 그때,

"퍽!"

오토바이가 옆으로 넘어지면서 길춘남이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그가 매고 있던 돈 가방에서 돈이 쏟아져 나왔다. 오토바이 앞에는 시우 아빠가 어깨를 감싸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경찰이 몰려들어 길춘남을 잡았다.

"방화범인가 봐"

"세상에~ 돈을 훔쳤나 봐"

"어머나 뭐야? 돈을 훔치려고 방화를 저지른 거 아니야? 무서운 세상이네. 말세야, 말세!"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입 밖으로 소문들이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고 있었다. 로얄골드맨션 입주민 아무도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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