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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Jun 11. 2022

기생충이 목마를 땐? 숙주 나 물

22년 5월을 묶는 실

5월 29일

업은 쌓이고 행위는 사라진다. 결과는 남아 영영 엮인다. 글의 내용이 일관하다. 아무리 내가 파편의 모임이라고는 해도 넓은 저택 안 짱 박혀있는 이까지 모두 불러 모아 줄을 세워보니 꽤나 고르고 일정한 용모를 가졌다. 권위적인 폰트로 현판에 쓰인 용모단정 표어. 혹은 잘 발송된 드레스코드를 전해받은 이들이 내 의견에 따라주어 고마울 따름이다. 사실 전달된 방식은 모두 무방했다. 내가 필요한 것은 단지 일정하고 단조로운 표면이었으니까. 튀어나왔다면 평탄해질 것이고 패어있는 부분 또한 그럴 것이다.


돌아가기 위해서 사진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진을 방치하는 습관이 때로는 장점이라고 여겼지만 장점의 시간은 짧았고 뒤이어 단점이 무대를 독차지했다. 수더분한 무대가 끝나고 나면 진이 다 빠져서 그냥 전화기를 툭, 옆으로 밀쳐놓았다. 누군가가 방황을 끝냈을 때, 누군가가 방황 중 적당히 머물 거처를 찾고 몸을 뉘일 때 나는 여전히 광야 위에 있었다.


황량한 시기에 언제든 뒤따라오던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 메타포의 일환이지만 매일 잘 곳을 꾸려야 하고, 시시각각 마실 물을 찾아야 하며 식사를 구해야 한다. 겨우 마련한 건조한 자리에 등을 대면 지친 몸이 느껴졌다. 지친 몸은 마른 침소에서 휴식을 취하겠으나 마음은 불편했고 머리는 내일 뗄 발걸음을 미리 염려했다. 누군가는 생경한 일들에 대해서 즐겁다고 했다. 나도 늘 새것을 찾고 환기할 유리창을 찾으나 찾는 과정은 불쾌 쪽으로 고개를 향한다.


그저 사람들이 만든 관념에 불과하지만 바뀐 얼굴도 몸도 무색하게 만들 만큼 더 바뀌어버린 글과 나의 정신. 그럼에도 흔들림 없이 부동층의 모임에 속한, 진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무수한 진리와 무수한 추종과 절망이 있다. 나 또한 관념을 따른다.


내가 처음이 아닐지라도 익히 알려진 관념의 커리큘럼을 따라가다 보면 만나는 진짜 포식자. 강한 자가 살아남은 것인지 살아남았기에 강한 것인지, 닭과 달걀 중 뭐가 더 우선인지. 그러나 종종 느껴왔다, 나는 첫 번째 포식자는 아니다. 하지만 가장 우아하게 먹는 이가 된다. 나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므로.


5월 28일

괜스레 울적해진 어떤 날의 모처엔 늘 타인의 행복이 있었고 곤혹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이곳은 내 자리가 아니다, 이 옷은 내 옷이 아니다. 라면서 불리해진 상황을 탓했다. 이 안경의 도수는 나에게 쾌적한 시야를 제공하기는커녕 발걸음만 꼰다.


개중에서도 호기심이 사라진 날은 정말 최악이었다. 삶의 질문들은 명확한 답을 내어주지 않고 대부분 오답을 소거했을 때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오답들의 사이에서는 교차해 골라낼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나는 맨날 분리수거만 하고 앉았는 사람으로 비추어질 따름이었다.


믿음이 없는 자의 삶을 아십니까?

너 그거 병이야, 어 맞아 병이야. 믿음이 없는 병. 그러나 이건 익히, 어련히 알만한 사실을 외면하다가 마주한 변명으로 늘어놓는 나 이제 사람 못 믿겠어, 야 걔는 못 믿을 놈이야. 이런 거랑 다르게 그냥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불신이다. 새로운 멜로디의 신곡이 아니라 아주 오래된 전통으로 내려온 음악의 변주에 가깝다.


나는 그래서 너무너무 궁금하다. 내가 이 일을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남을 도와야지. 힘없는 사람들을 지켜야지. 하는 훌륭한 대협이나 고려할법한 원동력을 가지고 삶을 이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나는 그저 더러운 꼴 보기 싫고, 아쉬운 소리 하기 싫고. 타인과 물리적, 감정적, 현실적 의지로 묶인 실을 모조리 끊어내는 것을 목표로 살 때 더 좋은 연비와 우수한 성능으로 살아가는 인간인데.


