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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율 Oct 25. 2022

네가 겪은 비바람은 다 거짓이었을지도 몰라_칠레

 아무리 생각해도 아타카마는 쉬어가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도시 같다.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토레스 델 파이네 트래킹은 과감히 포기했다. 지금의 정신력과 체력으로는 무리한 일정이다.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도 일단 접었다. 조금만 더 견뎌보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볼리비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모든 역경이 비처럼 바람처럼 무사히 지나가지 않을까?

 새로운 마음으로 다음 날 바라즈로 향했다. 원래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나 화려한 해안도시를 갈 예정이었지만 지금은 나에게는 조용한 휴식이 필요하다. 

바라즈는 한국인이 많이 가는 곳이 아니라 정보가 거의 없었지만 독일인 마을(우리나라 남해의 독일인 마을처럼)이라 ‘맥주가 맛있는 조용한 해안도시’라는 글귀가 마음에 들어 즉흥적으로 선택한 곳이다.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바다는 호수처럼 차분해 보였다. 마음에 든다. 내릴 때가 다 되었는데 갑자기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다. 우비를 꺼낼 겨를도 없어 그냥 비를 맞으면서 아무 숙소나 들어가기로 했다. 신호등을 건너려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비 때문이었을까. 

고산병은 누구나 걸리는 것은 아니라는데 나는 왜 그렇게 심하게 앓았을까. 

우유니를 보겠다고 꾸역꾸역 참고 버티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머나먼 타지에서 병원도 약도 없이 혼자서 견뎌야 하는 게 너무너무 서러웠다. 

최근 일주일 동안 식사다운 식사도 못한 것 같다. 사람들과 대화다운 대화도 해보지 못한 것 같다. 

외로운 것이 가장 힘들었다. 

지금 당장 너무 쉬고 싶은데 숙소 하나 찾는 것도 쉽지 않다. 때마침 비도 내린다. 얼른 숙소를 찾아 들어가고 싶은데 눈물이 나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마음속에 있던 서러움과 외로움이 폭발해버렸다. 내가 엉엉 우는데 지나가는 사람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게 더 서러워 눈물이 났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내가 실컷 울도록 배려해준 것 같아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났더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눈물을 닦고 보니 아까부터 차 한 대가 계속 신호등 앞에 멈춰있다. 파란불도 아닌데 내가 건널 때까지 계속 기다려준 것이다. 너무 민망하고 고마워서 또 눈물이 났다. 나도 모르게 한국식 인사를 하고 신호등을 건넜다. 

비를 계속 맞고 있다가는 컨디션이 더 안 좋아질 것 같아 눈에 보이는 호스텔에 일단 들어갔다. 프런트에서 흑인 여자가 반갑게 인사를 해준다. 평소대로라면 방을 보여달라고 한 후에 침구부터 욕실까지 꼼꼼히 둘러보고 체크인을 하겠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여성전용 도미토리라는 말에 그냥 체크인을 해버렸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티켓을 다시 검색해봐야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 여권을 본 직원이 갑자기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한다. 내가 깜짝 놀라서 한국말을 할 줄 아냐고 물어보니 유튜브로 ‘안녕하세요’만 배웠는데 오늘 처음 써먹어보는 거라고 했다. 갑자기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서 힐링을 하고 갈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도미토리에는 나 혼자 뿐이다. 2층 침대가 아닌 싱글베드가 일렬로 8개가 놓여 있는 게 어쩐지 위화감이 들고 더 외롭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첫날밤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행히 한국말로 인사해준 직원은 나를 살뜰히 챙겨줬다. 브라질에서 온 빅토리라는 친구인데 여행을 좋아해서 몇몇 나라의 호스텔에서 일해왔다고 했다. 다양한 나라의 인사말도 할 줄 알았는데 대부분 여행객이나 유튜브로 배운단다.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다고 해서 유튜브로 우리나라 가수 뮤직비디오를 보여줬다. 우리는 왠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바 라즈로 온 것은 운명인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어쩌면 내가 겪은 비바람이 다 거짓은 아니었을까 

희망적인 위안을 하며 어렵게 잠이 든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은 필요 없을 것 같다.     

 

 오늘은 아무런 일정 없이 그냥 발길 닿는 대로 눈길 가는 대로 움직일 생각이다.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내 숙소에 있을 수도 있다. 막 씻고 나오는데 그 사이 누군가 체크인을 했는지 조용히 짐을 풀고 있다. 서로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다가 나도 모르게 오늘 계획이 뭐냐고 물었다. 자신을 미국에서 온 미셸이라고 소개한 그녀는 오늘 자전거를 빌려서 마을 전체를 돌아볼 생각이란다. 

