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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Dec 29. 2021

징징대는 제 글들을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2020년 10월 20일


화에 대해서 줄곧 생각하고 그런 상태로 있는 것이 익숙하다. 길들일 수 없지만 다룰 수 있다. 기쁘게도. 정말 기쁘게도.

믿음이 깨지는 것은 보기가 좋다. 내 쪽의 믿음, 네 쪽의 믿음. 어느 쪽이 됐던 상관없다. 부서지는 광경을 바라보는 내 눈을 깜빡이게 하는 빛.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구도자들의 얼굴에도 파편에 반사된 빛이 비쳐 알록달록하다.

긍정을 연료로 삼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되었다. 참 신기해. 그들은 연비가 좋다. 내가 나의 마음속 뜨거움을 유지하기 위해서 부어 넣었던 것들이 무색하다. 비록 그 긍정의 덮개 안에 비관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것은 보기에 썩 나쁘지 않다. 부르짖던 것이 아닌가. 번지르르한 겉.

바짝 몰아세운 후에는 불쑥불쑥 떠오르는 격앙된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눈물이 비집고 나오려는 눈꺼풀과 미간을 강하게 찌푸려보기도 하고 어금니를 꽉 깨물고 콧잔등을 찡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저항하고자 하는 것들은 사람  자체가 아니라  속에서 나에게 뻗치는 손아귀와 같은 교정의 마음이었다. 나는  생각을 고고히 관철할 의무가 있었고 의무는 튼튼한 갑옷이 되어 나를 지켜주는 유일한 보루였다. 안전하다고 느낄  오금이나 관절 등의  약점을 통해  상처들은 정말 치명적이고 아팠다.

최근 취하기 좋아하는 바싹 낮춘 저자세가 하나 둘 주워 먹은 나이의 영향인지, 시대정신과 필요 이상의 마찰을 줄이기 위한 처세인지 정확히 볼 수 있었다면 좋겠다. 부디 관용을 배운 것이라면 좋겠다.

나 이외의 사람들을 병신 취급하는 이유에 대해서 의문을 표하는 지인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면 죽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는 나의 삶의 가치를 다른 곳으로 옮겨보려 시도하는 누군가들. 뛰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와 평범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

슬픔을 나누면 배가 되는 사람. 기쁨을 나누면 절반이 되는 사람. 나에게 위로받지 않으면 된다. 축하를 바라지 않고 기쁜 일에 대한 사실만 전하면 된다.

손빨래를 해야 하는 민감한 옷감의 의복. 정하면 된다. 입기 원하는 것이 그저 집에서 편히 입을 옷인지 아니면 날개가 될 유려한 예복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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