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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May 01. 2022

내 입 안의 상처가 나서 아픈걸 누가 알리오 올리오

추울 때의 글이랑 반팔과 긴팔 옷이 공존하는 4월 27일

누구도 알지 못했다! 옷가지로 숨기고 향수를 뿌리고 분을 칠하고 해도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천성을 버리는 법. 문득 다진 마늘이 "다짐 마 늘, 똑같잖아"라고 말하는 거 같았다. 우리도 저 으깨진 마늘처럼 칼등으로 쾅쾅 쳐서 다져지면 어떨까? 누군가의 도마에 착 달라붙은 채로 말이다.

 

대부분 우리 삶은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살아가는 시간 전반에 걸쳐서 느낄  있도록 설계된  같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사람  바뀌어 라는 말은 외국인에게 숙어로 외우게 시켜야  정도의 구문 아닐까? 뜻은 사람은 절대 바뀌지 않지만 잘이라는 수식어를 붙어서 혹시나 다음번에 내가 사람을 믿고 싶어 지는 나날에 , 얘는 달라. 하고 말할  있을 예외와 여지를 남겨두는 .

내가 이 말에 무게를 무거이 느끼는 이유는 매번 사람은 다르지만 상황은 대개 똑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위해서 버렸고 누군가는 남을 위해서 버렸다. 버려진 주체가 되기도 혹은 버려진 객체가 되기도 해 봤지만 하는 입장이나 받는 입장이나 살아있는 이상 유쾌한 일은 절대 아니다.


분류를 어떻게 해야 하나? 먹는 행위, 식사는 나에게 영양이라 분류되었고 누군가에게는 스트레스 해소, 접하기 어려운 것. 또는 진짜 순수하게 즐거움을 느낄지도. 이것도 설계의 일부인가? 자주 씻고 매일 먹고 밤에 자고. 행복으로 가는 길이 몸에 새겨져 있다. 밥 한 번 먹어요! 맨날 먹으니까 가장 쉬운 인사치레가 중히 여기는 것들을 잔뜩 담은 선물 보따리일 줄이야.


명확히 알 수 있는 일들이 적으니 나는 추측을 하고 선택지를 만들고 취사 결정을 매번 겪어야만 한다. 그럴지도, 그런 건가? 어떻게 된 걸까 하는 질문들이 글에 즐비해서인지 나와 비슷한 사고방식의 사람이 아니라면 정말 난잡한 글이겠구나 싶었다. 비문의 연속에 피로도는 높아지고 탈진한 채로 탈피를 겪으면 어제는 이해의 수준이 내일 정도. 남은 말 그대로 남일뿐이다


풍미, 삶의 풍미! 가장 아름다운 맛과 향은 성취에 있다. 혀에 닿기도 전에 맛없다 느낄법한 삶을 살 수는 없다. 1 life 2 live. 그 말은 너무나도 사실이다. 무미한 느낌이 들 때면 서둘러 팬트리를 열어 닥치는 대로 조미료를 들이부었다. 여기저기 흩뿌려진 맛들이 때로는 고약하기도 했지만 맛이 사라진 시간들보다는 즐거움이 있다. 단조로움을 삼켜야 하는 날들에 심히 괴로웠지만 퍽퍽한 닭가슴살에는 단백질 함량이 높다고 생각하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리 생각하면 단조로움에서는 담백함이 느껴지곤 했다.


짐볼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로웠던 정신은 나의 일을 시작하자 그 허우적대던 팔 동작을 거두었다. 하루 단위로 가던 시간은 그 규칙성을 주 단위로 옮겨두었고 그게 개월 단위로 넘어가게 두지는 않을 심상으로 이제는 그 분출을 손과 발로 틀어막고 함께 움직여 간다. 나는 신경 써야 하는 용출이 많고, 그만큼 걸음은 느리다. 담백함, 담백함. 이건 지루하지 않다며 암시를 수도 없이 해야 했다.


