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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Mar 19. 2022

대인깊이증을 대인얕게증으로 극복해보아요

2022년 3월 18일

뭐라도 말하고 싶어 떼던 입을 누름돌로 꾹 눌러 닫아버리는 이 마음이 나는 좋다. 호. 불호인 기분과는 별개로. 우울한 날 중의 우울한 날에는 늘 허심탄회하게 대화할 이를 찾지 못했다.

몇 개월간 처박아뒀던 게임기를 머리가 지끈거릴 때까지 붙잡고 있었다. 받은 용돈으로 친구들과 주말에 돈까스를 배불리 먹고 피시방을 네 시간쯤 하고 나면 이런 감각이 들었었다. 뇌가 풍선처럼 부풀어서 머리뼈 안을 팽팽히 채운 느낌.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는데 도통 나는 입을 벌릴 생각을 못한다. 잘게 다진 후에 배를 째서 위에 직접 놓고 닫는 게 더 빠를 지경.


때때로 내 머릿속을, 마음속을 양말 뒤집듯이 뒤집어 보여주고 싶을 때가 있다. 밑바닥에 붙은 부스러기까지 몽땅 털어서 무엇은 이미 알린대로 정말 없지 않으냐고, 반면에 이것은 진심이었지 않냐며 증명해대고 싶다. 내가 쌓은 업보로 인해 내 말은 화려한 칭찬일지라도 환전을 해서 상대에게 건네면 무척 보잘것없는 가치로 변해버린다.


솔직한 생각은 죄악이다. 누구나 생각하는 대로 느끼지 않고 느끼는 대로 말하지 않는다. 이리 보면 말은 두 번이나 걸러진 정제수가 아닌가. 삶의 노선에서 열심히 장작을 주워 뗀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서 받은 맹렬히 타오르는 사회적 체면과 개인의 명예. 무참히 뿌리지 않도록, 한참 참아 말로써만 물을 주는 것. 정중히 컵에 담아서 주거나 혹은 담은 후 불이 꺼지지 않을 곳에 흘려버리거나.


언젠가 내가 죄악에 대한 인식이 현저히 낮을 시절에는 장난을 포장 삼아 솔직한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올라간 상대의 입꼬리가 먼저번에 돋보이는 포장지로 인한 것인지 그 속에 든 내용물 때문인지는 오로지 낯선 이와의 마지막 시간에만 알 수 있었다.


생기는 인간의 의지로 불어넣는 것이 아니다. 그건 신의 일이다. 타버린 재가 다시 나무가 될 수 없고 씹어 삼켜버린 마음이 다시 다시 먹음직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오는 일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뱉거나 삼키거나 모두 입을 통할 수 없지만.


객관성을 되찾고 난 후에는 내가 살뜰히 챙기던 것들이 무척 보잘것없어 보였다. 이제는 누구에게 몽땅 줘버린 유희왕 카드. 그것을 보호했던 얇디얇은 비닐팩. 거기 붙어있는 포켓몬 스티커는 참 무용해 보였다.

며칠 전 당근 마켓에서 오천 원 주고 산 리자몽은 아직까지는 퍽 소중하지만 말이다.


물성이 같더라도 이제는 소화시킨  끼였을 뿐이다.   식사도  되는 먹이들은 나를 굶주리게 했다. 생각과 말은 그러한 굶주림 속에서 잉태했고 강렬하게 찍어 눌린 마음은  새로운 글을 쓰게 했다.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첫 관문부터 통과를 못했다. 전혀 걸러지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칼등으로 요리를 함과 같으리. 내가 절단이라고 생각하는 행위들은 전부 다 그저 문지른 꼴이 되어버렸으니까.


뚜껑을 열고 내가 두서없이 담아놓은 것들을 손과 팔이 다 지저분해지는 것을 감수하고 직접 꺼내야 했다. 꺼내 짓이기고 산산이 조각내 다시 걸러야 했으니까.


삶을 끌어가던 이유가 무의식의 핸들을 잡은 이후로 나는 전방을 주시할 필요가 없었다. 반절로 갈라 앉힌 내가 내가 욕망하지 않는 곳으로 운송 할리는 없었으니까. 무신경해도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리라고 생각해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참 우스웠다. 아무리 마스터피스를 만들어내고 명반과 명작을 찍어내고 죽어버린, 혹은 살아버린 사람들도 예찬하는 대중을 뒤로하고 본인의 업적을 괄시할까? 부끄럽게 여기고 혹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업적에 섞인 업보와 고독을 씹을까?


연옥의 밑바닥에서 하수도를 열어보면 분명 낙원이 있으리라. 상심을 감수하는 이유가 그 말고 또 있을까. 깊고도 깊다. 혹은 횟수제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마일리지 방식인가? 오늘은 좀 덜 속상한 거 같은데요? 상심 마일리지가 부족하니 부디 다음에는 더 속상하세요. 이제 좀만 더 쌓으시면 맨홀 뚜껑에 도착할 거 같아요.


삶으로써의 양말은 다시 뒤집는다고 해서 온전하게 발에 신겨지지 않는다. 경험은 가역성을 망가뜨린다. 알아버렸기에 몰랐다면 좋았으리라 알 수 있던. 사온 채반이 아닌 내가 한줄한줄 이어서 그 촘촘함을 수놓은 경험의 줄들.


상심은 아픈 것인가? 하면 나는 그 고통의 종류를 찰과상이라고 정하려고 한다. 보기에도 느끼기에도 쓰라려 가만히 놓고 있기 무척 힘들기 때문에. 낫고 있는 중인데도.

오만하게도 뚜껑을 따는 날이 와도 마음을 알아주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시간도 없고 에너지도 없고 무엇보다 입을 뗄 용기가 없으니까. 차라리 장기를 떼어 다는 편이 이해가 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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