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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Jun 18. 2021

시켜줘. 명예소방관.

2019년 7월 16일

어제, 저번 주, 저번 달, 작년.

잘못 끼운 첫 단추. 찬물을 부어버린 컵라면. 그리고 잘못 살아온 삶.


불현듯 가까움에 대해 생각했다. 이 사람은 언제부터 나와 가까웠는지. 그 시작이 어디인지 대부분 잘 생각나지도 않고 특정할 수 없다.


내 삶은 2019년 위에 있다. 내가 살아오며 꿴 무수히 많은 매일의 단추들. 끼워진 날. 끼워지지 않은 날. 심지어 단추가 없는 날도.

친한 세 남매를 보았다. 아이들은 어렸지만 가깝고 즐거웠다. 그들이 채우는 단추는 그 아이들의 내일에도, 그리고 멀어져 보이지 않는 날에도 채워진 상태로 존재할 것이다. 시간을 돌릴 수 없기에 그것을 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아름답게 느껴졌다. 풀 수 없는 시간의 잠금이.

동생이 돌아왔다. 이유는 내가 가장 증오하고 혐오하는 이유로. 타인이 불쑥 개입한 삶. 타인에 의해서 결정되거나 타의로 혹은 그 누구의 고의도 아니지만 미필적인 고의로. 마음엔 불이 많다. 불만은 마음속에 불을 만 개씩 지니는 것과 같다는 유머 섞인 말이 나는 하나도 우습지 않다.

내가 처음으로 끼웠던, 내가 처음 타들어가 데인 손을 가졌던 때 끼웠던 단추는 아마도 추측하건대.

그 사실을 부정할 수도,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 남매의 친근함과 같이 나의 손 닿을 수 없는 불은 이미 꺼뜨릴 수 없는 시간에 있으니까. 그 화마를 등지고 끼우는 단추가 오롯이 행복으로 만들어졌을 리 없다.

나는 이해한다는 말을 자주 쓴다. 하지만 그건 너희가 생각하는 이해가 아니야. 단지 듣고 있다는 나의 언어적인 경청 행위일 뿐이다. 그것이 아버지와 닮았다고 느꼈다. 설령 당신이 나를 이해할지라도 그건 내가 닮은 당신의 경청 행위이니까. 아이는 태어나고 자라면서 부모의 언어 습관, 자주 쓰는 단어, 심지어는 발성까지도 흉내 낸다고 한다. 그래서 닮게 되는 것이고.

결함까지 닮는다는 건 참 웃긴 일이다. 나와 닮은 사람을 보면 눈 앞에서 치워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결핍이 많은 사람. 그 손에 많은 의미가 담긴 사람. 결코 어떠한 베일을 거두지 않는 사람.

안개 때문에 평소 잘 보이던 롯데월드 타워가 집에서 보이지 않기를 며칠. 나는 이제 더 이상 내 방의 창 밖 풍경에서 그 건물을 찾지 않았다.


그건 포기와는 약간 다른 것이었다. 체념과도 온도가 달랐다. 어련히, 라는 말로 존재하는 것들도 있으니까.

행복한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불행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던 적이 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그들은 내가 살 얼음판 위에서, 혹은 산산이 부서져 떠내려가는 유빙 위의 내가 지켜내지 못했던 것을 어떻게 나와 같은 시간을 살며 버텨내고 지켜내고 있는 걸까 하고. 질투했다. 뭘까. 내가 너무 나약해 붙들 힘이 없는 건가. 혹시 그들은 내가 모르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져 있는 걸까 하고 의문을 가졌다. 그 바닷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나는 절대 빠지고 싶지 않았다. 만약 빠져 서서히 얼어붙어 가야 하는 때가 온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자고 생각했다. 그게 나의 생각 속의, 그리고 살아온 톤이요 매너라고 생각했다.

나는 행복한 너희들이 부러워. 언젠간 끝이 오겠지만 너의 지금의 순간을, 하루를, 일주일을 그리고 한 달을. 일 년을 나는 가져본 적이 있을까. 설령 있다고 해도 나는 부러워. 내가 가진 자존심, 고집 이런 것 둘은 참 웃겨, 내가 골라서 사온 복숭아랑 자두가 너무 맛없었지만 최대한 맛있게 먹는 척했거든. 예전에는 진짜 멋진 사람은 굉장히 유연하고, 의연하고 융통성 넘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포장을 열어보면 이미 부러져 있는 빼빼로와 다를 바 없다.

내가 고른, 내가 선택한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처음엔 좋은 척했다. 그게 고상하고 현명한 행동인 줄 알았지만 나는 상대방도 자신도 모두 기만했던 거였네.

이미 스스로조차 기만하고 멸시하며 살아와서 그런지 타인의 그것이 크게 힘들지 않다. '너희들은 나를 상처 줄 수 없다.' 뭐 그런 시답지 않은 생각이 아닌 내가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절대 두 발을 그 호수에 담그지 않는다. 누군가는 내 담그지 않은 발을 원망했을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내가 한쪽 다리가 전부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동생은 나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 동생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다. 같은 부모,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는데 이렇게나 다른 것도 놀랍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내가 고른 셔츠에, 내가 달아 채운 단추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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