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도 속이는 미친 메소드 연기자
2024년 가을의 나로부터, 이미 수거된 후 처리까지 끝난 마대자루들을 떠올리며.
9월
만듦새가 심히 조악하다. 마치 내가 그들에게 보여준 액팅이나 마음처럼.
좋은 재료들로 쓰레기를 만드는 것도 능력이라는 생각을 어두운 수면 아래서 떠올렸다. 무소유를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처럼 무능력함을 발굴해 소유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내가 받은 것들은 사실 값지고 귀한 것인데 내가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해서 제대로 된 결과를 내지 못한 것은 아니었나 하고 돌이켜 생각해 본다.
나를 중심으로 모인 어려움들이 나의 잘못이고 나의 과오라고 오만한 스스로는 생각하지 않을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더 나은 선택지와 더 나은 결과물이 있었을 거라는 염두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해석이 상품이다. 잘 알 수 없는 병을 해석해 주고 복잡한 기계를 설명해 주는 사람은 적으니까 수익이 높다. 상품성이 있는 해석을 하고 싶기에 곡해가 두렵다.
궤적을 그리며 맞지 않는 해석을 긁어모아 나에게 닿는다. 선별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제때 선별을 하지 않은 해석들은 기괴하게 변형되어 음식 위에 핀 곰팡이처럼 상해 간다.
나는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혹자에게 다 들통나고 맵시 있게 보이지도 않았던 치장들을 생각하면 낯이 화끈해진다.
그들의 눈에 어떤 해석본과 필터가 씌워졌는지는 모르지만 가을이라고 불리는 9월의 초에 심히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든다.
•
나는 나를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밀물과 썰물의 인간.
물이던 뻘이던 잘못 빠지면 죽기 마련이다. 내가 발을 붙이고 서 있을 수 있는 단단한 땅이 있어 다행이다.
빨려 들어가 죽어버릴 위험이 있지 않아서 다행이다.
물리적 안전함을 뒤로하며 나는 나를 조수간만의 차를 가진 인간으로 명명하기로 했지 않은가. 물이 파문을 일으키며 빠져나가고, 울렁대며 다시 들어차는 시간.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마음속의 밀물과 썰물의 시간을 재며 오늘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했다. 오늘은 기분이 분명히 좋을 것이니 밀린 작업을 꾸역꾸역 해야 한다.
별안간 내가 이부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시적 생매장을 당할지 모르니까 제 발로 걸어서 움직일 수 있을 때 나아가야 한다.
전략을 어떠한 외부 요인에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의 행동양식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피곤한 사실만이 남았다.
내일은 기분이 좋을 거야, 내일은 기분이 더럽고 몸이 안 따라줄 거야. 다음 주를, 다음 달을 담보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이냐면,
•
욕망이 충돌한다. 하나는 부서지고 하나가 파편을 꿰뚫고 지나간다. 혹은 양쪽 다 파손을 면하지 못한다.
온전하게 자리를 박차고 다시 일어선 욕망의 눈 속에는 불꽃이 있다. 강렬하게 일렁이는 불이 있다.
부딪히는 정신이 꼭 쌍방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충돌은 필히 잔해를 남긴다.
부스러기, 크다면 조각. 더 크다면 파편을 남긴다. 온전한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수도.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할 수도. 결정권은 나에게 없지만 난 짐작하지 못할 만큼의 산산한 분해를 원해 빠르게 움직였다.
다툼과 투쟁의 에너지조차 잃고 0에 도달하는 일.
그것이 결말인가? 이해되지 않는 자들과의 얄궂은 마찰들이 결국 마모를 일으킨 것인가?
•
나는 가본 적도 없는 집을 여전히 찾아간다. 햇살이 잘 드는 집, 층계참 위에 현관이 위치해 있는 집.
추위를 느끼며 찾아가면 희한하게도 그 집 앞 대로는 굉장히 넓은 여러 개의 차선이 있다. 횡단보도는 없다. 나는 건너다가 치여 죽어도 이상할 것도 탓할 이도 없겠구나 싶은 마음으로 큰길을 건넌다.
오늘은 어디까지 닿으려나. 네 집 안을 상상해 본 적은 없다.
칫솔을 몇 개째 버리는지. 아마도 나무젓가락 이상으로 칫솔도 일회용으로 많이 쓰이는 용품이겠지 싶다. 버린 칫솔의 색은 잊는다. 쉽게 쓰이고 버려진다는 사실이라도 인지하면 다행일까, 양치와 깨끗한 이가 사라진 칫솔보다 훨씬 중하니까.
•
집착이나 역할놀이가 아니라 진짜 롤을 원했다. 난 일시적인 파트타임의 일을 받아낸 그들이 맡은 바 소임을 다 하고 폐기되는 모습을 보는 일이 잦았다.
