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시간 이상 연이은 장시간 이동과 지쳐있던 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후 며칠 동안 숙소 근처만 돌아다녔다. 숙소에서 해주는 시티투어를 다녀오고 숙소 근처 골목길만 몇 번을 돌아다녔다. 아무 카페나 들어가도 우아한 멋이 흐르고 마주하는 골목마다 특유의 기품이 넘쳤다. 다른 남미 도시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섹시하고 매력적인 도시다.
부에노스에서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은 탱고 공연을 보는 것이었다. 가장 기대되었던 공연은 “Bar sur”라는 탱고 bar 공연이었다. 어느 블로그의 사진을 봤는데 테이블을 돌아다니면서 탱고를 추는 모습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공연표를 구할 수 없었다. 분명 블로그와 카페글을 통해 티켓부스를 찾아갔고, 현지인에게도 물어물어 제대로 찾아갔지만 티켓부스는 굳게 닫혀있었다. 옆에 있던 현지인이 이유를 설명해줬지만 안타깝게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와이파이가 되는 곳을 찾아서 더 알아볼까 했지만 문이 닫혔는데 별 수 있나? 그냥 깔끔하게 포기하고 원래 다음 날 가려던 피아졸라 공연장으로 향했다. 서두르면 저녁 타임 공연은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피아졸라 공연장은 식사나 음료를 하면서 공연을 볼 수 있는데 운 좋게 비싼 메뉴를 시키지 않았는데도 앞자리에서 공연을 볼 수 있었다. 공연은 뮤지컬처럼 스토리가 있었다. 배우들의 열정적인 눈빛, 움직일 때마다 울리는 구두굽 소리, 치맛자락 하나하나까지 섹시함이 묻어나는 탱고 공연은 우아함과 황홀함 그 자체였다. 악기 연주까지 모두 라이브여서 흐르는 공기조차 후끈한 것 같았다.
공연에 매료되어 주문한 맥주는 언제 나왔는지 한 모금도 하지 않은 채 김이 다 빠져있었다. 공연이 잠시 멈추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같은 테이블의 부부가 그런 나를 보더니 귀엽다는 듯 웃으시며 탱고를 처음 보는 거냐고 물었다. 이런, 다 티가 나나보다. 너무 재밌다고 했더니 이 근처에 탱고 학원이 많은데 여행객을 위한 일주일, 일일 강습도 있으니 관심 있으면 한번 배워보라고 하신다. 귀가 솔깃한 좋은 정보였다.
짧은 대화 후 공연은 다시 이어졌다. 나의 빈 맥주잔을 보더니 부부는 자신들이 마시던 샴페인을 따라주었다. 내가 몇 번을 괜찮다고 했지만 그들은 눈을 찡긋하더니
'나의 나라에서 행복해하는 너에게 주는 아주 작은 호의'라고 했다.
탱고만큼이나 감동이었다. 나도 나중에 한국에서 외국인에게 꼭 써먹어야지.
황홀했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나는 탱고 공연을 보러 갔다. 결국 바 수르의 공연은 보지 못했지만 뭐 괜찮다. 탱고의 발상지인 라 보카에도 다녀왔다. 라 보카라는 도시 자체가 그냥 탱고다. 식당을 가든 카페를 가든 탱고가 흘러넘쳤고 길거리에서도 탱고 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황홀한 도시라니!
부에노스로 돌아와 자유로운 분위기에 가격까지 저렴한 한인민박에 묵었다. 오래된 아파트 한 채를 통째로 숙소로 쓰고 있었는데 낡고 짙은 엔틱 한 분위기와 으스스한 조명까지 더해져 마치 해리포터가 타고 가야 할 것 같은 오래된 수동 엘리베이터가 인상적이었다. 버튼이 없고 손잡이가 달려있다. 문도 없고 도착하면 잘 조준해서 정신 바짝 차리고 내려야 한다.
며칠 전 노부부가 알려준 대로 이곳에 묶으면서 탱고를 좀 배워볼까 했지만 생각보다 강습료가 비쌌다. 여행 막바지리 경비가 너무 빠듯해서 마지막 일정인 '이과수 폭포'를 다녀온 후에 결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며칠 째 이과수를 같이 갈 일행이 없어서 이과수 폭포는 혼자서 다녀오기로 했다. 이과수 폭포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서 볼 수 있는데 며칠 전에 브라질 이과수 폭포를 먼저 보고 싶은 마음에 출발했다가 파나마-브라질-아르헨티나 3개국의 국경선이 만나는 다리에서 길을 잃었다. 다리 위를 헤매다가 여권에 브라질 도장만 찍고 되돌아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브라질 커피라도 한 잔 하고 오는 건데. 덕분에 3개국의 국경선이 만나는 신기한 곳을 만나게 됐다.
하지만 더 이상의 실수 없이 이번에는 제대로 다녀와야 한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물가는 유럽만큼 비싸기 때문에 신중하게 움직여야 한다!
