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묵지는 나의 힘. 암 묵지빠 암묵지 빠

재미있는 사진을 썸네일로 쓰고 싶었는데 여긴 도저히 그럴 수 없어서

by 글헌

2024년 겨울의 나로부터, 아직 미처 채우지 못한 자루를 손에 쥐고.

11월

“내 티셔츠 색이 좀 변한 것 같아.”

며칠 후에 온 너의 말이었다.


묘하게 변한 흰 티의 색을 알아차린 이는 이제 없다. 줄무늬 바지도 변색된 티셔츠도 모두 옷장 깊숙한 곳에 처박혔다. 적어도 언젠가의 너는 이 집의 분위기가 편해 기꺼이 홈웨어를 가져왔던 걸지도 모르겠다.


괜찮아지는 게 참 오래 걸린다. 아픈 날에 이불을 잔뜩 덮고 전화기로 겨우겨우 주문해 받은 죽처럼. 몇 술 뜨지도 못하고 꾸역꾸역 타온 약을 주워 삼키고 다시 누워버리는 그런 날처럼.


어떤 날은 괜찮고 어떤 날은 너무 괜찮지 않다. 어린이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귀갓길을 걸을 때의 기분을 복기해 본다. 더 이전의, 더 더 이전의 날을 겨우 파헤쳐서 떠올려본다


쓴 기억이 떠오른다. 그날은 어쩐지 외투를 엄청 껴입었는데도 추웠다. 한겨울의 버스라지만 어찌 이렇게 추울 수가 있지? 싶을 정도로 시렸다.

목덜미가 붉어지든말든 뛰어 도착한 곳에서 있던 일들을 겨우 찾아내 곱씹었다.

그제야 생각났다. 나는 이런 추위와 이런 남루한 기분에서 벗어나고자 했었는데. 돌고 돌아 또 추위와 쓴맛의 나날로 돌아왔구나.


12월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삶.


매주 이루어지는 상담에서 요새 주를 이루고 있는 이야기는 다른 것이 아니라 솔직한 마음을 꺼내서 내놓기.라는 간결하고도 쉬운 내용이다.


누구에게는 솔직하게 말하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수도 있구나. 수업이 끝나고 나면 선생님에게도 돌려 말하고 숨겨 말하고 눈치채고 알아주길 바라며 말했던 내 모습들이 떠오른다.


내가 그런 식으로 돌려 말하거나 미루어 말하면 선생님은 솔직하게 말해보라며 다시 한번 짚어주신다. 그러면 나는 그제야 여기저기로 뻗어나가고 있던 생각과 말을 다시 품으로 되감아 하려던 말을 할 수 있다.


바라던 친구가 생겨도, 실재하는 위로를 주는 사람이 나타나도 전혀 기쁘지 않다. 기쁘지 않다는 마음을 숨기기 위해서는 또 새로운 액팅을 생각해내야 했다.

그들의 애정에 호응하고 그들의 호의를 감사히 받고 나면 나 또한 그들의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마치 비상시나 유사시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는 물건들처럼 내 생각은 캐비닛이나 유리상자 속에 들어갔다. 꺼내어 쓰고 위급시 깨뜨려 내용물을 사용할 유사시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27인치 맥의 광활한 화면과 어릴 적부터 이어져온 나의 작은 글씨에 대한 선호와 설정은 이 네모 안에 상당히 많은 것을 담게 해 준다.

플랫폼과 시스템이 가져다주는 힘은 이런 곳에 있다. 타이핑 몇 번으로 바로 안정적인 감정의 출력을 글로서 해낼 수 있는 것.


오늘은 여러모로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친구들과 공간을 벗어나 이야기했고 나를 위한 일들을 했다. 묘하게 다시금 외로운 기분이 찾아올 것 같았지만 그럴 때는 내 눈앞에 놓인 분리수거나 설거지, 혹은 락스로 닦을 수 있는 곳들을 닦고 청소했다.


여름 이후 하는 모든 일에 묘한 기시감이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누군가의 삶의 복제본을 내가 열심히 만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이 하는 일들은 대부분 좋아 보였다. 이미 좋은 상태로 태어난 이의 어떤 것들을 따라 하는 것은 뒤서가는 삶을 타고난 자의 운명 같은 것일까?

나를 끌어당기고 앞서 달려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맞는지. 실제로 그 이는 나를 앞질러가고 있기에 그 뒤꿈치나 등을 보고 나는 대략, 어림짐작으로 그를 따라 하고 있다.


콘텐츠로서는 최고인 인간. 새 사람에게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고 그 사람 또한 내가 말하는 것들이 새롭고 신선하겠지 싶다.

마트에서 사 온 바나나가 검게 변하고 물러지고 썩어가는 것보다 더 빠르게 새로운 사람들에게 질려버릴 때도 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질리는 부분이 있어도 가져다주는 베네핏이 있다면 웃고, 공감하고 반짝이는 이야기를 내놓을 뿐이다.

이제는 내가 쓰는 글, 내가 행하는 행동양식 등이 모조리 가식이나 연극처럼 느껴지는 수준이다.


왜 경력이 중요하냐, 나는 그것을 위로를 받으며 느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경력이 부족해 생긴 슬픔으로 인한 위로를 받으며 중요성을 느꼈다는 말로 해석될 여지가 있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좀 다르다.