“너무 좋은 생각인데 나도 함께 할 수 있을까?”

왜 그랬는지 평소답지 않게 용기가 났다. 영어를 잘 못해서 위축되어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영어로 또박또박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적극적으로 밝게 큰 목소리로. 

그런데 미셸은 너무나 흔쾌히 OK라고 했다.

기분이 참 묘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의욕도 없고 의기소침했던 내가 갑자기 무슨 용기가 솟았을까? 그렇게 미셸과 나는 친구가 됐다. 미셸은 이곳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자신은 스페인어를 배운다고 했다. 미셸의 스페인어 실력은 기대 이상이었는데 현지인에게 마을에서 가장 맛있는 레스토랑과 메뉴를 추천받았고 덕분에 그날 저녁은 근사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박물관과 전시회도 추천받았다. 여행정보가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미셸 덕에 이곳에서 할 일이 많이 생겼다. 

 첫날 우리는 함께 자전거를 빌려 마을 전체를 돌았다. 독일마을이라는 수식어답게 마을 전체가 유럽의 시골 느낌이 났다. 지붕은 물고기 비늘을 닮은 것 같고 우뚝 솟은 시계탑은 유럽광장 같은 느낌이다. 바다는 고요하고 차분했으며 멀리 보이는 설산은 신비로웠다. 반나절이면 동네를 다 돌아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넓었고 유럽을 가보지 못한 나에게는 건물 하나하나가 다 신기하고 예뻤다. 

현지인에게 추천받은 박물관은 톰 아저씨가 평생 모은 골동품을 전시한 개인 박물관이었다. 마치 시골에 사는 할아버지가 아끼는 오래된 보물창고를 구경하는 느낌이었다. 이곳에 여행 오는 한국인이 있다면 꼭 소개해주고 싶은 곳이다. 입장료는 따로 없지만, 원하는 금액만큼 내면 된다. 

추천받은 박물관과 미술관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근사한 저녁식사를 위해 추천받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레스토랑에는 가족단위의 현지인들이 많았다. 우리는 이곳에서 꼭 먹어봐야 한다는 관자요리를 주문했다. 여행하면서 최고의 호사를 누려보는 것 같다. 

그런데 이제껏 여행하면서 내내 아쉬웠던 것은 풍부하지 못한 대화였다. 지금 이 순간도 걱정이 앞섰다. 미셸과 더 친해지고 싶은데, 둘만의 대화를 많이 하고 싶은데. 영어도 스페인어도 한참 부족한 나는 사전을 뒤져가며 다양한 대화를 해보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미셸은 인내심과 배려가 깊은 친구였다. 그녀는 내가 영어사전을 찾는 것을 지루해하지 않았고, 내가 대화를 다 마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최대한 쉽게 대답해줬으며 내가 알아들을 때까지 계속 설명해주었다. 사전을 찾거나 적어서 보여주기도 했다. 그녀는 아마도 굉장히 훌륭한 영어 선생님일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가족의 안부, 왜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지, 서로의 여행은 어땠는지, 각자의 나라에서는 무엇을 이루었는지, 최근 연애사까지 참 다양한 대화를 나누었다. 나의 짧은 영어실력으로 이런 많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 놀라웠다. 당연히 미셸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나는 그녀에게 최근 볼리비아에서 아팠던 일을 털어놓으며 이곳은 원래 계획에 없던 곳인데 좀 쉬고 싶어서 온 것이라 고백했다.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미셸은 좋은 계획이 생각났다면서 내일 아침부터 서둘러야 하니 일찍 숙소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거라고 했다. 무슨 계획인지 물으려다가 그냥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왠지 그녀라면 정말 근사한 계획이 있을 것 같았다. 그냥 그녀라서 믿음이 갔다. 

우리는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마침 빅토리가 환한 미소로 우리를 반기면서 맥주잔을 흔들어 보였다. 

‘여기 독일 맥주가 끝내주는 거 알아?’ 라며 윙크까지 했다. 

이 좋은 친구들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야? 


불과 어제만 해도 나는 길거리에서 펑펑 울만큼 구겨진 사람이었다. 나 아프고 슬펐던 거 맞아?

어떻게 이렇게 하루아침에 괜찮아질 수 있지? 


지난 열흘 동안 그저 폭풍이 지나간 것이리라, 태풍이 지나고 난 뒤 다시 고요함이 찾아오고 일상이 반복돼 듯 나의 여행은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풍파를 겪고 나면 더 단단해지기 마련이니, 나의 여행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어쩌면 내가 겪은 비바람은 다 거짓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다시 앞으로의 여행을 채워가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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