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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May 09. 2022

내 진정한 행복은 기억일까 71억일까

22년 2월의 시,

2월 8일

#1

아버지는 예언에 가까운 확신으로 전해주었다. 인간은 언젠가 무지막지한 존재의 도움을 원하고 마음을 다해 빌고 기도하게 된다고. 나는 코웃음을 쳤다. 전능한 존재는 부재하고 있고 나는 그의 부재를 틈 타 은밀히 가리라. 하지만 나는 오늘 두 손을 모았다.


극복하지 못할 어려움에 직면한 것도 아니고 내가 어떠한 나락에 떨어져 잡고 올라갈 밧줄을 갈구하고 있는 상황도 아니지만 나는 바랐다. 언제나 날 괴롭히는 풍랑을 조금은 막아주시면 안 될까요, 하는 애원 섞인 바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진짜일 확률이 높다. 비는 내리지 않고 바람은 불지 않는다.


#2

너희는 편리함을 위해서 희생하라.


나는 희생의 주체였을까 편리의 주체였을까? 줄곧 나는 내가 희생의 주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보통은 어딘가를 향한 강한 믿음은 클리셰처럼 깨져야만 하는 것이다. 인과율에 의해서 그런 공고한 기둥은 누군가의 고의적인 망치질에 의해서 금이 가고, 부서져내려 말로에는 건물 전체를 주저앉히는 필수 요건이 되어야 맞는 것이 아닌가?


종종 내가 겪는, 겪는? 혹은 경험하는? 아니면 나라는 개인 그 자체가 된 편리와 편의에 대해서 생각한다. 지금 타이핑하고 있는 키보드. 얼굴을 보이면 열리는 화면들. 간단한 그림 하나로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시대. 수기라는 것은 불편하고. 암기의 낭만은 퇴색된 것은 아닐까 염려한다. 내가 가장 최근에 외웠던 사실은 무엇이 있나. 우습게도 떠오르지 않아서 전화기 앨범을 뒤적거렸다. 사진첩은 나에게 더위사냥 종이팩이 2년에 걸친 개발의 결과? 심포 물레 부가세 포함 175만 원, 이태원 바토스 타코가 맛있다더라 같은걸 내놓았다.


전화번호를 외우는 것은 언젠가 시대의 누군가에게는 낭만의 상징이었다. 가까운 사람들의 연락처는 외워놓는 것은 필수와 필요 사이의 높은 자리에. 전화번호부라는 것은 나에게는 처음부터 전화기에 저장하는 것이었다. 수첩이나 머릿속이 아니라. 대충 식별 가능한, 혹은 애정 가득한 이름을 적어두지도 않았다. 이름 석자를 적었다. 김 땡땡 이 땡땡 최땡땡.  얼마간 어떤 이는 그것에 대해 굉장한 섭섭함을 토로했다. 언젠가의 누군가의 낭만은 나에게는 그저 식별을 위한 단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화기가 없던 어린 날에도 누군가의 단축번호 1번이 그리 중한가 했다.


편리를 위해서 희생한 것은 상대의 상한 마음일까? 혹은 내다 버린 내 공감과 배려심일까? 아마 후자에 가깝지 않을까. 내가 가장 전화기 자판을 빠르고 정확하게 누를 수 있던 시기에 나는 그들의 번호를 줄줄 외웠다. 디지털의 수혜를 누릴 수 없는 곳에서는 수첩을 꺼내오는 행위보다 머릿속에 번호 11자리를 욱여넣는 경험이 더 많았다.


집에서 종종 작업의 진행과정이나 짧은 가계부, 메모들을 적던 공책은 이제 쓰지 않는다. 잉크가 없는 펜과 반영구적으로 남는 기록방식은 낭비를 줄인 것인지 내가 여태까지 써오던 방식을 버리는 것을 강제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들에게서 비롯한 편리는 희생을 뛰어넘는 아득한 수준이었다.


능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한 항목은 인고와 불편의 시간을 견디고 나서야 그 편의를 누릴 수 있게 한다. 개인적 소양 부족으로 인해서 정신적, 경제적. 더 나아가 자존감에 마저도 상처를 내고 있을 때 나는 그 불편이 영원하지 않기를 바랐다.


