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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파리 Sep 06. 2024

향수병이 아니었다.

나의 꾸밈없는 유학 이야기

타지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향수병은 갑자기 훅 하고 심장을 꽂는다.


어른이 되자마자 혼자 살았기 때문일까, 그곳이 국내이든 타국이든

사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일단은 친오빠와 함께 살기 위해 집을 구했었다.


무심코 처음 살던 동네를 상상하다 보니 

말 그대로 일본스러운 동네였구나 생각이 든다.

큰 독립주택들 

우리나라의 대형마트 같은 큰 슈퍼마켓들

일본이라면 어디든 있는 백화점 연계 건물들

그 골목 안에 우리 집이 있었다.

적은 예산으로 둘이서 살 집을 구해야 했던 터라

살게 된 집은 거실이 없었고, 주방이 매우 협소했다.

각자 방은 따로 있었지만, 

나의 초등학교 시절 교실문 정도의 창문만이 바람과 추위를 막아줄 뿐이었다.


자취를 시작하면서 마땅히 집안에 ‘앉아있을 곳’의 바운더리가 사라졌다.

거실에 소파가 있는 것도 아니며 식탁이 넓어 하루종일 앉아서 쉴 수도 없었다.

작은 자취의 소망 아닌 소망은 소파를 넣을 수 있는 집에서 혼자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에서 그런 집을 겨우 학생주제에 탐하기엔 

형편도, 집을 더 둘러볼 시간조차 없었다.

결국 내 방은 지붕이 약간 내려온 다락방 같은 느낌이 나는 모습이었다.

자연스레 집에서 나의 반경은 내방이 되었고, 

차디찬 바닥보다는 침대 위에 앉고, 눕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7년 전의 나를 생각하면 20대 초반에 4개월 만에 일본으로 넘어가

갑자기 해외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에 책임감과 늦은 나이에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받는 것에 부채의식이 쌓여나갔다.


그러나 쌓이고 있는 곳은 나의 무의식 속이었다.

남들 앞에서는 오자마자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일본어도 사니까 저만큼 빨리 느는구나

이와 같은 생각을 나도 하고 남들도 했다.


하지만 18년 11월 나는 알 수 없는 고통을 호소하며 아침에 모든 걸 토해냈다.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면 토를 했고 물조차 마시기 쉽지 않았다.

병원에서 정밀검진을 진행했으나, 스트레스 지수가 높다는 말만 돌아올 뿐, 

한국에 돌아가면 금방 나을 거예요 하고 농담처럼 던지던 의사 선생님의 말에

기운이 더 빠졌다.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남들보다 늦고 국적도 다르기 때문에

레포트를 쓸 때도, 발표, 수업 중에 이해하기 위해

매일 같이 수업을 녹음하고 도서관과 집에서 복습한 결과, 1년 후 겨우 수업을 편하게 들을 수 있게 되었다.

1년여간을 이렇게 살아가며 취업을 위해 선배들이 다니는 기업 설명회에 혼자 가서 일본 취업문화를 익히고

학교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가장 큰 이유는 여기서는 실패하고 싶지 않아.

단 한 가지 생각이었다.


더 이상의 실패가 두려웠다. 

어른들의 말을 듣고 공부만 열심히 했다. 그렇게 쌓인 내 마음의 독은

결국 나를 쓰러트렸다. 이때 치료를 시작했어야 됐다.


내가 치료를 시작한 건 3년 뒤였다.


모든 기대에 미치지 못한 채 졸업식은 다가왔고 

나의 4년은 물거품이 되었다.

채용에 긍정적이던 기업들도 모두 역병으로 취소를 하고 당시 외국인이던 나는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좁고 철도만 보이는 나의 2층 방에서 커튼을 치고 현실을 며칠만 외면해보려 했다.

성인이 되고도 사람이기에 가끔씩 우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엉엉 우는 일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 시간 전이었다.


21년 3월 한 달을 매일같이 비슷한 시간 밤에 울었다.

벽간 소음이 심한 일본집에서 민폐가 될까 

발코니에 작은 의자를 두고, 엉엉 울었다.


태풍과 지진으로 겁먹었을 때는 이불 속에 들어가서

한쪽 귀 속이 눈물로 가득 차서 눈이 아닌

귓속의 눈물을 닦아내야 했다.


엉엉 울면, 원 없이 울면 서러움이 조금은 사라진다고 들었는데.

이미 마음과 몸이 여러 갈래로 찢겨있던 나였기 때문일까, 눈물은 눈물을 불러왔고 새벽 해가 뜨기까지 울었다.


울다 잠에 들지 못한 것이 분해 

코로나 시기에 아침 7시에 집을 나서 

10시 반에 마스크 7개를 구매하고 돌아왔다.

눈이 왔다. 삼월말이었는데 말이다.


눈이 벚꽃보다 늦게 오다니, 그 시간들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 꼬여있는 시간들이다.


재난 영화 속 인물이 된 기분이었다. 

혼자서 갇혀서 이대로 스크린 밖으로 사라지는 단역 정도였겠지만


그 재난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루에 한 번이라도 나오기, 

되도록 해가 떠있을 때 나오기.

그리고 조금이라도 걷기.


그때부터 더 신을 원망했었을까, 정신이 있는 시간에는 모두 울기만 했다.

이유는 지금도 모르겠다. 억울했다.

내 노력은 왜 항상 물거품이 되는 걸까. 


여기도 나와 맞지 않는 것일까 

온갖 부정적인 단어들의 친구의 사돈의 팔촌까지 내 이불속에 모여

매일 밤 나를 울렸다. 

결국 처음으로 우울증에 대해 진단을 받기로 결정했다.

나의 첫 진단은 일본이었다.


한국에 우울증 환자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금의환향은 아니더라도 똑바로 돌아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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