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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Apr 16. 2022

곳간에서 인심 난다, 곶감에서는 뭐가 날아가나

2022년 4월 16일, 고의 없는 네거티브를 견디는 봄에

대충 한 면도에 입 주위에는 피가 맺혔다. 즐거워, 전기면도기로 해도 될 일을, 시간도 촉박하지 않은데 시간을 가지고 정성스레 해도 될 면도는 하루 종일 마스크를 벗어야 하는 순간이 올 때마다 상처 난 얼굴을 매만지는 번거로움을 만든 뜻밖의 일. 고의로 귀찮은 일을 만드는 일은 즐겁다. 숱한 연락들이 그랬고 영혼 빠진 만남들이 그랬으니. 그라인딩, 그라인딩. 나를 갈아 만든 분진에 불을 붙이리.


가챠가 최고의 BM이 된 이유가 있다. 불확실성이 주는 즐거움에 중독된 것일지도. 한 치 앞 정도는 예상 가능한 지루하기 짝이 없는 바탕지에 주어진 삶의 색 이외의 색깔이 필요했다. 때로는 훔쳐 그리기도, 빼앗아 칠하기도. 때때로는 내가 필요할 줄 알았다는 듯이 선뜻 먼저 건넨 호의에 숨은 적의도. 지루함만 소거할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


홍수를. 범람을 겪고 우리에게 남은 것들. 비옥해진 강가 땅의 주인들이 내년의 수확을 벌써 점쳐 기뻐한다. 그 이전에는,


둥둥, 말들이 떠다닌다. 말을 섞은 적은 없었지만 너희와 내 사이는 물과 기름 정도는 아니었으니 분명히 같이 혼합해서 마셨다고 했을 정도는 될 듯? 뒤죽박죽으로 섞였을 것이다.


엎질러진 물. 그러니까 내가 쟁반이나 컵받침을 둔 채로 물을 따랐으면 했었잖아. 그랬었으면 얼마나 좋을뻔했니. 주우우우욱, 평평해 보였던 테이블의 묘한 표면을 따라 만들어지는 강줄기. 가서, 테이블의 끝자락에서 입을 들이밀고 마셔보는 건 어때? 마신다는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다. 입으로 뚝뚝 떨어질 테니까. 나는 협곡을 마시는 자!


고작 탁상을 적신 일들이 후에 내가 정성스레 강둑에 심은 가로수를 모조리 썩은 나무로 만들 줄이야. 혹은 내가 누군가의 강둑에 들어가기를 자처해 더 작은 세상으로의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얼결에 책상 위에서 살고 있었던 거다.


눈두덩이에 숨은 속쌍꺼풀이 피로에 밀려서 얼굴 위로 드러날 때. 나무는 모습을 감췄다. 모든 일에 방편을 마련할 시간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분리도 그랬고 합치도 그랬다. 필요 이상의 감정과 시간을 들이부어서 겨우겨우 막고 나면 몸도 마음도 지쳐 양치조차 안 한 채로 잠들었다. 기상 후에 분명 목이 잠기고 코가 따갑겠지? 아주 간단한 행위로 막을 수 있는 난조를 또 무심히 혹은 유심히 일어나게 두었다.


수면 위를 떠다니다 보면 생각에서 멀리 던져졌던 것들이 떠올랐다. 방치하다 방치하다 구청에서 자전거에 대한 처분을 적은 고지서를 붙여두었으나 그마저도 부착된 채로 방치된 주인 잊은 자전거. 한국 사람들은 자전거를 참 잘 훔쳐가. 노트북과 콘센트가 있는 카페 자리 중에 뭘 더 빼앗고 싶은지 물어보면 나도 후자를 고를 테다.


사실 누가 뭘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게 뭔가. 노트북은 내가 간수하고 나는 자전거를 잃어버리지도, 내 물건을 방치하지도 않는데. 평가에 대한 불가피함이 누군가에게는 고통일지 모르나 나 역시 평가를 일삼는 사람이자 평가로 살아진 사람. 고지서 붙이는 공무원만 귀찮다.


정성 들여 가꾼 나무들의 잎사귀는 모두 떨어져 나의 것도 아닌 저 녹슨 자전거와 함께 떠다닌다. 마음 쓴 것에게 들이부어진 상황은 가치를 고려하지 않는다. 마치 불길처럼 소재가 무엇이든 우그러뜨리고 검은 재로 만들 뿐. 어떤 관점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공평이다. 사이좋게 함께 죽는 거.


나는 갈등이 생기면 방법을 찾아내 해소하거나 혹 후미에서 지켜보던 누군가에 의해 맥이 끊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있는 마음 없는 마음 있지도 않은 진심도 쥐어짜 한 잔 내놓았다.

본 아페티, 그러나 나는 후미에서 다가오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처지에 놓였고 다른 데 가서는 쉽게 해소할 갈증에 대한 해답을 황급히 빙빙 돌려 저 컵 속의 소용돌이의 중앙에 숨겼다.


결핍으로의 발전은 아니라도 우리 행복은 부족함에서 기인했지 않은가. 운동회 때 반장이 햄버거를 쏜 기억이 내가 숱하게 배만을 채우려고 주문했던 세트와 단품 버거보다 강렬하듯이, 심지어 두 개나 먹었는데도.


사유하지 못하는, 사유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게임에서는 몬스터를 기절시키기 위한 수치가 존재한다. 칼은 크면 클수록, 날붙이보다는 둔기류가 그 위력이 높다. 불친절한 게임이라 그 수치는 우리에게 표시되지 않는다. 다만 몬스터를 패면서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게임을 오늘 처음 하는 게 아니니까. 내가 몬스터였다면 머리를 뭘로 몇 대정도 맞으면 기절할까? 다리를 몇 번 정도 가격 당하면 넘어질까?


알 수 없다. 나를 넘어뜨리고 정신을 아득하게 만든 이들도 사람을 줘 패본 적은 많이 없을 테니까. 바람 타고 날아오는 저 민들레 홀씨가 머리에 닿았는데 내가 기절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주먹질을 당하던 칼을 맞던 그로기로 넘어간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 정신을 바짝 붙잡고 기절 안 하고 안 넘어지면 되는 거니까. 걔네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본인들은 명존쎄나 죽창에서도 의연해질 수 있다면 해도 되는 말이긴 해. 단말마만이 사라진 자리에 남겠지만.


머리가 루빅스 큐브처럼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맞춰질까 하다가도 다른 색 하나가 아홉 조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내가 너의 숙제요, 하며 뻗댄다. 눈이 튀어나올 거 같은걸!


이해 못 하면 생각을 그만두면 되고 생각을 그만두면 말할 기저가 없으니 입을 다물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이어가는 너의 저의엔 재미난 루빅스 큐브만도 못한 타인들이 즐비하다. 도리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덕분에 침묵을 배웠으니까. 나는 반면교사를 교사 중에서는 최고의 가르침을 주는 교사로 마음속에서 채용했으니까. 높은 경쟁률을 뚫고 교사가 된 반면. 그는 짜장면도 반 그릇만 먹는다.


3월의 마지막 글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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