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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Mar 31. 2022

나에게 산책의 즐거움을 선사한 사람들에게.

혼란하다! 2월 중순부터 3월의 마지막 날.

할증료가 붙을 애매한 시간쯤 돼서야 택시가 잡혔다. 오는데 8분이나 걸리는데도 택시는 먼 곳에서부터 왔다. 택시에 올라타자마자 할증요금이 추가되었다.


차가 많이 없는 길에서 기사님은 시속 120킬로로 달렸다. 아침에는 대중교통으로 딱 1시간이 걸리지만 지금은 20분 남짓이면 집에 도착할 수 있다. 한 스무 발 정도? 몇 발짝 움직이지 않고서도 손쉽게 집에 도착했다. 나는 이 이동수단을 위해서 쓰는 돈이 아깝지 않다. 걷는 것은 이제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스트레스는 무섭다. 귀에 이명을 들리게 했고 눈에 빛을 퍼뜨려 잘 보이지 않게 했다. 보통 때의 바벨을 밀 수 없었다. 떠밀리는 하루가 가면 꿈은 계속 나를 추격했고 나는 편안해야 할 잠자리마저 도망치며 압박을 누렸다.


둘이 하나만 못할 때. 러브 인 디 에어. 러브 인 디 에어. 아! 아, 들리십니까? 지금 여긴 숨이 멎는 진공포장 속ㅣㅔㅛ.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떠다니는 것은 무엇인가? 내키지 않아 열심히 살지 않아 스스로에게 미안하다는 느낌. 숫자가 많다고 해서 마냥 좋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 분리라는 것은 언제나 어색하고도 민망하다. 어차피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그냥 하고 끝내야지.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했더라. 눈물 주룩주룩. 웃음 피식피식. 괜히 히죽히죽. 뭐 그런 느낌으로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염세적인 시선은 어디에나 있지 않았었나. 사랑이라고 예외는 아니니까.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자꾸만 꼬이고 미적지근한 감정은 거창한 표현은 고사하고 솔직한 마음을 꺼내는 일에도 심드렁하다.


언젠가 이런 푸석한 건조함을 느꼈던 때를 더듬어본다. 상심을 겪고 난 후에는 극복을 택했고 그 과정은 때로는 음습하며 때로는 촉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마음가짐의 차이로 파생된 단어 아닌가. 우울할 때는 지하실에 숨은 해충처럼 있어야 했고 기분이 괜찮을 때는 겨울 손에 올려진 핸드크림처럼 있었다.


괄시했던 너희들은 이런 무료함을 견디면서 살아가고 있었냐고 물어보고 싶다. 공감이 되건 되지 않건 물어보고 싶다. 이런 나날들이 계속되어서 하루, 이틀 모여 삶이  것이냐 물어보고 싶다.


고립의 고립의 고립의 고립 나를 왕따 시킬 만큼의 고립.


내가 사랑에서 도망치고 도망치려고 하면 할수록 사랑은 나를 바짝 뒤쫓아왔다. 내가 버리고자 하면 어떻게든 꼭 주머니에 들어앉아서는 내 소지품을 발로 걷어차버렸다. 길바닥에는 물건들이 어쩌면 우습게 나뒹굴었다.


하지만 난 괜찮았다. 내 집을, 내 방을. 내 삶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저 오늘의 소지품이 땅바닥의 울퉁불퉁함을 몸소 체험하는 것을 이해함으로 나는 오늘의 사랑을 너에게 증명할 수 있었으니까.

맞아, 본디 사랑은 그랬지. 내 삶에 본래 있던 것을 마음껏 밀어내고 멀리 쫓아내도 되는 권한을 주는 것이었다.


항상 물건을 제자리에 두는 내가, 보이지 않는 고유한 루틴을 짜 움직이는 내가. 그런 일련의 과정을 버리고. 혹은 결점 없던 일상을 깨고 나서게 만드는 것이었지 사랑은.


더는 사랑의 뒤를 쫓지 않아도 되었을 때. 사랑은 도망치는 것을 멈추었고 사랑 또한 나를 쫓는 일을 멈추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 서있는 것일까. 대체 우리는 이제 어디로 향하기에 단숨에 고통을 주기를 멈추셨나요.


이제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면도 했지만 사랑받는 일을 마다하는 이가 있을 리가 있나.

지금 여정에 놓인 마음들이 영원하기를 바라지 않으며 다짐과 약속들이 너무나도 나약한 말들로 엮여 잠긴 것을 안다.

'이제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이 약속은 지구 어디에서 얼마나 수없이 잠기고 부서졌을까. 그들도 나와 같은 재질의 자물쇠로 잠그고 뒤 돌아 걸어갔을까?


얼마나 파괴적인 감정이기에 이런 단단한 다짐을 지워버리나. 공기처럼 고요히 스미나. 한 때는 나도 잘 알았으나 이제는 모른다. 나를 버리지 않았네.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지어다.


누구나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한 조건들. 치러야 하는 대가와 희생들. 호빵맨처럼 머리통의 일부를 떼어줘야 하는 일은 없었으나 나는 나에게 꽤 귀중한 것들을 내놓았다.

