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헌 Jan 26. 2022

어릴 적에도 깨달음은 곳곳에서 나를 기다렸다

2021년 2월 13일

2006, 알람도 없었는데 부스스 일어나 학교  준비를 했다. 당시 집의 벽에 걸렸던 부엉이 시계는 어머니의 지혜로 10 일찍 맞추어져 있었다. 지각할까 놀란 것도 잠시, 늦은 시간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이미 출근하시고 동생도 유치원을  모양이었다. 후드티를 입고 사락거리는 바지를 입었다. 머리가 너무 뻗쳐서 급하게 머리를 감으려다 넘겨두었던 후드가 흘러내려  젖어버렸다. 옷을 말릴 시간까지는 없어 그냥 학교로 출발했다. 윗도리 뒤편이  젖은  걸어가는 10살짜리 아이가  귀여워 보였을지도, 혹은 안쓰러운 마음이 함께.


2008,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버스가 분원에 학생들을 내려준 후에 돌아 구의역 맥도널드 앞에 멈춰 선다. 오늘도 학원에 왔구나. 한숨을 쉬며 층계를 오르던 내가 있다. 서울이라는 동네의 학구열을 연료 삼아 돈을 쓸어 모으던  학원이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나는  10시에 학원이 끝나면 1 맥도널드에서 먹는 감자튀김이나 학원 바로  작은 트럭에서 파는 꼬치어묵에  관심이 있었던  같다. 하루는 새로  컨버스에 친구가 떡볶이를 엎었다. 집에 와서 신발을 닦는데  속상했다.


2013, 10대의 끝자락에 자전거를 가질  있었다. 당시에 유행하던 고정 기어 방식의 자전거를 타고 친구들과 뚝섬유원지를 지나, 성수를 지나. 반포와 마포까지 가곤 했다. 주로 밤이나 새벽에 자전거를 탔었기에 길가에 도로를 구분하려는 연석이나 솟은 잔디를  보고 엎어진 적이 자주 있다.  번은 넘어지고 일어나 보니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전화기 액정이  깨져 있었고 언제는 전화기가 아닌  무릎이 박살 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따릉이나 공유 킥보드가 없었고 나의 자전거는 나를 어디로든 데려다줄 것만 같은 바퀴 달린 수단이었다. 18살의 내가   있는 최고 속력은 자전거로   있는 최속인 시속 30km 안팎이었던 것이다.


2014, 9 모의고사 성적이 만족스러웠다.  앞의 학교를 향해서 페달을 밟을  있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들떴다. 때마침 있던 실기시험들의 좋은 성적은 마음을  부풀렸다. 수능 날이 되었고 어머니가 정성스레 싸주신 닭죽은 여전히 맛있었다. 데리러 오신 아버지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창문을 열고 울었다. 그날은 유난히 차가 막혔다. 도로 위에서 빌빌대며 기어가는  안에서 선명히 기억나는 눈물 고인 눈에 비친 자동차 브레이크 등의 붉은빛들. 위기였다. 19살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2018, 눈을 떠보니 복귀날이었다. 마지막 휴가 복귀라서 생활관 동기들과  열차에 같이 타고 같이 식사 후에 복귀하기로 했었다. 이사를 했고 시계도 바뀌었으나 시간은 여전히 10 일찍 맞추어져 있었다. 이른 시계랑은 관계없이 나는 명백히 늦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전거는 입대 전에 팔아버렸다. 나는 집에서 서울역까지 택시를  수밖에 없었다. 남산타워가 보이는 대로를 지나 서울역의 풍경이 보였다. 닫히려는 열차 문을 가까스로 잡아   비로소 나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전날이라서 그런지 보따리를  아름 붙들고  어르신이 많았다. 다음 , 기른 머리를 나무라는 행정보급관의 말을 뒤로하며 충북 영동은 다시는 가지 않을 도시가 되었다. 일부러 대전에서 KTX 갈아탔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억지로  의무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서울까지 시속 300km. 문득 아는 풍경이 나올 때쯤 기차 정도의 속도로 달릴  있는 차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남의 죽음을 먹고사는 존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