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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율 Oct 26. 2022

어쩌면 난 진짜 천사를 만날 걸지도 몰라_칠레

 다음 날 미셸의 말대로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준비를 마쳤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니 미드에서나 본 것 같은 간지 폭발하는 마을에 도착했다. 시내쯤 되는 큰 마을인 것 같다. 

우리나라 세빛둥둥섬처럼 물 위에 근사한 돔이 가까이 보였다. 미술관인지 공연장인지 궁금했지만 이번에도 미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냥 그녀는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티켓을 사서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데 무대에서는 오케스트라 공연이 준비 중이다. 무대 뒤로는 천장까지 모두 유리로 되어있어 바다가 훤히 보였는데 자연광까지 더해져 공연장 전체가 무척 입체적으로 보였다. 

일렁이는 물결 위에 쏟아지는 햇살이 마치 샹들리에처럼 무대가 반짝거렸다. 연주가 시작되자 무대 뒤로 보이는 바다가 더욱 빛나는 것 같다. 윤슬이 가득한 바다 위로 오리 떼가 둥둥 떠있고 카약을 즐기는 무리가 물결을 휘 가르고 있다. 꼭 클래식 선율에 맞춰 물결이 일고 윤슬이 반짝이는 것만 같다. 바이올린 소리가 바람에 실려 물결을 춤추게 한다. 맑고 청아한 피아노 소리는 부드럽게 물살을 두드린다. 지휘봉은 파도를 만들고 비올라는 조용히 윤슬을 부른다. 이 모든 선율이 바다 위의 모든 풍경이 마침내 하나가 되었다. 감격에 겨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눈물을 참으려 눈을 감아도 머릿속에는 입체적인 선율과 가슴 벅찬 풍경이 그려진다.

미셸이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 이런 평화로움이구나, 잔잔한 힐링이구나! 

그녀의 세심한 배려가 온몸으로 전해졌다. 순간 ‘그녀는 천사가 아닐까?’라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며칠 전에 길거리에서 엉엉 울던 내 모습이 생각났다. 서럽고 외로워서 세상이 내 편이 아닌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천사를 만나 위로와 치유를 받고 있는 것 같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들리는 모든 소리가 그 하나하나가 모두 감사하고 감격스럽다. 미셸의 배려가 감동적이다. 그녀는 정말로 천사였다.


클래식 연주는 살면서 처음 들어봤다. 사실 평소에 관심도 없었다. 아마 미셸이 처음부터 나에게 클래식 공연 보러 가자고 했다면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녀를 믿고 따라온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음악은 잘 모르지만 잔잔하면서도 힘 있게 퍼지는 선율이, 그 뒤로 펼쳐진 아름다운 바다와 어우러져 나의 마음을 구석구석 어루만지는 듯했다. 

지난 며칠 동안 서럽고 외로웠던 감정들이 사르르 녹아 사라지는 것 같다. 모든 서러움과 외로움이 공중분해되는 것 같이 개운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 음악과 풍경이 나를 위로하고 치유해주었다.

누군가에게 순수한 배려를 받고 위로를 받아보았던 적은 처음인 것 같다. 하나하나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난 정말로 천사를 만난 건지도 모르겠다.

가장 힘들고 외로웠던 순간 하늘에서 아빠가 보낸 선물이지 않을까.

평생 미움과 증오뿐이던 이 오래되고 캐캐 묵은 감정들이 바래지고 희석되면서 마음 한편이 아려왔다. 처음으로 아빠가 그리웠다. 지금도 가끔 클래식을 들으면 아빠 생각이 난다. 그렇게 인생의 첫 클래식은 나에게 ‘아버지’가 그리워지는 음악이 되었다. 평생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천사는 나에게 엄청난 선물을 주었다. 미셸은 이 사실을 알기나 할까?

 

 미셸의 영어수업 일정 때문에 다음 날 우리는 헤어져야 했다. 너무 서운해서 눈물이 났다. 칠레에서는 매일 왜 이렇게 우는지 모르겠다. 그녀 덕에 나는 많은 공감과 위로를 받았고 단조로울 줄 알았던 바라즈의 여행은 무척이나 풍요로웠다. 이 좋은 정보를 나누고 싶어 처음으로 커뮤니티에 바라즈 여행 정보를 꼼꼼하게 올렸다. 한 달 뒤 만났던 한국인 일행이 나의 여행정보를 보고 바라즈 여행을 다녀왔다는 얘기에 나도 천사가 된 듯 행복했다. 

잠깐 쉬다 가려던 계획이 그녀 덕에 5일을 머물렀다. 남미 여행 중에 가장 많은 감정을 배우고 교감한 곳이었다. 천사 덕분에 건강한 에너지를 얻었으니 이제 다음 여행을 슬슬 준비해야겠다.      