우리 나이가 들어갈수록 불편을 겪는 빈도나 확률을 무의식 중에 줄여간다. 먹기 싫은 음식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말로 대충 포장하면 누구도 권하지 않는다. 덜 입은 외투 한 장과 가방은 개인차량으로 대체되고 횡단보도의 불편함도 잊는다. 해보지 않은 일은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지만 그것들이 나에게 있어 처음 겪는 일로 편성될리는 굉장히 만무하다.


여전히 희생의 주체인가? 믿음이 편리함을 위한 선택이었다면 부패한 마음은 내 것은 아니니. 편리와 희생은 사실 더 쉽지 않은가. 감정의 취사선택은 누군가에게는 지탄받고 있겠지만 편리는 편리일 뿐 선악이 없다. 횡단보도로 내가 건너고, 혹 건너는 사람이 없을 때를 기다리는. 내가 선 곳에서 맞는 선택은 때때로 극단에서 서로를 끌어당긴다.


너희는 희생한 만큼 편리함을 얻으리.


2월 9일, 11일

낭만은 사라지고 오늘날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사랑하는 이들을 버리고 얻은 것들에 이름을 붙여보았다.


본질을 꿰뚫어 보는 그들의 눈에 보인 것은 뭘까? 그렇다면 본질을 알 수 있게 해 준 진짜 삶이란 어디 있단 말인가.



2월 13일

진리는 존재하지만 모두의 삶에 들어맞지 않는다. 진리의 의미는 퇴색되고 각자의 견해와 상황이 개별의 진리를 생산한다. 아니, 진리는 너무나도 많다. 유일한 것이 진리라면 그건 너무 슬픈 일인지도 모른다. 너와 내가 쫓아가던 게 진리도 뭣도 아닌 정말 보잘것없는 것이라니. 그래서 각기 다른 사람과 삶과 마음과 생각은 각자 취사선택을 감행했다. MBTI처럼. 100개의 객체, 100개의 진리.


그래서 내가 싫어하는 싼마이 위로가 대세가 되었나? 나는 못하고 있는데 잘하고 있다고 하는 건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이잖아. 무조건적인 위로 요구에 애초에 건네려 했던 손조차 주머니에서 꽉 쥐고 빼지 않았지 않나.

사막의 바늘이 집구석의 반짇고리 속 바늘보다 가치가 높다고 여기는 이유는 너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숨 쉬는 것은 일상적인 행위의 일환으로, 하나도 특별하지 않다. 특별하지 않은 일에 신경을 쓰는 것이 낭비엔가?



2월 14일

어차피 글을 의무감으로 쓰려고 하면 나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내가 행복해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로 이전에 겪던 감정들과는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때문에 나는 이전에 썼던 글에 대한 코멘트를 달 수 없었다. 채워놓은 곳간을 브런치로 옮기는 동안 나는 글에 대한 수정을 대부분 하지 않았고 맞춤법이나 구성을 수정하는 것 외에는 딱히 그때의 감정이 훼손되지는 않을까 하여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그런 시기들이 있고 나서 내가 써놓은, 다르게 표현해서 담아놓은 밑천이 다 바닥나버린 시점에서 감정을 돌아보게 되는 것은 자연한 현상이었다.


사랑이나 우울 등의 토픽으로 글을 써온 내가 다른 주제로 비슷한 수준의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무엇보다 내가 집중하고 있는 삶의 주제는 향상. 그 무엇이 되었던 향상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있었기 때문에 무엇이 오던 괜찮았다. 하지만 누구처럼 누구에게 힘이 되는 글을 쓰는 것은 여전히 곤혹스러웠다.


이전에 알던 가치는 없다. 순수한 느낌도 없고 마냥 관철하는 행위 자체도 버렸다. 그저 유연한 사람이 되기로 한 것은 아니지만 아는 것은 곧 힘. 나는 알게 된 것이다. 아니,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의 스탠스를. 나의 삶의 옷장을 넓히는 행위는 계속될 것이다. 때와 장소에 맞는 복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만히 엎어져 있으면 안 됐다.