그래서 그런지 설파된 많은 진리, 개중에 나의 삶에 꼭 들어맞는 것을 진, 리. 라고 여겨 대입하면 기분이야 훨씬 나아지곤 했었다.


노트북을 거치대 위에 놓은 채로 며칠이 지났을까. 열어봐야지 열어봐야지 하면서 며칠이 지났을까. 결국 노트북을 열어 글을 쓰게 된 것은 그로부터 2주 가까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바쁜 나날들에는 사사로운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멜론의 플레이리스트는 이제 지난 이야기가 되어버렸고 시시콜콜하고 수다스러운 SNS도 놓은 지 1년이 넘었다. 기억도 나지 않을 줄이야. 어이없게도 오히려 기억나는 건 누군가 장난스레 보낸 아몬드 초코볼의 초코만 먹고 아몬드만 남겨 버리는 사진 따위다.


혼자라고 항상 생각한다. 둘이 있어도 혼자. 혼자 있어도 혼자. 나를 외롭게 만드는 것은 나 자신이지만 나조차 내가 한 선택에 원망을 보낸다면 이 세상 그 누구도 나를 지지해주지 않을까 싶어 항상 열렬한 합리화와 함께 두 발을 붙이고 서 있는 나를 위로한다. 적어도 발은 하나 아닌 두 개라서.


주절주절 머릿속 이야기를 꺼내놓아야만 속이 후련해지는 나날들을 또 지났다. 신기하게도 나는 입을 열었으나 그 입으로 행진해 퍼레이드를 펼칠 광대들을 모조리 잡아 저 커다란 신념에 묶어두었다. '더 이상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


우리는 다시 만날 일 없을 것이다. 그것은 비단 물리적인 접촉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아주 멀리. 지구의 정 반대편보다 더 멀리에 있을 것이다. 저 커다란 신념의 끝과 끝에 우리는 묶일 것이다. 그 우물에 돌을 던지고 아무리 기다려 봐도 바닥과 맞부딪히는 소리를 내지 않을 것이다.


남들이 키우는 고양이를 보면서 부럽다고 생각했다. 저 귀엽고 작은 생명체와 함께하는 일상은 내가 잠깐씩 절망하며 마주하는, 혹은 정제되어 게시되는 세상들을 편린으로 여길 정도로 행복하리라 감히 예상했다. 무엇보다 나는 인간의 언어로 그이에게 마음을 전하지 않아도 함께 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쁠 것만 같았다.


사람의 시간과 언어로 삶을 살기에는 퍽 지친 사람들이 많다. 그럼 인간이 인간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 말고 어찌 다른 도리가 있단 말인가?

하찮은 스티커를 떼어내도 자국이 남는데 나는 친밀한 관계를 얼마나 떨어내고 떨쳐내고 떼어냈나.

인간보다 짧게 사는 고양이를 생각하면 마음 한쪽이 아린다. 이별을 생각하고 만남을 시작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행동이지만 내가 함께해보지 않은 털 뭉치의 존재와 부재는 상상으로도 두려운 일인데 어쩌자고 나는 맞잡은 손에까지 스티커를 붙이고 당신들과 살아온 걸까.


그는 침대 맡의 젤리 봉지를 들어 젤리를 입에 넣고 무심히 씹었다. 간식은 애매하게 남은 채로 곁을 지켰지만 오늘 해가 뜨기 전까지. 간밤에 완전히 잃은 것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저 웅덩이 한가운데 던져진 무언가가 일으킨 파문을 조용히 지켜보며 생각했다.

파문에 일렁이는 달빛. 일렁이다가도 금세 매무새를 갖추는 어여쁜 모습. 그러나 진짜 달은 하늘 위에 고고히 떠있었다. 가짜라도 좋으니 파동이 사그라들 때까지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게만 해달라. 수면은 잔잔해졌고 비로소 달이 다시 하늘이 아닌 곳에 뜨자 나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3월 말의 아침 온도가 0도라니 정말 웃겨. 나는 3월이 꽃 피는 따사로운 봄인 줄로만 알았거든. 아침은 밝았고 밤새 고인 공기를 모조리 버리기 위해서 인센스를 켰다. 옳지, 계속 타들어가라. 내가 내쉰 숨들도 향과 함께 날아가라.


재활용이 안된다는 것은 한 번 사용할 때 최선을 다해 그 용도를 뽐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에는 재활용이 없다. 분리수거나 잘하세요. 늘 이성은 읊조렸지만, 철저히 묵살당하고 구석에서 감정한테 몽둥이찜질이나 당했다.


별안간 뜬금없이 짜장면이 먹고 싶은 날에 짜장면을 먹을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묶어놓은 이성을 줘 패느라 한숨도 못 잔 눈으로 점심 출근길에 짬을 내 찾아간 식당. 입시 때 자주 가던 중국집은 그 자리에 없었다. 살짝 당황했지만 이전된 자리는 가까워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짜장면도 너무너무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기쁘게도 고양이와 짜장면은 죽을 때까지 사랑할 수 있다. 둘의 본질은 실존을 앞섰다, 위로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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