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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Apr 07. 2022

제 장례식에는 무한도전과 침투부를 틀어주세요

2022년 4월 1일

#1 이틀에 한번 자는 아이


죽은 자의 눈을 하고서는 택시에 올랐다. 때때로 어떤 상황은 평정을 만든다. 오늘의 나처럼 지각했을 때. 아예 못할뻔한 외출 준비를 대충이라도 마치고 택시를 잡아 타면 의외로 마음이 편하다. 이제는 교통 상황이나 기사님 운전에 따라 몇 분 차이 나게 도착하겠지. 내가 조여놓은 약속시간의 타이트한 숨통에 누가 죽기 전에.


뜬 눈으로 밤을 새우는 것이 재미있는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한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오감이 너덜너덜해질 때쯤 해가 뜨는 날도 있었으나 그런 나날들의 소모성은 누구나 하루 이틀 지나 겪고 나면 알 수 있다. 삶은 그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혹은 그곳에만 있다는 것을.


많이 그리고 멀리 도망가라. 같은 땅을 밟고 사는 이상 다른 세상에 존재할 수는 없겠지만 너와의 거리를 가장 멀리 떨어뜨리는 것이 옳다. 행성의 정반대 편에 도착하고 나면 우리 사이의 거리가 가장 멀 테다. 발로 흙바닥을 쿡쿡 긁어본다. 지루한 학창 시절 조회시간에 짝다리 짚지 말라는 선생님 몰래 한쪽 발 끝으로 운동장 바닥을 건드렸던 것처럼. '지금 내가 발로 파낸 1센티도 되지 않는 이 거리만큼 우리는 가까워진 거야.' '다시 흙으로 덮었으니까 1센티만큼 다시 멀어진 거야.' 밀어내고, 당겨오고. 버렸다가 주워오고. 상상에서는 뭔들 못할까.


나는 언제나 내가 글을 쓰고 싶은 순간이 오면 나는 글을 쓰고, 몸을 움직이고 싶은 날이 오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주적인 삶을 개척하는 것과는 달랐다. 내가 원할 때 그것에 대한 나의 움직임이 합치할 수 있는 상태냐 아니냐에 관한 문제였다. 표방했던 뜻은 자유인데 가는 길은 영 자유롭지가 않다.


쓰고 싶은 말이 많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이야기 도중 말을 자르고, 말꼬리를 잡는 행위만이 소통의 장애를 만든다고 생각했거늘. 나는 말할 수 없었다. 내가 하려 했던 말은 비밀도 아니고 특정한 사람만 알 수 있는 사실도 아니었으며 그저 평범한 이야기에 가까웠겠지만 나는 쉽사리 입을 뗄 수 없었다. 나에 대한 배려도 아니고 상대의 이해심을 염두한 선택 또한 아니었다.


카페인으로 붙잡아놓은 정신은 현실의 필요에 의한 일에 쓰이고 만다. 사실 글도 운동도 뭣도 현실 일이 아닌 것만 같다. 그냥 동떨어진 내가 저기 어디 외딴섬에서 손바닥만 한 조약돌에 사과를 그려놓고 전화를 받는 연기를 하는 것만 같다. 하루를 정리하고 누우면 파쇄기가 돌아간다. 갈갈갈갈, 집요한 기자들처럼 어떻게든 앞뒤 순서를 짜 맞추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짜 맞출 거면 애초에 매일 갈아버리지도 않았다.


최근에 가장 즐거웠던 일이 언제신가요? 아, 얼마 전에 밤새 일하다가 남들 출근할 때 택시 잡아서 집에 갔었는데 그때 강변북로에서 아침 햇빛 맞으면서 글 생각을 했었거든요 너무 피곤했어서 그런가? 되게 기억에 있네요. 즐거웠던 일이 극한의 피로 속에서 혼자서 생각하는 일이라니, 역시 나는 사람이랑 안 맞는 거 아닐까.




#2 누구든 집에 돌아가는 길이 행복하길 바라. 진심으로 말이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언제나 와이퍼를 켜야 했다. 다른 곳 다른 이유 다른 우천. 펑펑 눈이 와도 비가 내렸고 화창하고도 추운 날에도 비가 내렸다


오늘은 노을 지는 6시 반의 저 햇빛이 강렬히 비춤으로 눈이 시려 소매를 당겨 콕 찍어 닦아냈다. 사실은 핑계고 갈피를 못 잡은 오늘이 아쉬워 서러웠다.


