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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Jul 11. 2022

동경할 이를 찾기보다 도쿄에 가는 게 빠른 이

6월의 습기는 숙면을 몰아냈다. 다음 달도 별 다를 바 없으리.

6월 6일

친하게 지내는 일은 나빠지는 일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무던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저기 저 레고가 쏟아진 바닥을 걷더라도 큰 내색 없이 지나치겠지. 무감각은 내 시선에는 축복이나 다름없으므로.


부쩍 사람들과 어울릴 시간들이 잦아진 시기에 항상 나는 내놓고만 말들이 이미 시위를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붙잡으려는 노력을 지속했다. 평생을 걸쳐서 화살의 꽁무니를 따라가도 촉을 역전하는 일은 없을리라 생각하니 또 숙제를 만든 기분이라 유쾌하지 않다.


부담 없이, 부담 없이. 부담 없이 받아주세요, 부담 없이 사용하세요. 그 말은 너무나도 부담을 전가한다. 부담 가지지 마세요, 하지만 이 말은 성심껏 덜어내고 남은 부담을 화자에게 종속시킨다. 지배적인 화법.


말을 놓는 건 심히 어려운 일이다. '요. 습니다.입니다.'가 사라진 소통에서 우리가 잃는 것이 말의, 글줄의 길이만이 아님은 사회적 동물인 이상 매 순간 피부로 체험하는 사항이다. 매번 저울질을 해본다. 편의와 막역한 느낌이 주는 기쁨과 내가 존대를 함으로 얻는 존중을 함께 달아본다.


후진적인 어느 수산시장의 계량처럼 목적 잃은 무례와 괜한 불편함이 내가 고른 생선과 함께 대야에 담겨 실제 무게를 혼동하게 한다. 엇비슷한 관계성을 재며 우물쭈물하는 동안 미처 무게와 가격을 매길 채도 없이 이미 머리가 잘리고 배가 갈린 관계. 순식간에 손에 들린 횟감에 망연자실한 내가 남았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잔뜩 포장된 이 활어회가 다시 활어가 되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6월 9일

이미 가진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가진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지 않는다. 사자가 노루를 잡아먹는 본성에 감사하지 않으며 노루가 풀을 뜯는 일에 아무런 감정을 대입하지 않음과 같다.


누구나 결론에 도달하고 그 결론은 이를테면 페트병 라벨을 뜯어서 버리는 일 같은 거. 행동은 많은 생각을 설명한다. 그래서인지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반경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데 난 익숙함이 그 무감각의 원천이 아닐까 하고 언제나 체화를 부르짖었다. 더는 칼로 연필 깎는 일이 번거롭지 않고 토련하지 않은 흙으론 물레차는 일이 없는 것과 같으리.


내가 목도한 결론은 누구의 결론인가? 애초에 내가 직접 걸어 그 자리까지 갔는지도 확신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구나 도달할 결론은 행동으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난 생각은 익숙함의 산물. 그리고 무감각이 결론을 지지한다니.


첫, 첫 첫. 맞다. 처음이 붙어서 당위성이 생기는 것들에는 결론을 짓기 어려웠지. 날짜가 밀린 글을 퇴고하는 시간에야 할 얘기가 생겼다. 깔끔히 매듭지어진 처음에 대한 완결된 이야기는 구구절절한 수식어나 앉았던 자리들을 하나하나 훑어가며 작디작은 사랑의 증거를 모아놓았던 박물관의 기둥을 부수고 허물었다. 이제는 무감각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론을 낼 것이다.


노루를 잡아먹는 일도 풀을 뜯는 일도 전부 지루한 일일 뿐이다. 정신이 요구하는 도파민 양은 갈수록 늘어가고 자극은 무뎌졌다. 내가 가장 크게 느끼는 변화는 기억력의 감퇴인데 기억나지 말아야 할 것은 새치기를 해서 선수를 잡고 무지하게 이 마음을 옥죈다. 기억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지만 단편적인 감정들이 저렴한 짜장면의 고기처럼 종종 튀어나올 뿐이었다. 늘 이야기했듯이 난 소확행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6월 14일, 15일

무례에는 무례로 응수한다. 나는 군대도 아니고 전략이나 체제를 갖춘 집단도 아니지만 언제부터인지 매뉴얼에는 그렇게 적혀있다.


본인이 호불호가 강한 사람인지. 상대방에게 불쾌감이나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를 늘 점검하는 조건이 현대의 문명인에게는 꼭, 까지는 아니지만 웬만해서는 가져야 하는 덕으로 여겨지고 있지 않겠나.


