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리는 내게 맞는 인생인가.
9월 15일 일요일 생각의 구조 속에서
과거의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써 내려가다
더 이상 과거가 아닌, 지금의 내가 살아가기 위해 버둥거리는
이 한 번의 몸짓을 중간중간 기록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결단을 내렸다.
올해 들어 듣기 싫어지고 트라우마가 된 말이 하나 있다.
‘멋지다, 해파리님 너무 멋있다’ 하고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에게
이 말을 듣는 게 굉장히 숨 막혔다.
몇 안 되는 친구들에게만 내 바닥의 모습을 가끔 드러낸다.
슬프거나 분한 감정 부러운 마음 가끔은 사라지고 싶은 그 감정 또한
내 감정은 독하디 독한 해파리 촉수의 독 같아서
가볍게 어디에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나의 독으로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일들로도 살아가기 힘든, 숨조차 자유롭게 쉴 수 없는 인생에서
짐이 되고 싶진 않다.
된다면 , 가능하다면, 언제나 행복과 즐거움 그리고 사랑을 나눠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모든 것을 위한 내 첫 옹알이는 노래였을 것이다.
유일하게 나를 다르게 봐주는 사람의 시선을 느낄 수 있던 매개체.
나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꿈과 미래는 사랑하는 음악을 인생에서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곱게 접어 서랍 안에 보관하다가 잘게 찢어 아주 하찮은 담뱃불에 태워 자취를 없앴다.
욕심을 내고 싶지 않다.
발제를 준비하던 중, 한 문장 때문에 과제에서 벗어나
글 하나를 더 쓰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중 일부를 발췌하여 발표하는 것이기에
5시간을 읽고 또 읽어도 하나하나 그가 말했던 문장에 답하는 것뿐이었다.
‘시학’의 9장에서는 개연성과 필연성에 대해 논한다.
3번째 페이지 정도의 11번 각주의 설명의 이 문장이 눈물을 조금 머금게 했다.
“ 인생의 모든 사건이 완전히 예측할 수 있는, 다시 말하면 미리 기대할 수 있는 인과율의 법칙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미래에 대한 예측은 아무리 조심스러워도 대체로 빗나가기 마련이다.”
‘멋지다’에 트라우마가 생긴 것은 나의 바닥을 들키면 안 되니까.
더 이상 내게 멋지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나는 저 사람들을 실망시키면 안 되는데.
내게 주어진 ‘멋지다’라는 사명감을 그리고 사람들이 가진 기대감을 꺼트리는 것에
굉장한 두려움을 느꼈다.
실제로 그런 나를 보고 떠난 사람도 수 없이 많았으니
겁이 나는 게 당연하지는 않을까.
저 문장에서 나를 찌른 건 ‘모든 사건이 완전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며 미래에 대한 예측은 아무리 조심스러워도 대체로 빗나간다’의 내용이었다.
끊임없이 앞만 보며 살아왔다.
남을 생각할 시간도 없이 사랑까지는 내 능력으로 할 수 없기에 계속해서 포기했고
멋모르게 시작하게 된 사랑의 첫 시작들은 ‘멋지다, 되게 멋진 분이네요’가 시작이었다.
처음 사랑을 시작할 때는 그 말은 나의 무기였다.
남들과 다른 다양한 인생을 살아온 나의 모습, 강하게 나를 봐주는 사람들
내가 나누어줄 수 있는 따듯한 사랑, 그것이 나의 사랑의 무기였다.
허나 지금의 나는 나눌사랑이 많지가 않다.
내게 멋짐은 더 이상 기쁘지가 않다. 그저 두렵다.
최근의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멋짐’은 나를 그 벽에 가둔다.
그런 멋짐은 더 이상 가지고 싶지 않다.
내 굴곡진 삶을 누군가는 시시하다고 생각할 것이고 어떤 이는 슬프게 볼 것이다.
확실한 것 하나는 내 인생을 그대로 던져주고 조금이라도 살아봐라, 하고 주면
견딜이는 얼마나 있을 것인가 라는것.
단순히 가볍게 ‘멋짐’으로 다가와 가볍게 ‘실망’을 가지고 돌아가는 사람들에
상처가 아닌 멍이 든다. 상처는 바로 발견되지만,
멍은 여기에 언제 들었는지 조차 모르는 채로 남이 먼저 발견한다.
지금 내 마음은 멍투성이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