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헌 Mar 16. 2022

역병은 봄이라고 해서 기분을 맞춰주지 않는다

2021년 9월 15일과 10월 21일, 2022년 3월 16일

게을러서 짜집기 한 글, 여러분은 나처럼 살지 마시오


2021년 9월 15일


누구라고 앞다투어 말할 것도 없이 도착한 곳은 겨울 바다였다. 곤혹스러운 일들을 연달아 겪은 꿈은 결코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하지 않았다.

겨울의 눈 쌓인 해변의 모래는 차갑고 축축하고 푸석했다. 어떠한 부탁으로 나는 그곳에 도달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도달한 그곳에 지령이 기다리고 있던 것인지 알 턱이 없다.


기억도 안나는 영화들의 내용. 대충 슬픈 이야기인가 보다. 쟤네는 서로 못 잊어서 안달인가 보다. 매정하게 살아야지 저렇게 연연하면 항상 슬퍼.라고 허세를 부려보다 쇄신해보면 그건 다 내 이야기가 아닌가. 원래 사람은 자기랑 비슷한 걸 좋아하긴 하는데 너무 똑같은걸 찾으면 싫어하기 마련 아닌가.


몬톡, 제주도라고 여겼던 그곳은 아마도 한 겨울의 몬톡.


-


2021년 10월 21일


감정이 풍부한 것은 축복인지 저주인지 나는 도통 알 수가 없다.


격하고 유동적인 감정의 흐름은 나를 피로하게 하고 제대로 된 능력을 발휘하기 어렵게 한다. 쉽게 녹고 어는 이 감정의 호수를 나는 바다로 향하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하였거늘, 자연적인 침식으로 바다에 닿기에는 그저 멀리 바람에 타고 온 소금기를 느끼려고 애쓰는 모습만 보여 안쓰럽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버리고 욕보였나. 포기할 수 없다. 죽는 한이 있어도 이루리라. 절대 하기 전엔 발을 뒤로 떼지는 않겠다.


소리 지르고 길길이 날뛰고 싶은 감정을 억누른 게 최근에 한두 번이 아니다. 다 때려 부수고 싶은 충동이 든다. 그만큼 스트레스가 과적되었다는 말로 알아듣겠다. 이 분노는 또 나의 삶의 연료로 사용될 것이다. 검은 연기가 풀풀 피어오르고 재채기를 연신 해댔지만 이것은 내가 직접 만들고 직접 채취한 소중한 나의 감정. 싫어도 얻고 나면 연료통에 들이부었다. 즉시 그랬을 때도 있었지만 메말라 눌어붙기 전에는 꼭 쓰려했다. 뜨겁게 달군 상태에서조차 닦아내기 힘든 자국들이 이미 많아서.


효율이 좋던 나쁘던 화석 연료는 대기를 오염시키니까. 내 극단에 있는 커다란 빙하도 언젠간 녹아 감정이 설 땅들을 침수하리.


-


2022년 3월 16일


운전을 하는 것은 아직도 무서운 일이다. 면허는 면허일 뿐 더군다나 지금 운전면허증은 좁은 침대 옆 틈에 떨어져 쉽게 꺼낼 수 없다. 애초에 운전학원에 갔을 때에도 내가 필요해서 따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된 자녀에게 부모님이 줄 수 있는 가르침의 일환이라고 받아들였기에 더더욱 친근한 느낌을 주지 않았다.


동생들은 운전을 좋아한다. 운전대를 잡을 수 있는 기회만 있다면 나서서 하려고 한다. 꺼려지는 나와는 대비되는 태도인데 비슷한 남매의 이러한 차이점이 어디에서부터 왔는가 찬찬히 살펴본 결과 나의 책임감과 겁은 굉장한 유착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냈다.


우리가 매일 살아있을 수 있는 이유는 대부분 운에 의해서. 그 확률은 높은 확률로 나의 의지와 맞닿아 있다.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를 신호도 없이 건너가는 일을 우리가 왜 하지 않는가. 당장 이 시간에 괴한에게 목숨을 잃을 확률과 내가 차에 치어 생을 마감할 확률은 어느 정도의 오차범위를 가지고 있는지. 도로에 뛰어들지 않는 일은 입지를 많이 잃은 나의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단단히 필터로서 막아서겠노라고 자처했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닌지.


목적을 현실적으로 실패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힘든 일이다. 나는 신비롭게도 동생으로 살아올 기회를 많이 받들었고 직접 나서서 내가 길을 내야 하는 경우를 무의식 중에 굉장히 두려워했다. 어찌 보면 비슷한 교육과 환경에서 자라온 사람들이 특정한 상황에서 택하는 결정과 대답이 대체적으로 비슷함으로 증명될 수 있는 공포.


표면이 매끄러운 사람이 되어야 했었다고 후회한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차라리 내가 사탕과 같은 사람이었다면 흙바닥에 조금 구른다고 해서 그 가치를 잃지는 않을 텐데. 흐르는 물에 쓱쓱 닦아내고 꺼림칙함은 얼마든지 뒤뜰에 둔 채로 다시 입에 넣을 수 있었을 텐데.

솜사탕을 물에 씻어먹는 사람은 없지 않겠나. 너구리처럼 물에 녹아버린 솜사탕을 찾는 일은. 차라리 솜사탕 같은 사람이었으면 좋았으리라. 언제든지 훌훌 털어버리고 미련을 버리는 성품이 부러웠다는 사실을 숨기느라 항상 애를 먹지 않았던가.

나는 아이스크림 같은 사람. 차라리 닭이라면 알아서 몸속에서 모래를 잘 걸러내리라 생각하고 달콤함을 쪼아 먹었겠지. 퍽, 하고 떨어져 바닥에 엎어진 달콤함은 빙과가 녹아 바닥과의 거리를 좁히는 동안 하염없이 망연한 표정으로 바라보게 했다. 내 손에 올려놔도 녹을 것, 물에 씻으면 너구리와 다름없는 것. 쓸모없어져 버린 내 의지를 나는 시선으로 위로했다.


불가한 일, 실패로 여겨진다. 브레이크를 밟아 미끄러지며 정지하는 차가 그 미끄러짐 없이 정지하는 법은 자신을 버텨줄 무언가에 자신을 가져다 놓기.

또 자존심은 세서 아무도 없는 곳까지 차를 몰았다. 재차 두리번거리고 몇 번이나 주위에 아무도, 무엇도 없다는 사실을 의식한 뒤에 나는 적당한 가로수를 향해서 페달을 꾹 밟았다. 당연히 관념에서의 나는 죽지 않았기에 입맛을 다셨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처참히 망가진 차를 고칠 시간을 얻었음에 기뻤다.


불쑥 솟는 겁도. 남김없이 져야 하는 책임도 오로지 내가 다 질 수 있는 곳에 다다른다면 나는 편히 차를 몰 수 있을 텐데. 나는 저 행인을 치지 않아야 하고, 앞서가는 뒷서가는 차와의 거리를 신경 써야 한다. 도로교통법을 지키고 싶지 않다는 비준법적 인간이 아닌 그저 이제 툭하면 관계성에서 도망치려는 내 모습은 틈새에 끼인 플라스틱 면허증을 어렵더라도 꺼내 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전에 거절한다.


젊음은 언젠가 빼앗길 대여품일 뿐이고 생명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반납해야 할 것을 전전긍긍하며 떠안고 있는 게 유쾌한 일이냐고 묻는다면 아니, 절대 아니.






작가의 이전글 쌀을 계속 씹으면 단맛이 난다고 한다. 생각도 그럴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