뭐라도 적어야겠지 싶어서 이렇게 몇 자 적어본다. 문맥도 엉망이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글이지만 대충 미래의 나는 내가 이 당시에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항상 이 느린 편지는 그렇게 전해져 왔으니 말이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그것이 설령 내 삶에 길게 기억될 비참한 날일지라도. 언제라도 한 순간에 나를 고양시킬 단순하고 명료한 에피소드일지라도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그렇다면 운명을 바꾸는 주체는 누구인가? 나는 여전히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확답할 수는 없겠다.


2월 16일, 18일


문득 더는 어리지 않다는 것을 통감한 날에. 책임의 무거움과 두려움을 머리 위에 이고 가야 함을 알았을 때 우리는 서커스장 말뚝에 묶인 다 큰 코끼리 같이 행동했다.


내게 열망과 성취는 기쁨이지만 열정이 사도라 생각되는 이유는 나에게는 쉬이 꺼져버리는 까닭일 것이다.


운동하러 가는 길, 영하 10도가 넘는 날씨이지만. 부진한 식욕으로 인해 살이 3kg이나 빠진 지난주를 기억한다. 체질이라는 건 참 웃기다. 누군가는 죽을힘을 다해서 식욕을 참아야 하고 누군가는 공복감을 좋아한다. 누구는 일생을 마른 몸을 위해 살고 누구는 일생을 마른 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산다.


보이는 것에 대한 편견이나 관념을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개인의 마음속에서 이미 정립된 것이니까. 다양성을 주장해도 소용없다. 다름을 인정하지만 다름을 주장하는 너 또한 어차피 다른 세계에 발을 들이지 못할 테니까.


비만이 가난한 이의 질병이라는 말은 너무나 폭력적인 말이라서 차마 사람들과의 직접적인 대화에서 꺼낼 수 없었다. 저 문장의 화자는 자신의 말에 무게를 두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나는 공감하는 말과 함께 적당히 포장해서 서랍에 넣어두었다.


망가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되어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온전하지 못할 바에야 뒤죽박죽으로 순서마저 뒤엉키게 되어버리는 것이.


그러나 나는 망가질 수 없었다.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는 일도. 파멸적인 사랑을 끊지 못하고 이어나가 여태 유지해오던 나의 태도들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도. 모두 참을 수 없었다. 두려워한 것이다. 심연에 내가 버린 것들을. 누군가 그것을 낚아 올리게 되는 광경을. 두 눈을 뜨고 목격할 수 없던 것이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추어 문득 바라본 나의 눈빛 속엔 공허가 있었다. 분노는 결핍으로부터 온다. 역설적으로, 결핍에서 온 분노는 빼앗겼던 것들을 채운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부족함으로부터 온 상흔은 채운다고 해서 낫지 않는다.


내가 어떤 일이던지 내킬 때까지 미룰 수 있는 이유는 아마 성품의 영향이 가장 클 것이다. 미루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개인적인 확신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나 또한 그랬고 어떤 나날에는 그 오만이 나를 겸손하게 만들기도 했다.


몰아치는 때가 있다. 할 일도. 상한 감정도. 복잡한 오해에서 비롯된 관계들도. 완전한 해소는 없다. 내가 처음으로 일이 벌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것은 옷이나 수건 따위가 젖는 것을 보았을 때다.

건조한 옷가지는 윤택한 생활을 대변한다. 모험기의 주인공들은 더럽고 남루하고 축축한 옷을 어렵사리 도달한 안식처에서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종종 옷이 젖는다. 비가 와 바짓단이 젖고, 손을 씻다가 미처 단단히 걷어올리지 못한 소매가 젖고. 무더운 여름날 꿉꿉한 느낌의 티셔츠가 있었다.

젖은 옷은 마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금세 젖어버린 소매도 수업시간 내내 나를 불편하게 했고 세상을 적시고 나에게도 물을 튀기는 비는 내가 비 오는 날을 싫어하게 만들었다.


스며드는 것은 잠깐이었지만 체감상으론 마르기까지 굉장히 오래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습기가 물러갈만한 햇살 좋은 창가에 걸어둘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나마 내가 군대에서 좋아했던 겨울철의 라디에이터처럼 자비 없이 뜨거운 난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생각을 피력하고 그저 내 일상의 감상들을 내려놓는 글들에도 얼마나 많은 편협함들이 있는지. 젖은 옷은 이래서 싫고, 마른 몸은 이래서 싫고. 열정을 삶의 기조로 삼기 어려우니 이름이 비슷한 열망을 그 자리에 꾸역꾸역 채워놓은 나.