왜 시위를 힘껏 당겨도 얼마 못가 땅으로 고꾸라질까? 그라인더 숫돌에 피부를 지나 그 속에 단단함을 볼 정도는 갈려나가야 내가 갈아낸 칼은 내 마음에 쏙 들게 될까? 이 칼은 내가 상처와 맞바꾼 가치가 있도다! 라며. 그렇게 가치를 매겼으면 이미 롤스로이스를 탁송으로 출고했을 것이다. 가치를 파는 세상에서 내가 가진건 나한테는 그렇게 비싸니까.


처음 해본 클라이밍은 손과 발을 작살냈다. 손을 쓰는 직업한테는 위험한 취미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벗겨진 손가락 피부는 신경 써 관리한 덕분에 일주일이 되지 않아 잘 아물었다. 하지만 갖은 방법을 써봐도 발톱에 든 멍은 점점 짙어졌고, 아마 새 발톱이 모두 그 자리를 차지하기 전까지는 나와 함께일 것이다. 애초에 이제는 검은 멍이 되어버린 저 죽은 피도 한 때는 즐거이 내 몸을 돌았을 것이다. 주인은 전혀 즐겁지 않지만 지들은 지들 일 하는데 즐겁지 뭐. 거스러미와 자잘한 상처들은 나을 새 없게 푹 쉬지 않고 망각과 동시에 조심성 없이 손을 뻗는 모습 같아 한숨 쉬게 한다. 중금속처럼 서서히 누적되어 나의 기분을 죽인다.


아마 먼 훗날에 나는 단내가 나는 인간이 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도 누구와도 이야기할 수 없는 날 오후의 입냄새처럼.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RGB랑 CMYK 정도의 색상 차이랑 실망감이랄까. 이미 내뱉는 말 족족 실망스럽다. 미소유는 소실보다는 행복한 상태이다. 무언가에 대해서 낱낱이 아는 것이 과거형이 되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내가 가진 지도가 방향이며 길이 전혀 맞지 않다는 사실을 한참을 여행한 뒤에 알아차렸다.


번화가에 나가면 거의 즉시, 일순간에 기력이 바닥났다. 즐거운 약속이라도 되는 듯 환히 웃으며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그 사람들이 입은 옷도. 식당도 카페도 전부 다 나에게 빨대를 꽂고 누가 누가 이 27살짜리 음료를 입에 많이 머금어 차지할 수 있을지 내기라도 한 듯이,

그중에 가장 짜증 나는 건 역시 이런 거리에 쇠약해지는 나 자신이다. 이제는 지하철을 탔다고 숨이 막히거나 도망치고 싶은 일도 없지만 여전히 붐비는 거리와 행복한 사람들과 풍요로운 주말에는 적응도 안되고 빠져나오고 싶은 감정적 궁색이 있다. 기운도 좋아, 이 말에는 농담이 없다.


이어폰으로 귀를 닫고 미간을 강하게 찌푸리고서, 역병의  없는 혜택인 모두의 얼굴을 가린 가림막의 뒤로 입술을  깨문  걸음의 속도를 떠밀었다. 최근에 급히 융통해서 받은 감정은 이율이 매우 높았다. 내가 숨길  없는 적대감을 느낄 때마다 징벌이라고 느꺼질 정도로 족족 꼬인 인간관계라던가  이상 되는 변명거리들을 안겼다. 이어폰보다   헤드셋을 사야겠다. 손톱만  이어폰으로는 이제 나를 감추기 어려운 마음 상태가  듯. 귀를 손바닥으로 가려서  차별 없는 고요로.


대부분 정신은 20대에서 머물고 사고 또한 그렇다는데 이렇게 50살이 되면 참 볼만 하겠다. 그때도 택시를 타면 창밖을 보고 문 위쪽 손잡이를 꾹 잡은 채로 쓸데없는 사유를 좌판에 깔고 팔까? 차라리 해가 진 다음 거리에 나올걸 하며 서두른 자신을 자책할까? 그런 모습은 마다하고 마다하고 싶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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