어떻게 하면 더 기민하게 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수많은 갤러리들을 떼어놓을 수 있을까. 고독에서 단 맛을 찾으면 되지 않을까 싶어 유심히 아주 유심히 들여다보고 맛을 찾아내려고 노력 중. 하지만 이내 퍽퍽하고 목 막히는 질감이 씹힌다.


애초에 누가 숨겨두려고 했던 일들을 찾아내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일까? 차차 알게 될 것들을 미리 알아버린 삶의 재미가 얼마나 반감되는지 누군가의 무료함이 구구절절 설명했지만 스포일러가 극의 재미를 꺾을 때를 생각했을 때가 훨씬 더 와닿았다.


너와 내가 진정으로 친밀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단어 곳곳에 숨은 저의도 의뭉스러운 의중도 눈감아주고 간식을 숨긴 개처럼 내 마당을 뒤집어놓을 일도 없을 텐데.

관계를 지지함에 있어서 내가 세운 기둥에는 계속해서 누수가 있다. 욕망들이 충돌한다! 바라는 점이 서로에게 많은 우리! 종착지에 다다르면 행복이 있지는 않을 테다.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던 어느 날에 나는 이대로는 안된다. 멀리멀리 도망치자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유가 있어야 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어야 했다. 내가  사람이랑 다툰 데는 말할  없을 만큼 하찮고 질한 이유가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마음속에  새겨 놓았다. 이런 이유로는 다시는 남과 다투지 않겠다. 나는 배포가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으며 꾹꾹 눌러서 애써  써놓은 글씨도 정신 차려보면 발길에 차이고 밟혀 더러워져있었다. 결심이란 애지중지하다가 울컥 허무하게 바닥에 굴리고 먼지가 묻은 채로 발견돼야  맛이지 .


나는 친구가 적다. 친구가 많이 없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본래도 친구가 적었다. 그냥 아는 사람이 적었다. 그냥 자질구레한 이유를 생각해 본 적도 있다. 아, 내가 술을 하지 않아서 사람들과 폭넓은 관계를 가지지 못했나? 내가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 흡연을 한다면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은 상대적인 마이너스가 된다는 것을 종종 느끼기도 했었구나.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내 감정이 입장하려는 이들까지 밀어낸 것은 아닐까? 눈물이 고이는 새벽이 오면 누군가에게 훌훌 이 마음을 털어내고. 그 이도 이 마음의 모양을 알아챈 후에는 서로 아쉬울 것 없이 지나치는 시간을 만드는 게 나에게는 참 어렵다.


생일 메시지 하나를 보내면서도 나는 퇴고를 반복하고 생각을 어금니로 뭉게 씹었다. 이런 날에는 강제로 잠들게 하는 어떤 날이 그리웠다.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면 괜스레 울고 싶어 진다. 나약한 나를 아닌 척하는 나에게 들킨 것만 같아서 괜히 눈치가 보인다. 눈치 하니 눈이 하늘을 채워 거의 흰 세상이 되어가던 어린 나의 어느 날에 동네 형들과 눈싸움을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은 꼭 세상에 그 형들과 나만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빗물을 튀기며 초등학교 도서실 옆 골목에서 놀던 것도 생각났다. 빗물 웅덩이 위를 발로 구르고 우산으로 흐트러버렸다. 놀이가 끝나고 우리는 학교 화장실 핸드드라이어로 몸을 말렸다. 지금의 내가 상상해 바라보면 퍽 귀여운 모습으로 보인다.


나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단어 하나를 쓰면서도 눈치를 보고. 문장에 오해가 있을까 솔직히 말하는 법을 체면치레로 덧칠했다. 관계의 거리감을 보다  느낀 순간부터 나는 겁이 많아졌다. 이렇게 말하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저렇게 말하면 저렇게 오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질문들은 배려가 깊어진 것이라고 애써 생각하려 했지만 그냥 잔뜩 아버린 모습이라는 걸 나는 모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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