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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Oct 10. 2021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우리는 물고기가 아니다.

2020년 2월 15일


사운드 클라우드로 산책을 듣던 예전의 내가 쓴 글, 당시에 번거롭다는 생각을 했다. 브런치에 옮기는 오늘은 음원으로 나와 즐겁다. 손쉽게 들을 수 있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뒤따랐지만, 아무렴 어떤가.



물로 써둔 글씨를 보고 슬피 울던 나를 위로하는 날, 어제보다는 내일이 나를 더 사랑하게 될 날.


거울 앞에 서서 말했다. 넌 이제 자격이 없다. 진짜 행세는 그만두어주었으면 한다는 부탁과 함께.


비를 염려해 우산을 챙겨 온 상대방과의 약속을 애초에 기대한 만큼 다 보내지도 못하고 겨우겨우 집으로 돌아와서는 생각했다. 여태까지의 삶을 유지할 자격 없음. 완전히 실격이다. 허덕이는 날 보는 내 눈이 슬펐다. 눈치챈 너희도 그렇겠지, 그랬겠지.


저녁 내내 비가 내린 줄도 몰랐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깊게 잠들었다. 쉽게 깨고 싶지 않아서 은근한 온도를 맞추려 타이머도 없이 틀어둔 온풍기가, 무드등 역할까지 겸하는 머리맡 가습기가 조용히 각기 제 할 일을 하고 있었을 뿐. 강력한 유압프레스에 꾹 눌려 납작해져 바닥에 실루엣만 남긴 평면적인 인간이 되어버린 기분이 든다. 비어버린 또 다른 기분.


마음 안 쪽은 고요하다. 오히려 숨소리 하나 없이 고요하다. 언제였지, 물리적으로 이런 고요를 마주한 적이. 별 밖에 보이지 않는, 그 별도 착각이라고 여길 만큼의 암전. 그리고 뒤따르는 유난히 이불이 포근하게 느껴지는 날. 아침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마음 한 족은 공허하다. 잠들기 전 양치를 하면서 괜찮아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진정 괜찮은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답이 어떤 것이던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반할 것이니까. 대답할 수 없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그저 방에 들어오자마자 누워서 서서히 잠든 날들의 어질러진 흔적을 보았다. 옷을 주워 걸어놓게 된 오늘로써는 그렇게 무겁게 받아 들 일이었나 싶다. 사실은 엄청 부풀려진 일이 아닐까 하고. 눈이 많이 와서 신난 강아지는 힘차게 뛰어나가 푹, 하고 눈 속에 잠겨버렸다. 네가 눈사람을 만들고 즐겁게 눈싸움을 하고 있노라면, 나는 그 눈을 전부 녹여 마을을 적셔버리는 불청객은 아니었을까.


내 물욕과는 별개로 작동하는 물건을 소유하고 구매하고자 하는 마음. 그 마음과 사람을 대하는, 나의 사랑에서 나타나는 양상이 비슷하다고 의사 선생님은 말해주었다. 갈구 - 노력 - 획득 - 소강으로 이어지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 내가 최우선으로 여기는 책임감과 도덕성, 반대로 개인적 쾌락이나 욕망이 함께 양립하는 것에 대해 힘들다고 이야기했는데 그것들의 난립보다는 화합에 초첨을 맞추면 좋을 것 같다 말해주었다. 전문가가 해준 감정의 규격화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차근차근 다시 무너뜨리고 쌓으면 될 것 같은 막연한 기분이 들어서.


새삼 세상은 나에게는 너무 거칠고 힘든 곳. 단순하고 확실한 정수는 존재할리 없었고 그에 맞춰 나고 복합적인 인간으로 거듭나야 했다.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하지만 난 좋아하면서 싫어했다. 부딪히는 것 한 쌍은 결국 경도가 낮은 한쪽이 먼저 부서져 버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나머지 한쪽도 온전하지는 못했다. 금이 가버렸다. 이건 못 고친다.


독립적인 사람이 되는 일은 삶에서 벌어지는 단독의 사건이 아니라 삶 전반에 걸쳐서 일어나는 노화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확실히 나는 누군가로부터 떨어져 나왔지만 그 상태는 너무 유동적이고 불안정해서 덩굴처럼 어디엔가 감겨, 달라붙어 성장을 이어가야 한다. 나도 약한 존재니 당신에게 의지할게요.라고 말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강하다. 넘어지지 않을 만큼만요. 부탁드려요. 라며 암묵적 동의를 구하는 수밖에.


마음이 넘치면 한 잔 따라서 건네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빈 잔이 준비되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마음이 흘러나올 사람이라면 어련히 비어있는 잔을 구비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들이마셔진 숨은 필히 내쉬어진다. 가진 것은 잃어버리고, 들어왔으니 나가라.


나는 시작한 것을 멈추기가 어렵다. 정해둔 것을 바꾸기가 어렵다고 고쳐 생각할까 싶다. 대중교통을 탈 때는 환승하는 일을 내심 겁냈다. 버스면 버스, 지하철이면 지하철. 지구 어딘가에서는 날짜상의 여름에 함박눈이 온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하니 괜찮은 줄로만 알고 살았고 머리로도 입으로도 모두 좋다고 중얼거리고. 또 내뱉기도 했지만 그 흰 풍경을 보면 내 입꼬리는 결코 올라가는 일이 없었다. 사실 내가 살아가는 여름엔 눈이 올 수 없는 건데.


입꼬리는 올라갔다. 영하와 영상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두고. 마이너스와 0의 경계선. 여전히 쌀쌀하기만 한 날씨.


우비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장화 속엔 물이 종아리까지 차서 불쾌하게 찰박였다. 내가 대비해 강구한 예비책으로는 다가오는 폭풍우의 어떤 것도 막지 못하는 것. 그것이 세상, 그것이 사랑. 그것이 나의.


물로 그린 그림처럼 사라지네, 종이가 젖었다 마른 모양이다. 군데군데 얼룩지고 울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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