이 시간과 상황들이 나를 낭비하고 소모하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임시방편의 일들이 될 것이라 확신하지만
미봉책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2024년도 여름의 도구들은 역할을 잘해주었다. 기억이 안 난다. 손을 털고, 내다 버리고 나서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은 포장을 두르고 있던 실질적 내용물 자체는 스스로의 역할을 잘하고 사라졌다는 뜻이라고 넘겨짚고 잊었다.
10월
얼음과 같이. 흙이 묻어도 물로 씻어내면 둥글어지는 얼음과 같이, 냉기를 전하고 외부열에 버티다가 결국에는 사라지고 싶은 마음뿐이다.
일전에 요긴하게 사용했던 것들과 같다. 제 아무리 꽁꽁 언 얼음일지라도 역할은 냉매일 뿐이었다.
녹아서 사라지기를 바라지 않았지만, 내가 차게 하고자 했던 주체가 재빨리 차가워지기를 바랐다. 아다르고 어다른 말과 표현법들이 피로도를 쌓는다.
•
사랑이 휴대전화에 난 흠집이랑 비슷하다고 느꼈다. 언제 어디서 났는지는 모르지만 났을 때는 슬프고 그래서.
액정이 박살 난 정도 아니면 언제 떨어뜨렸는지도 모르는 게 내 물건에 대한 편안함이기도 하니까.
바보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자 그냥 기분을 넘어 진짜 생각이 없어지는 통나무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 기준을 무의식이 세운 지는 알 길이 없으나 정작 지워야 할 생각은 죄다 빠트린 게 큰 문제였다.
비가 아주 많이 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재빨리 추위를 몰고 왔으면 좋겠다.
알아서 이루어지는 계절의 흐름이겠지만 나는 정말 바라고 있다.
이 가을의 날이 어서 지나고,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쏟아버리는 비가 적시고 말려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을 데려왔으면 좋겠다.
미처 마르지 못한 곳이 물을 머금어 얼어붙고, 녹는 과정에서 강력한 파손을 겪었으면 좋겠다. 저항할 수 없는 것들로 털어내어 지길 바라는 마음에 추위를 갈망하게 되는 선선함의 시간.
나는 아직도 이 잠옷을 입는다. 여전히 이 타코를 먹고. 그 캐릭터를 귀여워한다. 여전히 이 길을 돌아 집으로 간다.
•
우리는 어떻게 낭만을 유지하며 살 수 있을 것인가?
이제 자신이 없는 단계에 도달했다. 낭만이라는 것은 무언가를 포기하고 향유할 의미 있는 것으로 나 스스로에게는 사료된다.
불편을 감수하고 어떠한 과정을 뛰어넘는 돌발적이고 비일상적인 행위가 낭만이 된 오늘엔 보편적인 삶 내부에서 낭만을 찾기란 사뭇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삶 자체를 낭만으로 꾸려가는 사람은 아마도 내 눈에 굉장한 괴짜로 보일 것 같다.
괴짜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마치 괴짜의 어감 내부에는 유쾌하거나 경쾌한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낭만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내면에 간직한 그런 쾌의 개념에 내가 접근할 수 없으나 적어도 그 마음을 읽은 후엔 더욱 이해하고 존중하고 인지해 출력해 줄 수 있을 정도의 재량이 길러지지 않을까 싶어서.
•
우선시하던 가치는 모두 사라진채로 덩그러니,
지속할 수 없는 것은 하지 않는다. 새로운 지침이었다.
박탈감이 나를 설명했다. 투영하고 투사하고. 끝내 잃어버리면 박탈감이 비대했던 처분대상을 대신해서 찾아왔다.
노역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가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채워진 시간들의 밀도, 그 켜켜함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같은 시간들이었을 텐데. 이해도가 다른 각각을 보면 선택과 집중은 어디에든 작용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11월
오히려 집에 가만히 누워있을 때보다 외출해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오히려 삶이 꺼져간다는 생각이 더 강렬하게 든다. 단말마를 남기고 푱하고 사라지는 것이 소망이다.
비교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은 그저 생각일 뿐이었다.
나는 사소한 모든 것들에 비교군을 세운다. 웬만해서 그것들은 나의 주변이고 나는 그 대기를 벗어날 연료와 추진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침에 버스 타고 나가는 길에는 꽤 괜찮은가 싶다가도 작업을 하는 도중에 불쑥, 아니면 은근하게 나의 주위를 도는 모기와 같이 찾아온다
나마저 그럭저럭 지낸다는 사실이 나의 현실을 비참하게 만든다.
문명이 있기 전의 이별은 어떤 유형의 사망이나 사별과 같았을 텐데 참 첨단이라는 것이 날카롭고 얄궂다.
넓고 촘촘한 갈퀴처럼 정보를 긁어 인식하는 스스로가 어떤 정제나 채용을 거치지 못하고 받아들여 고통받는 시간이 매우 길다.
자동차들이 정체되어 있는 도로 위는 퍽 괴롭고 안달 나는 일이다.