원래 계획대로 나는 산티아고로 떠났다. 국가행사 때문인지 호스텔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힘들다. 겨우 구한 호스텔은 궁처럼 드넓은 곳이었는데 유난히 눈에 띄는 동양인 여자와 자주 마주쳤다. 이상하게 미셸에게 말을 걸던 용기는 하나도 나지 않았다. 

쭈뼛거리는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는데 뜻밖에도 한국인이었다. 그 친구는 택시강도를 만나서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빼고 모든 짐을 도난당했다고 했다. 페루에서의 핸드폰 사건이 생각나서 너무 안타까웠다. 다행히 대사관에 연락이 닿아 생활비 정도는 빌릴 수 있었다고 했다. 

이젠 내가 천사가 될 차례였다. 칠레는 와인과 과일이 무척 저렴해서 와인 한 병씩을 매일 그 친구와 나눠 마셨다. 와인과 함께 먹을 저녁 메뉴도 넉넉하게 준비했고 후식으로 먹을 과일도 넉넉하게 사두었다. 그 친구는 액세서리를 만드는 재주가 있어 나에게 근사한 팔찌를 하나 만들어 주었고 신경 쓰이던 머리도 직접 잘라주었다. 손재주가 참 남다른 친구였는데 마침 나이도 동갑에 사는 곳도 같아서 우리는 금방 가까워졌다. 내가 천사가 되고 싶었는데 어쩐지 내가 받은 것이 더 많은 기분이다. 칠레에서는 계속 천사들만 만나는 것 같다. 


며칠 뒤 칠레 내 모든 숙소가 예약불가라고 해서 나와 친구는 한인민박으로 이동해야 했는데 한인민박의 장점은 바로 한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 한식을 실컷 먹고 나는 아르마스 광장 구경을, 친구는 장사를 하러 갔다. 친구는 여행경비를 위해 액세서리를 만들어 팔았는데 퀄리티가 좋아서 꽤 잘 팔렸다. 저녁에 숙소로 돌아와서도 열심히 액세서리를 만들었는데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던가! 열심히 친구 따라서 나도 팔찌 하나를 완성했다. 물론 어디 팔아도 될 정도는 아니라 기념으로 여행 내내 하고 다녔다. 다음 날 친구는 장사를 해야겠다며 떠났고 나는 산타루시아 언덕을 다녀왔다. 구름이 잔뜩 낀 날씨였음에도 산타루시아에서 바라본 산티아고의 시내 풍경은 탁 트여 시원했다.

다음 날은 민박 사람들과 해안도시인 발파라이소와 비냐 델 마르에 다녀왔다. 해변가에서 놀기에 꽤 쌀쌀했지만 해산물 요리는 끝내줬다. 

한인민박에 있으니 편한 점은 현지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름 모를 식당에서 상상도 못 한 음식을 먹어보고 시장에서는 질 좋은 치즈와 저렴한 먹거리를 구입했다. 분위기 좋은 빈티지샵도 구경하고 캘리그래피 가득한 칠레의 골목길도 누볐다.

그렇게 칠레에서는 예쁜 천사들을 만나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었고 덕분에 남은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천사들이 아니었다면 난 서둘러 한국에 돌아갔을 테고 남은 여행 일정을 채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두고두고 아쉬웠겠지.


 인생을 살다 보면, 여행을 하다 보면 힘든 순간도 어느 순간 슬럼프가 찾아오기도 한다. 누구나 겪는 일이다. 누군가는 좌절하고 싶을 테고 누군가는 어떻게든 이겨내려 발버둥 칠 것이다. 누구나 이겨내는 방법은 다르다.  나는 어린 시절 충분하지 못했던 사랑 때문인지 애착이 약하다. 그래서 힘든 순간이 오면 상대를 믿지 못하고 세상을 믿지 못해 스스로 힘들어하고 원망만 하다 결국 지쳐버리기 일쑤였다. 

운이 없다고 원망했고 가족이나 친구에게 의지하지도 못한 채 좌절했다. 

그런데 항상 그 끝에는 ‘미래의 나는 결국 잘 이겨내고 있을 거야~’

알 수 없지만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얼토당토않는 나 자신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 내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좀 달랐다. 처음 보는 낯선 ‘미셀’을 믿었던 것이다. 사실 그냥 느낌이었다. 딱히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미셀이 유난히 나에게 잘 보였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미셀과의 만남은 그저 운명이었다고 밖에는 설명이 안된다. 무언가에 홀린 듯 미셀에게 말을 걸었다.

어쩌면 그 용기는, 그리고 미셀이라는 천사는 

이번 여행에서 세상이 나에게 준 ‘선물’이 아니었을까?

남을 믿어보는 것! 신뢰라는 것이 얼마나 멋진 것인지 경험하게 해 준 것 같다. 

마음을 열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믿어보았더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 

천사들로 가득했다. 언제 슬럼프였냐는 듯 금새 치유되고 힘이 났다.

이것이 대가 없는 신뢰에 대한 보상이자 선한 영향력이 아닐까.

나의 천사 미셀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낸다. 그녀에게 늘 행복만 가득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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