'빙하까지 원 없이 봤는데 폭포가 얼마나 멋있겠어! 경비 아껴서 탱고 일일 강습이라도 받아야지’
다행히 이번에는 무사히 이과수 폭포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이과수 폭포는 하나의 폭포 이름이 아닌 수십 개의 폭포를 아우르는 명칭으로 그중에 하이라이트는 ‘악마의 목구멍’이라 불리는 가장 큰 폭포로 이과수 폭포를 대표한다.(대부분 이 폭포를 이과수 폭포라고 부른다)
그 폭포로 가기 위해서는 숲길을 건너 넓은 아마존강을 건너야 볼 수 있다. 이과수 폭포 전체가 아마존 공원이다 보니 자연의 보존상태가 매우 훌륭했다. 원시시대에 살 것 만 같은 난생처음 보는 아르마딜로부터 이구아나, 이름도 모르겠는 신기한 동식물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곳에 사는 동물들은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돌아다닌다. 우리가 동물친구들을 위해 길을 내어주어야 한다.
여러 개의 작은 폭포들을 지나 악마의 목구멍을 보기 위해 위태위태한 나무다리를 건넜다. 점점 물비린내가 나기 시작했고 희미하게 폭포 소리도 들려온다. 처음에는 이슬이 맺힌 듯하던 물방울이 비처럼 점점 굵어졌다. 그래서 폭포가 가까이 있는 줄 알았는데 한참을 더 들어가야 했다. 도대체 얼마나 큰 폭포일까? 상상이 안 갔다. 다리 아래로는 엄청난 유속의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언제든 무너져 내릴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강의 크기나 유속에 비해 나무다리는 그리 튼튼해 보이지 않았다.
물비린내가 심해지고 비처럼 물방울이 흩날리고 폭포 소리가 굉음처럼 들릴 때쯤 악마의 목구멍이 눈앞에 나타났다.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그것은 내가 감히 상상했던 크기가 아니었다. 감히 상상했던 풍경과 소리가 아니었다. 너무나 경이로워서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 폭포 앞에서 나는 저절로 겸손해졌고 저절로 세상의 모든 것에 감사해졌다.
폭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압도했다. 세상에 오로지 폭포와 나만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웅장한 힘이 있다.
귀로는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엄청난 굉음을, 눈으로는 다 담기지도 않는 압도적 스케일을, 코로는 흐르는 물 냄새를, 손 끝으로는 날리는 물방울과 바람을, 모두 느껴봐야 한다. 온몸의 모든 감각으로 이 거대하고 웅장한 폭포를 느껴야 한다. 사진은커녕 그 무엇으로도 다 담아낼 수 없기에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경이롭고 환상적이라고 느껴진 그 순간 행복함이 벅차올랐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다가 결국 울음이 터져버렸다. 쉴 새 없이 날리는 물방울에 이내 눈물이 씻겼다. 폭포에서 나는 굉음이 나의 울음소리를 삼켰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다.
순간 엄마 생각이 났다. 이 멋진 풍경을 엄마와 함께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폭포 앞에서는 용서도 쉬워지고 모든 것이 겸허해지며 폭포처럼 마음이 드넓어지나 보다. 끊임없이 굉음을 일으키며 물보라를 내뿜는 폭포는 쉴 새 없이 너는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듯했다.
이 지구상에,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광경을 보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누군가는 아마 평생 못 볼 수도 있겠지.
이 멋진 풍경을 보겠다고 나는 스스로 돈을 벌어 머나먼 지구 반대편까지 찾아오지 않았던가!
이미 나는 충분히 멋있고 행복한 사람이다. 폭포는 모두 알고 나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이제 더는 세상을 원망하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보라고. 넌 이미 충분히 멋있으니까.
넌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니까. 이걸 보려고, 이걸 깨달으려고 이 긴긴 여행을 시작했나 보다.
오랜 시간 머나먼 거리를 걸었나 보다.
이 여행은 어쩌면 세상이 나에게 보내 초대장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이 폭포처럼 멋지고 훌륭하다고, 얼마나 황홀하고 대단한지는 직접 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라고.
직접 살아보지 않으면 너의 인생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모르는 거라고.
나 역시 충분히 멋지고 괜찮은 사람이고 나의 인생은 소중하고 행복하다고!
그러니 이제는 하고 싶은 대로 자신감 있게 살아도 된다고!
남들이 아무리 백번 천 번 얘기한다 해도 직접 보고 느껴야 가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나의 가치도 그렇다. 나만이 알아볼 수 있고 나만이 발견할 수 있다.
이과수 폭포 앞에서 나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내내 그랬다. 멋진 풍경을 보고 뒤돌아서면 더 멋진 풍경을 보고. 이보다 더 멋있을 수 없다 싶은데 또 더 말도 안 되게 멋진 풍경이 나타나고. 감동과 벅차오름이 끊이지 않았다.
인생이 매번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어쩌면 세상에는 온통 아름답고 멋진 것으로 가득 차 있을지 모른다.
아직 다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처음에는 나조차도 왜 이 여행을 떠났는지 잘 몰랐다.
굳이 여행에 의미를 두어야 하는 걸까? 사람들은 왜 의미를 둘 하지? 나는 그저 무사히 마치고 싶을 뿐인데. 그런데 막상 여행을 떠나고 보니 어느새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되어 있었고 예전의 나와는 다르게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이 되어있었다.
무엇이 소중한지,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러한 고민은 앞으로의 나의 삶에 용기와 의지를 갖게 해 주었다.
그렇다고 인생이 영화에서처럼 순식간에 바뀌는 건 아니지만 이미 나에게는 충분히 가치 있는 여행이었다. 어떤 모양으로든 여행 이후의 내 일상은 달라져 있었으니까.
정말 인생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