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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율 Oct 23. 2022

느리지만, 매일 여행하고 있어_멕시코시티

 다른 사람들의 블로그 후기를 보면 멕시코시티에서 3일, 과달라하라에 2일, 칸쿤에 3일. 이렇게 하루하루 쪼개 부지런히 여행을 다니던데 나는 지금 멕시코시티에서만 일주일 째다. 

나는 부지런하고 계획적인 여행자이기보다는 느긋한 한량 스타일에 가까운 것 같다.

 처음에는 나도 시티에서 3일을 머문 후 과달라하라나 과나후아토로 이동할 생각이었지만 도저히 이 멋진 도시 멕시코시티에서 3일만 머무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아쉽지만 다음 도시를 포기하고 멕시코시티에서 일주일을 다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남들보다 느리지만 나의 여행은 계속되고 있었다. 누군가는 아직 첫 도시라서 흠뻑 빠진 것이라고, 다른 나라도 두루두루 봐야 한다고 했지만, 여행을 다 마치고 나서도 나는 가장 멋있는 곳이 어디였냐고 물으면 멕시코시티를 빼놓지 않는다. 

 첫날은 떼오띠우아깐을 찾았다. 유네스코로 지정된 피라미드로 이집트의 기자 피라미드와 평행이론을 이룬다고 해서 유명하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달리 떼오띠우아깐은 피라미드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각형의 뾰족한 모양이 아닌 평평한 모양이다. 덕분에 피라미드 정상(?)에 올라 탁 트인 절경을 볼 수 있지만 사실 이곳은 인간을 제물로 바치던 제단이다. 

 떼오띠우아깐의 유물은 인류학박물관에 모두 전시되어 있다고 해 다음 날은 인류학박물관을 찾았다. 하루 종일 돌아봐도 다 못 볼 거라는 후기를 보고는 도시락까지 완벽하게 준비해 시간 분배를 했지만 정말로 폐관 시간이 될 때까지 다 보지 못했다. 인류학박물관에는 교과서에서도 보지 못한 수많은 고대 문명의 유물이 상당히 많았는데 글자도 생겨나기 전 그들은 주로 자연의 신을 모셨다고 한다. 바람, 재규어, 뱀, 나무처럼 자연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신으로 모셨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태양의 신'이다. 돌이나 그릇, 항아리에 신들을 자세히 그려놓았지만 재규어, 뱀, 쌀처럼 흔히 아는 것이 아니면 대부분 어떤 신을 모시는지 잘 구분이 안 갔다. 다 비슷해 보이는 돌들을 지나치려는데 흥미로운 돌덩이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커다란 돌덩이에는 슈퍼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옥수수 모양 아이스크림 콘이 쪼르르 새겨져 있었다. 옥수수처럼 생긴 사람들이 새겨져 있고 옥수수를 받드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하나같이 너무 귀여웠다. 누가 봐도 ‘옥수수 신’을 모시는 것이 분명하다. 참 귀엽고 친근한 ‘신’이다.

 인류학 박물관은 순수 자국의 유물로만 채워진 박물관으로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는데 멕시코인들이 굉장한 자부심을 가질 만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도 순수 자국의 유물로 가득한 훌륭한 국립중앙박물관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까. 

하루 안에 박물관을 다 보겠다고 부지런히 7시간을 움직였더니 우리는 허기졌다. 근처 로컬 식당에 들어가서 간단하게 밥을 먹기로 했다.

 우리에게는(동행자와 나) 철칙이 하나 있었는데 안전을 위해 무조건 해가 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 규칙 때문에 멕시코에서의 일정이 좀 더 늦어진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여행 첫 도시부터 위험에 빠지고 싶지는 않았다. 곧 해가 질 시간이라 우리는 부지런히 저녁을 먹고 움직여야 했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타코와 고깃국처럼 보이는 따뜻한 수프가 나왔다. 배가 고파서 수프부터 먹고 있는데 동행자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너… 너는.. 괜찮아?”

“응?? 뭐… 뭐가?” 나는 당황했다. 수프에 벌레라도 빠졌나? 

“아.. 아니 수프에서 비누 맛이 나는데..”

동행자는 수프 위에 뿌려진 고수 때문에 비누 맛이 난다고 했는데, 나는 전혀 느끼질 못했다. 여행 전부터 고수에 대한 무시무시한 후기를 많이 봐서 내심 많이 걱정하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고수를 잘도 먹고 있었다. 나는 아마 동행자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게 고수인지 영영 몰랐을 것이다. 