2월 21일

비염 수술 후의 좋은 점에는 내가 알레르기성 비염이라는 것을 더 격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숨을 원활히 쉴 수 있다는 장점은 공기의 원활한 통과와 동시에 콧물도 더 원활하게 나올 수 있음을 의미했다.


적나라하게 느낀다는 것은 나에게는 장점으로 보였다.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더 긴밀하게 파악하고. 내가 해야 하는 일들에는 참 필요한 요소와 능력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때때로 무던하기를 바란다. 꼭 심리테스트 검사 같다. 당신은 꼼꼼한 성격이지만 때로는 널브러져 있는 것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나는 내가 인벤토리에 한자리 차지시켜야 할 덕인지 알쏭달쏭하다. 당신은 미스터리를 좋아하지만 때로는 통쾌한 해결을 원하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알아서 속상해진 일들이 더 많았다. 몰라서 당당할 수 있던 나날들의 방자함을 되짚어보며 훑었다.


콧 속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욕심내서 운동을 하는 바람에 마스크를 빨갛게 물들였었다. 내가 앞으로 알아나가는 삶도 매번 방종과 쓰라린 나날을 복기하며 핥아대는 시간이 있을까 문득 두려웠지만 그럴 때마다 콧속 가득히 가슴 깊숙이 들어오는 들숨을 상기하고 느꼈다. 후련해.


2월 24일

#1

그래, 그래서 잃어버린 거야 잊어버린 거야? 확실히 말해줘야 알 수 있을 것 같아. 혹은 버린 거야?

확실히 말해주는 사람이 좋다. 그건 나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나는 확실히 말해야 했다. 내가 잃은, 잊은, 버린. 것들에 대한 정의를 스스로에게도 명백히 밝혀야 했다. 스스로에 대한 청문은 굉장히 더디게 이루어졌지만 꼭 규명해서 못 박아 두어야 군중은 웅성거리는 그들의 의심을 거둘 테니까.


#2

놀랍게도 과거의 나는 어디에나 있다. 지금도 누군가는 나의 과거를 살고 누군가는 내 미래를 먼저 산다. 내가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어주어 그가 나의 전철을 밟는 것인지 혹 내가 들어서야 하는 미래는 살아가는 자의 후계로 그의 자격을 박탈해 내 것으로 만들어야만 함인지!


자의로 하루에 많은 돈을 쓰고 온 쇼핑몰에도 나는 있었다. 얼핏 봐도 아이가 맘에 들어하지 않는 신발을 예쁘다고 어르고 달래는 엄마와 아빠를 양쪽에 둔 소녀의 시선은 자신의 발이 아닌 땅바닥을 향했고 볼과 귀는 새빨개졌다.


그저 지나가며 본 광경이지만,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내 경험에 빗대어 다른 모양으로 재단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내 일상의 감상은 꽤나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받아들였다.

아, 이건 저 아이의 삶에 기억에 남을 순간일 것이다. 상대는 기억도 못할 악의도 없고 숨은 뜻도 없는 순수한 말이 오히려 삶에 박혀 좋든 싫든 전신주를 세우겠구나. 유쾌할리 없는 기억이지만 잊기 위해 더 멀리, 더 길게 늘어뜨린 전선을 이어놓는 수밖에.


오늘날에는 대조적으로 보였다. 나와 그 아이가 아니라 시간을 내밀어 재어보았다. 가늠해보았다. 나는 그때 어떻게 했었을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원망 섞인 읍소를 종종 했었지. 결자해지, 결자해지. 누가 풀어주리.  매듭에는 배려가 없다. 내가 어리던 슬펐던 가난했든 간에. 나는 평생에 걸쳐 낑낑대며 당기고 밀며 풀어볼 것이다.  가역성에 대해서 생각한다. 내가 풀어헤치려는 노력보다  끈의 끝과 끝을 이어 삶을 견인하려는 나의 움직임은 결코 합의하지 않을 테니까 너희는 길이를 줄여라. 매듭진 곳을 잘라내기로 하자. 누군가는 억지망각의 행복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나는 귓등으로  말들을 보냈다. 손가락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앞에 놓인 것을  수는 없을 텐데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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