6월 16일

이런 삶이 왜 괴로운 줄 아실까. 순수한 상대의 성의와 기꺼운 마음도 의심하고 매도하게 되는 일이 호흡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즐거운 풍경과 창작을 바라봐도. 그리고 받아 든 수많은 마음과 선물들이 모두 진실이 아닌 별안간 뒤집어질 동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니 생각만 하면 기분이 안 좋아져. 이유가 다른데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나는 분명 햄버거를 시켰는데 된장찌개가 나온 거랑 비슷한 정도의 당황스러움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크게 동요하지 않고 적게 느끼고 적게 받아들이며 항상 비슷한 온도로. 웬만하면 냉장실의 그 온도 정도가 좋겠다. 얼린 마음들을 품에 안고 녹이는 노력도 너한테는 사치스러운 소비다. 근데도 그냥 문을 열고 뚜껑을 따 꿀꺽 삼키고 나면 역할이 끝나는 일임을 알면서도 나는 굉장히 받아들이기가 어렵더라고.


얻을 자격이 있다면 얻으리라. 거짓이 없다고 생각하며 지내고 따라서 적소에 가서 알맞은 주문을 했는데도 나는 내 뜻과는 다른 결론을 받들어야만 하는 현실의 괴리에서 늘 고뇌한다. 어떠한 분리에서도 내가 그 버튼을 누르게 한 가장 큰 퍼센티지의 이유가 아니었던가. 내가 당위성을 부여하고 살아가던 것들이 고압적인 태도에 의해서 이내 풀이 죽어서는 기세를 꺾던 모습 때문이 아니었던가.


잘만 먹다 바닥에 굴린 사탕처럼 나는 다시 입에 넣을 생각도 못한 채 주워버렸는지 개미들에게 든든하게 넘겨주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아니면 정말 너무나 터무니가 없어서 내가 선택적으로 직접 폐기했는지.


6월 17일

나는 뭐에 쫓기고 있나. 가난? 아니다. 가난은 내가 쓸 단어가 아니다. 빛바랜 가난일지라도 나는 쉽사리 그 말을 나에게 이식하기 어려웠다. 내가 겪은 일들은 가짜가 아니었으나 늘 이야기하는 1등 그룹의 꼴찌와 꼴찌 그룹의 1등이 만들어놓은 공터에서 서성인다.


누군가의 기쁨으로 삶을 사는데 가치를 두고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이 부럽다. 나도 반려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생기면 그런 목적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상황적인 제약이 그 기한을 계속해서 뒤로 미루고 있지만 내가 기대하는 몇 안 되는 상황 중의 하나니까 나는 그날을 고대할 수밖에. 순수한 감정을 원했으니까. 내일 일정이 걱정되는 평일 밤의 즐거운 이벤트 말고, 시험 전날 우연히 본 뉴스 말고.


알아주는 이가 있으면 외롭지 않으리. 우리가 기피하게 된 모든 것들이 애초에 알아줄 이가 없는 가치에 관한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기피하게 된 거. 떠오르는 것만 해도 그랬다. 스스로의 가치를 긁어냈던 것들. 다시 깔끔하게 표면을 다듬으려면 굵은 사포를 가져와서 괜한 노력을 해야 했던 일들이 아닌가. 내가 낯선 곳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가지고 지낸 이유를 생각해보면 들어맞는다.


우리는 눈을 가리고 나서야 진정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네. 맞다, 외모 안 본다는 거 다 구라야 두 눈 다 달렸는데 어떻게.라는 말보다는 앞으론 저렇게 말해야겠다.


6월 18일

이건 명백한 나의 능력 부족이요 패배다. 혹은 컵에 담는 순서가 뒤섞여 최대한 꽉꽉 눌러 담지 못한 탓이다. 모래 위에 자갈, 자갈 사이 모래.


실력은 비탈처럼 느는 게 아니라 계단처럼 느는 거라는데. 계단처럼 느는 실력. 비탈길이 아니다. 오르막길이 아니다. 무릎을 한껏 올려도 오를 수 없는 높이의 계단은 수 없이 있지 않았나.


