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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Dec 18. 2021

처음으로 올리기 싫었던 글

2020년 7월 23일

우습게도 나를 살아가게 하는 것은,

처음으로 그들 손목 위 금시계를 보고 감탄했던 때, 17살.

그땐 멋이 뭔지 잘 알지 못했다. 금을 차는 게 멋있어? 금붙이 두르는 건 대박집 사장님 같아서 이상해. 하며 진짜 멋, 모르는 소리를 했다.

무엇보다 왜 멋있어야 하는지 몰랐다. 왜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몰랐다. 모를 법도 했다. 아쉽게도 나의 주변에는 그런 류의 깨우침을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해당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개인과 개인의 일상적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기는 어려운 일이기에.

25살, 내가 들었던 노래 속의 이들이 지금 나의 나이 때 왜 그 손목 위의 몇천만 원을 자랑했는지 정확히 안다. 가격을 읊는 가사의 속 뜻. 왜 산을 오르세요, 라는 말의 대답. 거기 우리의 종착지가 있다.

누군가의 흩어지는 응원보다 이상향의 길목의 위치를 확인해보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된다. 물론 돌파한 후의 공허는 또 다른 아이딜로 메워야 하겠지만.

이데아, 정말 나의 그것도 별거 없었다. 그냥 효도. 그냥 맛있는 거 매일 먹기. 더울 때 시원한 곳에서, 추울 때 따뜻한 곳에서 기분 좋게 잠들기.

작년에 미국에 있던 고모부 가족이 한국 우리 집에서 묵었을 때. 처음으로 롤렉스를 손목에 차 봤다. 그것의 무게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거웠다.

무지 티를 걸쳐도 손목이 무거워 흩뿌리는 멋. 우습게도 나를 살아가게 하는 것은 땀에 마저도 녹아있어야 만족할 정도의 멋이었나!

마음속에서 정말 뜨거운 열이 가해져 정상적인 상승 욕구를 녹이고 비틀어 더 강력한 어떤 것으로 뒤바꾼 사람들이 결국에는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력으로 본인의 무게를 일순간 더 무겁게 불린 것이 아닌가. 나도, 나 또한.

왜 내가 잘해야 했었는지, 왜 내가 열심히 해야 했었는지. 왜 부당함을 참아내고 극복해야 했던 것인지. 왜 올라서야 하는지, 왜 새벽에도 눈을 감지 못하는 걱정이 도사리는지. 왜 너희를 사랑할 수 없는지. 왜 애매하게 변한 도덕성을 버리게 되는지.


얼마 전 인용한 글.

"새벽에 눈을 뜨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단단한 땅도 결국 흘러가는 맨틀 위에 불완전하게 떠 있는 판자 같은 것이니까. 그런 불확실함에 두 발을 내딛고 있는 주제에. 그런 사람인 주제에 미래를 계획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불완전, 불확실. 그런 위협이 있기에 가능한 일. 불안 위에서 안정적 행복을 찾는 아이러니한 삶의 가치보다 꼭대기에 멋을 두고 사는 일의 허무를 누릴 수 있어 기쁜 나날이다.

사랑보다 위. 목숨 바로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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