 저녁을 먹고 호스텔로 돌아와 쉬고 있는데 밖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서.. 설마 총소리인가? 다행히 오늘 근처에서 큰 파티가 열려서 학생들이 폭죽을 터트리며 노는 것이라고 했다. 안심하고 씻고 나왔는데 여전히 폭죽 소리가 들려온다. 잘 시간이 되면 멈추겠지~ 

막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켰는데 갑자기 폭죽 소리 하나가 귀에 꽂히더니 그대로 온몸의 모든 털이 일제히 곤두서기 시작했다. 뒷골이 서늘하게 당겨왔고 머리가 멍해졌으며 모든 소리와 모든 동작이 일제히 멈췄다. ‘모든 게 얼어붙었다’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노트북을 켜던 내 오른손이 그대로 허공에 멈췄고 접시를 들고 가던 친구의 발걸음도 그대로 굳었다. 그 소리는 진짜 총소리였다! 살면서 진짜 총소리는 처음 들어봤는데, 머리로 총소리라는 것을 인지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몸부터 반응한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더욱 무서웠던 것은 총소리 이후 그 시끄럽던 바깥이 갑자기 고요해졌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몇 초의 정적이 흐른 후 호스텔 주인이 맨발로 뛰어와서는 후다닥 문단속을 했다. 오늘은 일찍 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여행 내내 철칙을 지키기 참 잘했다고 생각했고 앞으로도 철칙은 꼭 지켜야겠다 굳게 다짐했다.      


 다음 날 호스텔 주인은 어젯밤 많이 놀랐냐며 우리의 안부를 챙겼고 흔히 있는 일은 아니라면서 안심시켜 주려고 애썼다. 그리고는 오늘 아침은 직접 준비했다면서 손수 타코를 만들어주었다. 사워크림과 스트링치즈를 얹은 소고기 타코는 정말 끝내주게 맛있었다. 우리를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커피를 내려주면서 오늘 특별한 계획이 없다면 차뿔떼뻭 공원의 동물원에 가보라고 추천했다. 무려 ‘무료’라면서! 동행은 굳이 여기까지 와서 동물 구경은 안 하고 싶다고 해 나는 혼자서 차뿔떼뻭 공원으로 향했다. 동물원을 좋아해서라기 보다는 차뿔떼뻭 공원이 좋았고, 어제의 충격을 잊고 싶어서 그냥 어디든 가고 싶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동물원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그중에 아시아인은 내가 유일한 것 같다. 무료라서 기대는 하나도 안 했는데 입구에서부터 만난 동물은 판다였다. 여기서도 판다는 귀~한 대접을 받고 있었고 20분을 기다렸지만 대나무에 정신 팔린 판다의 엉덩이만 내내 볼 수 있었다. 나는 판다를 이곳 멕시코에서 처음 봤다. 크고 작은 원숭이 가족도 있었고 부리나 발 모양이 특이한 새도 돌아다녔다. 킹콩 영화 속에 나올 법한 거대한 몸집의 침팬지, 기린, 하마, 거북이 등등. 무료라고 하기에는 에버랜드만큼 많은 동물을 본 것 같다. 기대 이상이었다. 

무엇보다 동물들이 머무르는 공간이 답답하게 만들어진 네모 난 우리가 아니어서 참 다행이었다. 네모 난 동물원 느낌이 아닌, 거대한 자연 속에 살고 있는 동물친구들을 우리가 잠깐 손님처럼 다녀가는 기분이었다. 몇 만 원 하는 에버랜드 동물원보다 여기 있는 친구들이 훨씬 행복해 보였다. 기대 이상의 만족감으로 동물원 구경을 마치고 간단하게 점심을 먹으러 맥도널드에 들어섰는데 총까지 무장한 경찰이 매장 앞을 지키고 있다. 맥도널드에 경찰이? 

그만큼 위험하는 뜻일까? 그만큼 안전하는 뜻일까? 아이러니했다. 멕시코시티 곳곳에 중무장한 경찰은 자주 볼 수 있다. 맥도널드처럼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조차. 

다양한 동물이 살고 있는 차뿔떼벡 동물원. 무료입장이다.


 이제 멕시코시티에 머문 지 일주일이 넘었다. 여기서는 떼오띠우아깐 말고는 제대로 된 투어도 장거리 이동도 없었다. 한국인 여행자들은 빨리 다른 도시도 가보라며 재촉한다. 나는 이곳의 건물도 다 좋았고 멋있는 고대 문명도 좋았고 타코도 좋았고 유난히 짙은 하늘도 다 좋았다. 여전히 좋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고 이제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로 했다. 여행 후 첫 이동이라 괜히 설렜다. 

어느 도시로 가볼까 고심하다가 ‘산 크리스토발’로 가기로 했다. 과테말라로 가는 경로이기도 하고 조용하고 이쁜 도시라고 해서 멕시코시티와는 다른 매력이 있을 것 같았다. 

산 크리스토발에서도 나는 여전히 느릿느릿 이동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성격 급하고 빠릿빠릿한 사람인데 여기서는 급할 것이 없었고 눈치 볼 필요도 없었다. 느리다고 해서 게으른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천근만근 한 번에 기상해 본적이 거의 없는데 이곳에선 매일 아침 7시에 눈을 뜬다. 상쾌하게 기상을 하고 나면 평소에는 챙겨 먹지도 않던 조식을 여기서는 매일 챙겨 먹는다. 그리고 모닝커피를 마시고 동네 산책을 하다 보면 어느새 점심시간이다. 하나하나 새겨 걷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내가 느린 게 아니라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것은 아닐까?>             


나는 천천히, 느릿느릿 여행할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 이만큼 자유로울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주어질까? 감사한 이 시간들을 언제 또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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