나를 사랑해 주고 지지해 주는 친구와 가족들이 있다. 부쩍 자주 생각하고 이야기하게 되는 심리 설문지에 대한 이야기. 대충 첫 문장과 비슷한 내용의 질문도 있다. 지지해 주고, 사랑해 주고. 내 편이 되어주고.


최근에 이루어진 상담의 주요 내용도 그랬다. 내 편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생긴 역설들이 내 주위를 이루고 있다.

말을 빙빙 돌려서 하는 것도, 물음표로 대화를 채우는 것도 역설적이지만 전부 다 무언가를 가리거나 숨기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태도였다.

많은 사랑과 지지를 눈으로 목격할 만큼 받았음에도 그 관측의 신뢰도를 높여 의지할 생각보다는 거부하거나 의심하게 되는 이 마음.


자기 연민이 사라져 가고 있는 어느 날에.


나는 인정하기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고 생각을 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 영영 지속된다고 해도 괜찮았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동시에 부정했다.


수면제를 모았다. 언제든지 와르르 부어 진짜 영면에 들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작은 통을 하나 마련해 모아두었다.

이제는 장복한 사람이 되어서 스스로 조절해 먹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준다. 그래서 모아두었다.


알고 있는 사항이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인재는 예고 없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았던가.

경고와 징조를 보인 후에 꽝 하고 와서 부딪히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재난의 핵심이 아닌가.


그러나 구어로 말하는 것은 다르다. 혹시나 미래의 나에게, 시선에 부끄러울까 두려워 정제를 거쳐서 쓰는 이 글.

후일의 내가 읽고도 공감할까? 내가 스물세 살에 썼던 글이 굉장히 우습고 곰살맞게 느껴지는 지금처럼 이런 마음들도 미래에는 얄궂던 젊은 날의 기록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최근에 친구들에게 자주 했던 말 중 에는 디톡스라는 단어가 섞여 들었다. 말 그대로 독을 뺀다, 독소를 뺀다 그런 개념인데 진정 내가 어떤 독한 것을 빼내어야 하는 순간에 쓸 수 있을까?


쾌락으로부터, 일시적인 만족으로부터의 해방. 해방? 선택이 가능한 구원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혹은 잔해를 모아 포대에 담아 처리하는 일. 장소를 마련하고 남은 이들에게 여유를 주는 일. 지옥행 열차에도 지정석이 있으면 반갑지 않을까나. 입석은 싫다.


말을 꼬아서 또 어렵게 한다. 기분이 나빴다. 급격하게 기운이 빠졌다. 나는 싫었다. 그런 일이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어떠한 화나 불쾌함에 휩싸여서 기구를 당기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물리적으로 피를 펌프질 하고 근육을 찢어서 생각이 닿지 못하게 했다. 나는 기뻐지고 싶지도 않지만 슬퍼지기는 더더욱 싫다!


새로 생각해 낸 말대로. 자고 일어나면 잊어버리길. 만들어진 감정이 구조대로서 달려와 지금 포화되어 넘실대는 마음을 댐에 안전히 가둬주길.


이제 신경안정제가 없으면 잠을 자기 쉽지 않다. 의존하는 것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지만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있겠는가.


나의 현실을 지키는 일이 나에게 맡겨졌다. 대신하는 이는 없다.


가을조차 이젠 지난날의 기억, 쇠약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넌센스였는데 이제 어떤 말인지 대략 알 것 같다. 민감하고 예민한 것의 첨단에는 쇠약이라는 말이 있던 것이다.


미루고 미루다가 쓸 타이밍을 놓치고, 그에 따라서 그날그날 가졌던 기억들을 잊었기 때문에 서서히 동력을 잃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겠다.

적어도 생일에 꾸역꾸역 글을 쓰듯이 2024년을 마무리하며 소회를 적는 것은 필요할 것 같아서 키보드로, 스크린으로 여러 가지 말들을 적는다.


별안간 이루어진 치명적인 상실을 생각한다. 그리고 비교군을 세워본다. 나의 염려와 걱정이 어느 정도 크기의 것인지, 내가 이것들을 얼마만큼 나의 삶의 수면 위로 드러내서 아파해도 될지 궁금해서.

유난이네,라는 말을 스스로도 하지 않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하는 생각들이었다.


얼마간 들었던 생각들을 갖은 물감과 페인트로 가렸다. 거대한 벽을 채우기 위해서는 많은 양이 필요했다.

칠할 것들을 가져오고 아무리 큰 붓과 롤러를 기용해도 기별도 가지 않을 만큼 조금 가리워졌다.

나름대로 열심이었던 채색이 끝난 후의 내가 한 생각에는 허탈함의 농도가 짙었다.

그리고 이제 영영 채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큰 벽을 활용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생각보다 사치스러운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그것이 내가 가진 한계를 인정하는 패배감이던 오만했던 지난날을 되짚으며 배운 겸손의 일종이던 나는 이제 생각보다 큰 행복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벽이 있었다. 그곳에는 분명한 벽이 있었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이 벽이라는 것을 알려준 일들에 도리어 고마웠다. 나는 몰랐던 트루먼처럼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바다를 두려워하지는 않더라도 밟은 땅의 일상이 잘 지켜졌으면 좋겠다.


2024년. 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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