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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Jan 23. 2022

대충 찾아도 행복이 있던 때

2020년의 크리스마스

스물다섯, 예쁜 나이라더라. 과정은 추하고 극성맞았지만 아름다운 부분을 찾으라면 못 찾을 것도 없지.

메리 크리스마스, 성경의 그에게 쏟는 믿음과는 별개로.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버텨낸 시간이 의미를 내포한 말을 뱉게 만들었다. 의뭉스러운 선물이 불러온 행복이었지만 안경점에서 도수를 맞출 때 쓰는 바보 안경처럼 또렷했다.

잔향이 되기 전에 미리 감상을 수놓으려 몇 자 끄적대는 지금 옆에 누운 너처럼. 필요하다면 밖에서 차가워진 손을 녹여도 좋아. 꽃을 피우는 절기에 꽁꽁 얼었던 나. 이제는 온기를 전할 수 있게 되었나? 사계절을 또 아이러니함으로 살았다. 의뭉이 온기가 되다니.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에 장을 본 후 집에 돌아와 후다닥 해먹은 식사처럼. 정신을 쏙 빼놓고 돌파한 1년. 떠올려보면 작년 크리스마스, 그때 난 얼어붙기 시작했다. 딸기 타르트에 꽂은 초를 불며 무언가를 약속했더랬지. 쥐었던 손에 부패의 흔적이 묻었다.

올해도 딸기를 얹은 디저트가 함께한 성탄 절기의 밤. 후회가 역한 작년과는 달리 적당히 달콤하고 적당히 부드럽게 응원한다. 시럽 발린 딸기는 말해주었다. 하지만 너는 일 년 사이 꽤 도약했다는 것 잊지 마! 빨강과 초록, 크리스마스의 색을 간직한 딸기에게 받는 위로가 썩 나쁘지 않다. 부쩍 겨울의 과일을 사랑하게 된 이번 11,12월.

365개의 하루. 가장 버텨내기 힘들었던 정오 이후의 시간들. 잿더미를 갈무리해보려 해. 툭툭 걸리는 일이, 눈에 밟히고 손에 든 갈퀴에 걸려든다. 해결되었는지 모르는 일이다. 이미 내가 떠난 자리에서 누가 죽던 말던. 생각해봐야 정신만 아득 해질 뿐이다. 돌아오는 길에 얼핏 스친 돌무덤 위 나무로 엮은 십자가.

자기 복제는 표출하는 모든 곳에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 뚫어야지. 깨고 나가야지. 언제까지고 양수 속에 몸을 담그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내 코로, 내 입으로 폐에 찬 공기를 담아야지. 세상에서의 첫 호흡으로 인한 충격, 직립과 보행을 위해 꿇은 무릎은 잊힌다. 상흔도 없이.

언젠간, 당장 내일이라도. 어차피 볼 것이고 어차피 들을 것이다. 어차피 보일 것이고 어차피 들릴 것이다. 나에게 영속성이란 그런 것이니까. 영원한 사이클. 돌고 도는 모습만 보고 소모적이라 할까 봐 염려스럽고 싫어서 꼭 새끼손가락을 건다. 약속은 지키라고 하는 것이니까, 아닌가? 요새 농담 삼아 말하는 양자의 세계에서는 깨라고 있는 걸 수도 있으니까. 약속은 지켜질 것이고 행위 전체를 고집이나 아집이라고 치환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너의 모든 행복이 충족된 날, 예상했던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 앉아 얌전히 악기를 들어 올린 날. 나는 가운데 서서 나의 머릿속에 비가시적 영속의 이미지를 허공에 그리면 되었을 뿐.

마지막 손짓을 끝으로 가시적으로 변한 영속과 관계가 있는 이들만 불러 모아 평의회를 가졌다. 합치된 의견. 행복이다. 마치 지류에 출력된 모든 색이 내가 모니터로 본 것과 같았다. 알지 않나, 정확한 실현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최근 본 흥미로운 글. 해외 출장이 잦은 레이서들이 고안한 시차를 극복하는 법. 굶는 것이다. 가야 하는 나라와 장소에서의 아침식사 전까지. 그렇게 지쳐 곯아떨어진 후 그곳의 아침을 먹고 나면 신기하게 적응되는 시차. 채우려면 비우고 얻으려면 버려야지. 만조를 끝내고 결국 공백. 가득함의 가능성을 얻다.

그나저나 배스킨라빈스 알바생이 아이스크림을 정말  담더라.  가지  파인트를 벤츠 삼각별 모양으로 꽉꽉 채워서. 예쁘게  눌러 담아주니 뭔가 내가  아이스크림 컵이 되고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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