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헌 May 20. 2022

얌체처럼 끼어든 마음이 체증을 유발했다

5월이 됐음에도 여전히 달은 추위를 몰고 다닌다.


5월 4일, 13일

'눈 좀 똑바로 뜨고 다녀'


반쯤 감긴 눈을 하고 다닌 지 꽤 됐다는 사실을 흠칫 놀라며 알아챘다. 이렇게 눈을 뜨게 된 이유가 뭐였더라. 어차피 마스크 썼으니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며 입을 쭉 내밀고 눈을 퀭하게 뜨고 크록스만 신고 다니는 거. 힘없이 터벅터벅 걸으며 이태원, 집, 분당, 헬스장을 무한 로테이션. 그나마 요샌 낫다 배고프면 즉시 식사를 하려는 마음이 있으니까.


외형이나 옷차림이 어찌 됐건 맨날 피곤한 건 사실이었고 내가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 다니는 것 또한 사실이어서 마땅한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멋쩍게 알겠다는 말을 하고 미간에 힘을 콱 주었다. 여권을 만들려고 오랜만에 남의 손에 사진을 찍히러 간 날 나는 화들짝 놀랐다. 내가 살아있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그 몰골을 육안으로 낱낱이 볼 일은 없었으니까.


지난 2년간 내 미간에 있는 주름은 그 깊이를 더했다. 인부를 많이 고용한 모양이다. 아니면 중장비를 빚내서 샀나? 아주 잘 팠다. 그래서 그런지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내 안와는 마치 두개골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듯 퀭했다. 뒤통수를 뚫겠는걸.


물리적으로 낯빛이 썩어가는 거랑은 별개로 이전의 나는 종종 이런 상태를 경계했었다. 누리던 소년의 시간들을 잃는 거. 하지만 내 나이 또래의 소년들이 익히 그랬듯 나 역시 당시에는 머무르던 그 자리를 벗어나고자 무던히 애를 쓰지 않았었나. 비로소 다음 단계로 가는 여정에 올랐을 때라야 잔뜩 묻어있는 후회를 찾았다. 나는 세척이나 세탁 시설이 전혀 없는 타지의 휑한 방에서 일일이 얼룩과 오염을 훑으며 닦았다. 그들이 오염이라고 불리게 된 오늘에 탄식하며.


문득 궁금했다. 매일 마주하는 얼굴이라 뭐가 바뀐 건지 나는 몰랐지만 몇 달, 몇 년 만에 보는 사람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굳이 마주칠 거면 나에게 좀 호의적으로 다가왔던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봐도 스트레스 덕에 속쌍꺼풀이 겉으로 튀어나왔다며 웃어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5월 15일과 17일

과거와 미래를 통틀어 행복을 좇았던 시도는 족족 실패했다. 애초에 뛸 필요도 없었다는 걸 알았을쯤엔 낡은 신발을 몇 개나 내다 버린 후였다. 눈에 보이던 행복은 내 것이 아니었고 내 행복을 위해서는 그들의 것을 빼앗아야 했는데 왜 굳이 빼앗냐고 물어오면 때때로 그들이 듣고 싶은 대답을 해줘야 했지만 진심은 달랐다. 딱 절반. 내가 행복하면 누군가는 불행하니까 나는 빼앗기지 않거나 내 품으로 가져오기.


그나마 최근 행복감을 주었던 조각이나 파편들을 겨우 모아보니 모은 게 무색할 만큼 정말, 정말 소소하기 짝이 없었다. 사유로 겨우 삶을 이끌어 온 것과 마찬가지로 사유로써만 겨우 행복을 겪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그늘을 만들었다. 그는 오로지 사유에서만 편히 쉴 수 있었다.  


농도 짙은 주위 사람들이 다들 나에게 글 쓰는 것을 관두라고 말한다. 혹은 즐겁거나 긍정적인 마음을 써보는 것은 어떻냐고 제안한다. 온전히 남을 무시하는 무례함까진 아직 멀었는지 종종 떠올라 가끔은 행복한 일들을 적어보려고 한다. 다음번에 물어보는 사람에게는 불로 태워 만든 흔적과 물로 써 내린 그림 중에 어떤 게 더 오래 마음속에 남을지 생각해보면 된다고 말해야겠다. 지금 물을 왕창 쏟아놔도 저녁이면 없을 테니까.


닳고 닳은 심정을 뒤로 돌려보니 의외로 날카로운 면이 있었다. 연필도 이렇게 사용했었지. 요샌 펜을 계속 썼어서 깜빡 잊고 있었다. 삶은 점점 짧아지겠으나 내가 한쪽을 갈아 수놓은 글씨와 뭉툭함의 뒤를 잡아온 날카로움이 벼려져 남으리.


까먹으면 안 됐다. 무엇보다 착취하는 손은 내 팔에 달려있다. 빼앗겼다는 막연한 상실감은 손을 더럽게 했다. 올해의 절반도 지나지 않았지만 작년에 쏟았던 만큼의 눈물이 있었다. 지나친 자기 연민은 삶을 망친다. 알던 원리들은 개똥보다 형편없이 쓰려면 없다.

오히려 막역하게 친한 사이도 아닌 사람이 이르길 '맨날 함께 있는 건 스스로인데 자신이랑 젤 친하고 사랑해줘 봐요~' 나는 무척 대단한 비밀을 들은 사람처럼 얼어붙었다. 언제나 작업이 끝나면 완성도나 만족이랑은 별개로 몸에 피가 다 뽑혀나간 기분을 겪음과 함께 파리한 얼굴과 차게 식은 몸이 있었다. 기분 탓인가 싶다가도 나를 얼게 한 그 말은 지금도 서리처럼 내린다.


착취라는 말의 어감이 너무 나쁘다. 피를 빠는 모기나 휘어진 등골이 그려지는데 사람들도 그럴까 모르겠다. 우리의 사고방식이 서로 다른 게 나는 매번 새롭고 신기하다. 어떻게 같은 재료를 줘도 한쪽은 식사를 만들고 한쪽은 똥을 만드는지.

어떤 때의 나는 파인 다이닝 식탁을 차리고 쓰레기를 받아 들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심이 있었지만 그 이전에 나는 똥을 주고도 고급 식사를 마음껏 먹지 않았나. 업보라고 생각하며 네가 떠난 후 겸허히 엉망진창이 된 식탁을 치웠다. 그곳은 식탁이나 식사자리라고 부르기가 뻘쭘할 정도로 난장이었다. 그래. 네가 이렇게 해주는 게 난 오히려 편해. 설거지하던 그릇마저도 손수 던져 깨버리고 너까래를 가지러 돌아섰다. 이젠 소중히 다룰 이유가 없었으므로.  

작가의 이전글 내 진정한 행복은 기억일까 71억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