6월 24일

그 마음은 바이러스처럼 강한 전파력을 가지고 퍼져나간다. 이제는 누가 숙주였는지 알 수도 없는 마음들. 병원체를 남에게 넘기고 나도 자리를 뜬다. 넘겼다고 해서 그게 나에게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목격한 즉시 도망치는  생존이 보내는 반사적인 신호이자 좋지 않은 일들의 조짐을  순간이라도 일찍 알아채려는 통찰의 영역 같은데 이게 제대로 작동하는 경우가 드물다. 때로는 쌍꺼풀이 발목을 붙잡고 뜬금없이 펜디 백이 붙잡기도 했다. 나는 이상하리만치 본인이랑  어울리는 생김새나 옷차림을  사람에게서는 위험감지를 하고 도망가기가 어렵단말이지.


그러나 나는 예방차원에서라도 손을 씻어야 했다.  이렇게 붙잡고 있다가는  숨통이 먼저 끊어질 판이었다. 하지만 더러운 손은 즐겁다. 세면대 앞의 다양한 질병을 예방하는  씻기 방법을 철저히 지키고 손도 드라이어에 꼼꼼히 말려봤자 일순간일 뿐이고 우리는 더러움을 견디고 더러움을 즐기며 잊는다. 어차피 내가 지금 기껏 놓은  다른 이의 손에 의해 다시 내 손에 붙들릴 것이다. 주인이 다를  눈꼬리는 누구나 늘려 그릴  있고 풀어헤친 머리카락 또한 언제든 유행하는 머리끈으로 묶을  있으니까.


6월 26일

공예에 대해서 우리가 조금  이해했더라면 우리 관계는  쉬웠을 거야. 버려지는 것들에겐 미련을 가지지 않거든. 결국엔 남아있는 것들이 너무 아름다워 기억나지 않을 테니까.


미감에는 사람들마다 차이가 있지만 이것이 정수인지, 다듬어지고 다듬어지고 또 다듬어진 시간의 산물인지 알 수도 없다면 애초에 사랑하지 못할 것이니. 이해도가 아예 없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도무지 견딜 수 없다. 남이 버린 걸 못 버리는 내 성품도, 내가 버린 것들을 굳이 굳이 주워 가지고 간 너희들도.


6월 27일

긴장을 완화하는 방법. 팔과 다리의 관절이 스르르 녹아서  사지가 문어발처럼 유연해진 후에야 나는 식탁을 치울  있었다. 식사 직후에 식기를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는 일이 때로 품을 들여 만든 포트폴리오의 작품  점에 들어간 노력보다  어렵게 느껴지곤 한다.


너무 고양된 기분이  때를 조심해야 한다. 소강을 겪고 나서야 올바른 판단이 가능할 테고 우린 올바른 판단에 대한 가부차가워진 이성에 맺힌 성에를 기준으로 삼자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누구랑 약속했냐면 내가 결정하고 실행했었던 모든 감정적 판단들의 결과물들과. 그들은 약속 후에 즉시 사장되었으나  또한 대들과 얼굴을 붉히고 망각을 위한 소모적인 잊기 챌린지를 해야 했다.


6월 29일

사실 나는 종합적인 바보가 되어버렸다. 다시는 업데이트 없는 기종이 되어서 이제 어제까지의 내가, 혹은  시간 전까지의 나로 잠재적 가치의 갱신은 끝나버린  아닌가 해서. 모든  지난 중고도 신제품일 때가 있었고 그들 또한 적극적인 프로모션을 받으며 대문짝만  제품 사진이 걸린 포스터를 상점 곳곳에 나붙였을 때가 있을 테다.  


사실 나도  마음을  모른다. 좋았다가 싫었다가 하는 이런  단순하고 일시적인 변덕이라고 부르는지 아니면 쉽게 질리고 싫증 내는 성격이나 성품이라고 부르는지 누가  대신에  알아서 판단을 내려준다면 좋겠다. 그러나 누가 나를 알고, 내가 누굴 알겠는가. 설령  껍데기 안이 의미로 가득  있더라도 나는 일평생을 껍데기만을 맛보다 '더럽게 맛없는 당신.'이라는 이명을 달아놓곤 맛없어도 음미하는 미식가라고 착각하며 살겠지.


가장 강한 방부제는 다름 아닌 생명이다. 네가 잡혀 죽어 누군가의 먹이가 되기 전까지 살아있는 이유는 생명이라는 방부제가 소화액에 담기기 전까지 나를 부패하지 않게 살려둘 따름이기 때문이다. 비로소  목덜미에 날카로운 이빨이 들이밀어진 때가 오고 나서야 나는 그저 넓디넓은 냉장고에서 유유히 떠돌던   식사였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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