제발 아무도 날 이해 안 하고 나도 아무도 이해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게 내가 현실의 삶에 언제나 전혀 미련이 없는 이유 중에 하나다. 누구도 사랑 못하고 그나마 구상했던 나와 세상을 이롭게 할 대업을 못 이룰지라도 눈감는 순간 내 눈에는 못 탄 포르쉐가 더 아른거릴 정도로.


내 솔직한 마음이 궁금할까? 제발 궁금해하지 말았으면. 살갑게 못 지낼 것만 같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동네의 개념을 우리의 좁은 관계들에도 적용하면 된다. 우리는 왜 모여서 살까? 그리고 왜 모여서 사는 곳에는 갈등이 있을까. 그리고 모인 사람들이 어떻게 모일 수 있었을까. 수많은 구심점에는 언제나 공감이 있다. 공감능력이 결여된 이들도 모여서 살 듯하다. 서로 공감 안 한다는 것에 공감하면서. 또 그 공감을 부정하면서.


5월 20일

꼭 너랑 똑같은 사람 만나봐. 나에게 그 말은 칭찬으로 들렸다. 나랑 똑같은 사람을 만나라고? 오히려 좋아. 나는 그런 사람을 원했거든 서로 겉돌지 못하게 경계하고 당겨오는 거. 서로 수감을 자처하고 서로를 간수로 삼는 거. 식사 때도 아닌데 불쑥 가져다 내놓는 감정을 잘 손질해 먹는 거. 나는 생선을 잘 발라먹으니까.


평생에 걸쳐서 찾길 원하는 우물은 사막 한가운데 있어도 좋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산기슭에 있어도 좋았다. 나를 병들게 하지 않는 선에서 언제나 질척거리는 갈증을 뒤에 두고 나아갈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

나는 이 편지가 너에게 닿은 후 즉시 소각당했으면 좋겠어. 활활 불타고 갈갈히 찢겨서 결국에는 내가 남기려 한 마음만 너의 마음속에 남고 내가 전하려고 했던 매개는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우리가 서로 담보하는 사이로나마 남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누군가 느슨해진 나사를 조여놓으면 시간은 그 단단함을 서서히 풀어나갈 테니 먼저 발견한 서로 중의 하나가 다시 단단히 손 봐주자.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


너야말로 모르면 가만히 있어.라고 할 뻔.


5월 16일

갑자기 쉬게 된 어느 날,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어떤 일을 하면서 쉬어야 할지를 고민해야 했다. 쉬는 날에 뭘 해봐야 할지 생각하는 것 자체도 스트레스다. 꼭 해야 하는 일들이 빽빽한 어떤 한 주보다 이렇게 벙찌게 된 한 주가 어쩌면 심리적으로는 더 옥죄어진 상태를 가져다주고 있다. 해야 할 일은 많았지만 자신이 기계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능률을 위해서는 휴식의 질과 양을 조절해야 한다는 사실을 스물일곱 살의 현대인이 모른다면 그건 문제가 많다.


누워서 내일도 아니고 몇 시간 뒤면 기억도 안 날 영상들을 초점 없이, 손에는 닌텐도를 들고 지루한 게임을 한다. 나에게는 게임이 참 좋은 게 얼마 안 해도 잠이 온다. 너무 지루해서. 나의 관심사들에 새로운 것이 조달되는 시간보다 내가 새로움을 갈구하는 텀이 훨씬 짧기 때문에 언제나 지루하다.


숱하게 지나쳐간 취미라고 불렀었던 것들. 어떠면 사람들은 항상 설레는 마음을 간직할 수 있는 활동을 취미라고 부르는 걸지도. 그래서 이제는 운동이 취미라는 말은 성립 안된다. 즐겁다고만 해서 그게 취미가 될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니까. 아니면 그냥 내가 정하고 싶은 대로 정하는 탓일까!


내가 때때로 아무런 감정 없이, 때론 정말 터질 것만 같은 마음과 심장을 가지고 임했던 일들을 내가 이제 와서 취미라고 이름 붙였다. 그 일은 이제는 전과 같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혹 일어나더라도 내 손이 얼거나 내장이 뒤틀려 떨리거나 입술이 두 번 움직이는 일과 동반되지는 않을 것이다.


무슨 재미로 지내요? 지난 1년간 많이 들은 질문. 그러게요.라고 언제나 말했다.


5월 4일

슬픔은 버섯과도 같이 습한 내 몸에서 자라난다. 해야 이 그늘을 비춰다오. 부디 습윤한 저 어디까지 다 밝혀주어라. 곰팡이가 핀 나무판을 꺼냈다. 나는 적소에 있지 않은 물기였을까. 늘 자리에는 귀찮게 지워야 하는 얼룩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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