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헌 Jan 20. 2022

땅에 깊게 파묻은 마음도 썩어 사라질 시간이 필요하다

2020년 12월 16일

#1

어떤 겨울의 나,

정신력이 수치화되어서 나타난다면 아마 그 곳간은 텅텅 비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방 정리를 안 해. 지금 내 방 안이 어떤 모습일 것 같아? 나도 상상이 안 되는 걸 알리가 없지.

오늘  일의 목록을 적었다. 하루 종일 리스트 중 단 하나도 하지 않고 오늘이 지나가기 직전까지 미뤘다. 많은 밀린 일이 있었다. 떠밀려서 만든 포트폴리오의 제본은 정말 하기 싫어하지 않았다.

봉사활동 서류 보내기,  맥에 한컴오피스가 없어서 웹으로 해야 하는데 기능이 나사 빠졌다. 이미 오래전에 내가 프로그램을  못 다뤄서 불편한 것이겠지 하며 마음속에서 정리했지만 쉽사리 손이 가지 않는 툴인 것은 사실이다. 파트 강사로 일하던 고등학교 보내 직접 직인이 찍힌 서류를 받아와야 하는 것이 내일인데, 이따위로 일을 처리하면 담당자가 어떻게 느낄지 분명히 알지만 질질질,

이번  카드 선결제 하기, 우습고 무섭게도 나를 떨게 하는 . 나의 사랑을 아주 잘게 쪼개서 가루 직전까지 만들어 흩어버렸다. 가끔은 별무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낮에 보면  볼품없는 꼴이다. 해주고 싶은 것이 많았다. 나에게도 너에게도 누구에게도. 제동장치는 아주 좁은  남기고 멈출  있게 해 주었고 나의 삶은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곤 한다. 은행 어플도  오피스랑 똑같다. ㄱ에서 , A 에서 Z처럼 일말의 친절함도 없는 역한 나열로 반기기에 싫다. 9 3. 선결제는 9시까지였다. 어쩔  없이 너는 내일에서 기다려야겠다.

저 옷을 벗기면 뭐가 있을 것 같아? 모두들 맨 살이 드러나고 민망해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니? 만약 아무것도 없다면 어떨 것 같아?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껴입은 옷들의 주머니 어딘가에는 구겨 넣어 두었던 돈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고. 흰 티셔츠를 물들인 붉은 자국이 와인이 아닌 피였으면 하는 마음으로.

내가 무인도에서 마개를 꾹 닫아 띄운 유리병도 때가 되면 거두어진다는 믿음이 있다. 인식의 수준에서의 영원함은 소멸 이전까지는 매개를 잃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인지하고 있는 영원에 가까운 지속 가능한 일들은 어떻게 그 자리를 선점할 수 있었을까?

누군가들이 연달아 내가 관계성에 대해 고민한다고 했다. 바다를 처음 본 아이처럼 반응은 한결같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높은 관심도의 이유를 물었다. 나는 언제나 비슷한 대답을 했던 것 같다. 거울로 삼는 것이라고. 지표로 삼지는 않겠지만 방향성을 정할 때 일부 반영을 하겠노라고.

그래서 내가 반영했던 것들. 2월의 네가 메모장에 그려줬던  얼굴, 그리고  뭐더라. 작년 여름에 마셨던 카프리? 아니다 힘들게 뒤적거려 꺼냈는데  니었다.

불수의근의 일부일 것이다. 직접 제어가 불가능하니까. 아니면 날씨라고 불러도 걔는 좋아할 거야. 컵에 나를 담가 두고 티스푼으로 휘휘 저어서 빙글빙글, 결국에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이는 누구.

바보 같다고 생각하는 일도 열심히 하는 것을 보면 괜스레 기특해진다. 너는 끝내 이렇게 될 거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지? 그러니 즐기는 것이 옳다.

취지가 그렇다. 취지는 그렇다! 퇴색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개인, 집단 그리고 전체. 사실은 누구나 형연할 수 없는 수준의 미를 원하지 않았나. 탐미. 아름답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다. 누구에게나 허락된 숨을 쉬는 일. 거리조차 아무나 걸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죽고 싶게 만드는 이는 도무지 찾아봐도 없으니까. 하지만,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이때 나는 퍽 즐거웠던 모양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