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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Jun 25. 2021

우리 꼭 서로의 삶에서 탈출해주자

2019년 9월 1일

먼지 냄새. 내가 좋아하는 새벽 냄새  하나다. 들떴던 공기가 가라앉고  방에서 보이던 건물은 별안간 사라지고. 푸르스름한 빛이 방을 메우면 이내 미적지근한 햇살이 찾아오는 일련.

상투적인 이야기들은 나를 거쳐 어디론가 가버렸다. 누가 어땠고 누군 저랬고. 그런 이야기는 언제나 있어왔고 당연스레 또 돌고 돌아 나에게로 분다.

안녕, 하며 손을 놓아버렸다. 찰나와도 같은 순간이었다. 떠남은 찰나의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 순간 용기내기가 이제는 예전만큼 쉽지 않은 것을 보면 나는 수치를 알게 된 것인가, 아니면 진정 대범함을 잃은 것인가. 별거 아니라 구구절절 감상이 나오지도 않는 작별. 이별까지도 못 미친 미성숙한 관계가 이제 익숙하다. 무던히 쓰이는 무뎌진다는 말. 네가 사랑에 서툴러도, 자존감이 낮아도 더 나은 너를 바라기는커녕 그저 손을 떼어내는 이제.

헤어지자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시작되는 이별처럼. 약속이 있는 날 샤워기를 튼 그 시간부터 시작되는 외출처럼. 헤어짐을 전제하고, 사랑하지 못함을 전제하고 잡은 그 손이 굳게 잡혀있을 리가.

서랍에 있는 물건과 옷가지를 모조리 꺼내서 다시 정리하기 힘든 상태로 어질러 두는 것. 작별 인사는 그저 그 방의 문을 닫는, 어쩌면 뒤 돌아 무책임하게 떠나는 것이라서 어지른 옷들 사이에 애써 찾던 어떤 것이 있어도 발견하지 못한다. 때로는 안에서 그 문을 열고 나와주길 바랐고, 누군가는 그러했으나 이내 내가 다시 닫아버렸다. 닫힌 문들을 보며 깊숙이 지쳐버린 것이 아닐까. 그것이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얼마간 생각했다. 회색, 무미건조하고 텁텁한 입안. 그리고 아스라이 걸쳐진 마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모습에 언제나라는 말을 붙여 부르기로 했다. 언제나 나를 짧은 머리 혹은 언제나 나를 안경 쓴 모습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있듯. 언제나 네가 바르는 맥, 언제나 좋아했던 밀크티. 근데 영원히는 아니다. 나도 머리가 길었고, 이제 안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맥은 공병이 되어 굴러다니고, 밀크티도 어쩌면 너의 유행이었을 테니까.

다 버린 듯했으나 그렇지 못했다. 다 버리려 했으나, 처음도 나에게 있지 않았고 마지막은 더더욱 내 것이 될 수 없으니 모조리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버리는 것에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듯. 가끔은 정말 쉽게 버리고 쉽게 지나치지만 사실 버려진 것들을 다시는 돌아보지 않는, 혹은 잘 보이지 않는 때가 왔을 때 비로소 버려지는 것이기에 잘 보이는 것은 버리려 하는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이어폰을 가지고 나오지 않아 하루 동안 이동하는 내내 허전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일상 속의 소음 또한 나를 채우고 있기 때문에.

일 년 남짓 사용한 아이폰이나 어느 주머니에 무엇이 들었는지 꿰고 있는 오래된 백팩처럼. 많은 것들을 담아오고 오롯이 나의 일부로 기능하고 있지만 문득문득 내가 잊고 있던 것들을 뱉어놓곤 한다. 지운 줄로만 알았던 사진. 함께 간 식당의 영수증. 나눠 먹었던 사탕 껍데기처럼 무용한 것들은 머릿속이 아닌 나의 주변 도처에 널려 나를 밀쳐내어 뒷걸음질 치게 한다.

내가 힘겹게 멀어지려 앞으로 나갔던 몇 걸음은 보통의 보폭보다 짧았지만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아주 사소한 것들은 그 노력을 일순간에 없던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사소함은 공기와도 같이. 내가 의식하는 일상 속의 소음과도 같이 나와 함께한다. 음악을 듣고 있지 않지만 들리는 거리의 스피커와 같이, 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호객행위 같이.

이젠 안다. 사랑은 음악처럼 들려오지 않는다. 내가 듣고 싶은 곳에서 듣고 싶은 음악을 듣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전에는 그런 사랑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으로 가득 채워진 플레이리스트와 같은 사랑이.

‘설명해주지 않으면 모른다는 건 설명해줘도 모르는 거야.’

나는 종종 버스 도착이 임박했는지 어플로 확인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다. 도착하기 직전이라면 어차피 내가 탈 수 없을 것이고. 아직 여유가 있다면 가던 보폭을 늘리거나 줄일 필요 없이 걸으면 되니까. 무지는 때로는 호재로 언젠가는 악재로 작용하지만 모른다는 생각을 버려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도 있다. 네가 만약 알았었다면 모른 척했던 것이었길. 몰랐다면 당신 또한 나와 같은 것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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