내가 올라탄 수단을 버리고 도망치기. 그쯤이 내가 낼 수 있는 단말마이자 한 달음 정도의 추진력인 것 같다.
•
자기표현이 줄었다.
일주일에 한 번 가서 하는 상담은 유일하게 마음을 꺼낼 수 있는 시간이다.
책도 읽지 않고 글도 쓰지 않는 것은 주목해 개선해야 하는 일인 것인데 눈길을 주는 것조차 쉽지 않다.
압도적인 차이를 느낀다. 실패가 눈에 선해 지레 포기한 일들이 나를 찾아온다.
연기와 허기. 11월의 끝자락에 있던 상담에서 얻은 단서이다.
강도라도 해서 얻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굶주림과 허기라는 단서를 얻었고, 과한 나의 포장용 언어에서 의도적인 액팅을 발견했다.
액팅을 한다는 것을 난 여실히 느꼈다. 스스로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우물 밖을 나가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나는 이제는 나의 일상이 된 집과 학교 그리고 헬스장을 벗어나 본가로 향했다.
고단한 어느 토요일. 학과의 행사를 위해서 실기실을 청소하고 나서 결착 지어야 하는 일들을 위해서 이동하는 버스에서 나는 깊은 잠에 빠져서 내려야 하는 정류장을 한참 지나쳐서 깨어나 내리게 됐다.
아예 생경한 곳은 아닌지라 금세 주위를 둘러보고 반대방향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잡아탔다. 그리고 장소와 환경에 맞는 역할과 탈을 찾아서 뒤집어썼다.
처세라고 불러야 할까. 가장 편해야 할 곳에서도 면피를 자처하고 민감히 신경 써야 한다는 사실이 우울했다. 어른이란 어떤 척하는 인면탈인가?
이제는 역경을 지나 어떤 모델의 행복을 찾은 나를 제한 가족들의 사이에 나는 생뚱맞은 것이라고 느낀 지 꽤나 오래됐기 때문이다.
웃고, 대답했다. 진심은 숨기고.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려고 했다. 내가 진실하게 말하는 일은 대외적으로 좋은 결과를 불러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객기가 사라진 나이의 어떤 날들부터는 진짜 마음은 숨기고 보기 좋게 덧칠한 마음을 전했다.
그것은 잘 발라 얹은 유화도, 잘 풀어낸 수채화도 아닌 내면은 변하지 않은 그저 어설픈 전달이었지만 누가 알겠는가. 다만 나는 알았다. 나만 나의 가식에 역함을 느꼈다. 내가 느낀 역함은 사회적으로는 모범적 규범에 가까웠으니까 그럴싸하게 보였으니 감수하고 참아야 한다고 다독였다.
소속감이 나를 살게 한다고 생각했던 시기도 있었다. 늘 속해있는 삶은 안정감을 주었고 사람들이 커뮤니티를 지향하는 이유를 격하게 공감했다.
어떠한 예비단계가 진행되고 있었기에 소속감이나 진정 소속이 없던 상태.
그 상태를 견디지 못해서 누군가에게라도 소중한 사람, 귀중한 인물이기를. 강한 효능감을 바랐지만 내가 원하는 이에게 내가 원하는 만큼의 사랑을 요구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었다. 서로가 바라는 모습도 아니었다.
실제로 소속이 생긴 날들에도 습관이 무서운 것인지 나는 본래 그런 사람인 것인지 안정적 관계를 이루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상승 욕구에 의한 행위들이 가져온 그때그때의 삶엔 너무나 배워야 할 것이 많았다.
쥐어짜 낸 완력이나 정신력으로는 난관과 자주 맞서야 했다. 생기와 기대보다는 패배감이나 허탈함, 무력감이 나를 감쌌다. 전달받은 해석엔 그것이 그만두고 싶은 마음보다는 리셋하고자 하는 것에 가깝다고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직 협력행위의 중단이 남은 사람들에게 가져오게 될 여파에 대해서 걱정하니까.
어떠한 형태의 매듭보다는 새로운 끈을 원하는 것은 아닐까?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나는 자기 개발서나 메타적으로 옳은 말들을 설파하는 이들에 대해서 늘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남의 믿음과 신앙을 훼손하는 무례한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의 삶에서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어서.
내 고민이 누군가에겐 선망하는 삶이고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 무의식을 넘어 체화되고 고착화된 라이프스타일이나 행동들에 대한 나의 태도가 누군가에게는 기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고민이나 낙담한 마음을 꺼내드는 손이 떨린다.
•
글을 퇴고하고 고치는데 세 번의 계절이 걸렸다. 이제는 공감하기 어려운 문장을 다시 조립해 봤다.
변색이 돌아오고 시선은 조정됐다. 여전히 비옥해지지 않은 토양을 바라본다. 무엇을 심을까, 이전의 씨앗과 모종을 다 가져다 버린 후 할 수 있는 긍정적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