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과수를 다녀온 후 아직도 꿈속에서 덜 깬 듯이 한참 동안 여운이 가시질 않았다. 여전히 폭포 속을 유영하는 듯했다.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왔지만 온 몸에 맴도는 그 여운에 묻혀 탱고에 대한 열정은 잊은 지 오래다.
몇 백 년 된 고풍스러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우아함이 흘러넘치는 공연을 보다가 저녁이 되면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값싸고 질 좋은 아르헨티나산 소고기와 말벡 와인을 사들고 숙소로 향한다. 종종 숙소에서는 저녁 파티를 하기도 한다.
출국일이 보름 남짓 남았을 때 다른 도시를 가볼까 하다가 그냥 부에노스에 머물기로 했다. 로맨틱하고 감각적인 이 도시의 분위기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여행객들이 주는 정보를 하나하나 담아 발길 닿는 대로 다녀보기로 했다. 화려한 조각상이 가득한 묘하게 아름다운 라콜레따 납골당 공원, 오페라극장을 개조해 만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알 아테네오, 오벨리스코, 5월 광장, 헤네리 카 그리고 이름 모를 거리까지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일요일에는 산텔모 벼룩시장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 그중에 굉장히 고운 백발의 할머님 한분이 애지중지 아끼는 물건들을 몇 개 가지고 나오셨는데 하나같이 값나가고 반짝이는 것들이었다. 얼마나 관리를 잘하셨는지 대부분 2-30년 전에 구입한 것임 데도 닳은 구석 하나 없이 반짝거렸고 심지어 정품 택도 그대로였다. 그중에 구찌 시계가 참 마음에 들었는데 가격을 보니 한화로 20만 원이 훌쩍 넘었다. 마음에 들면 가격을 깎아주겠다 하셨지만, 왠지 할머니의 고운 인생과 추억을 깎는 것 같아 사양했다. 무엇보다 여행객에게는 너무 큰 금액이었다. 할머니의 선한 미소와 추억이 더해져 시계는 유난히 더 반짝거리는 듯했다.
출국일이 다가올수록 하루하루가 더 소중하게 다가왔고, 잠들 때마다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막상 출국일이 되니 의외로 덤덤했다. 오랜만에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나니 그냥 또 다른 여행을 떠나는 것만 같다. 이젠 정말 떠나야 할 시간이다. 전날 밤 숙소 친구들과는 적당한 이별주를 나눴으니 유난스럽지 않게 작별인사를 했다.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가장 저렴한 버스를 타고 공항에 도착했는데 우리나라 버스터미널만큼 작고 허름했다.
40여 시간을 달려 6개월 만에 도착한 서울은 너무 낯설었다. 마치 서울에 여행을 떠나온 것처럼.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달려간 곳은 집 근처 포장마차였다. 6개월간의 긴 여행 동안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은 단연 ‘떡볶이’였는데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3일 내내 떡볶이 꿈을 꾸기까지 했다. 첫째 날은 벼농사로 시작해 쌀로 떡을 뽑고 둘째 날은 빨갛게 익은 고추를 햇볕에 말려 속이 비치면 곱게 가루를 내고 항아리에 장을 만들어낸다. 셋째 날, 뽀얀 떡 위로 고추장과 고춧가루, 간장, 설탕과 파를 넣고 통통한 어묵을 잘라 넣어 끓인다. 드디어 떡볶이가 팔팔 끓기 시작할 때쯤 갑자기 잠에서 깬다. 극심한 짜증과 허기가 몰려온다.
3일 동안 온몸으로 ‘체험 삶의 현장’을 찍고 온 듯 피곤함과 서러움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아는 맛이기에 더 고통스럽다. 한국에서 챙겨 온 라면수프와 고춧가루로 매운맛은 달래 보았지만 떡볶이의 그 쫀득한 식감은 채울 길이 없었다. 2,3천 원이면 사 먹는 그 흔한 떡볶이 한 그릇이 그렇게 그리울 수 없었다.
한달음에 달려온 나는 숨도 안 쉬고 떡볶이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그래도 허기가 사라지지 않아 왕창 포장까지 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고는 한동안 집에 들어서질 못했다. 이 집에서 수년을 살았는데 고작 6개월을 떠나 있었다고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여행 중에 잠시 집에 들른 것처럼 여전히 나는 여행 중인 것만 같다. 내 눈앞의 모습이 현실이 아니었으면, 이 여행이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직 적응하려면 한참 걸릴 것만 같다.
정말로 후유증은 꽤 오래갔다. 처음 여행경비를 짤 때 여행 후 취업준비기간을 감안해 두어 달 치 생활비까지 예산에 포함했지만 세 달째가 되도록 나는 예전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취업을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서른이 된 나에게 기회를 주는 회사는 많지 않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직업이 나에게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 거의 확신했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여전히 몰랐고 여행을 다녀왔다고 해도 그건 달라지지 않았다. 배낭여행을 다녀왔다고 하루아침에 인생이 달라지는 건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현실은 생활비가 다 떨어져 가는 무수저, 경단녀일 뿐이다. 불면 날릴 흙도 없는 무수저!
결국 다시 경력을 살려 취업을 해야 했고 비록 적은 월급의 작은 회사였지만 그것마저도 감사했다. 그런데 예전이라면 야근하는 것도 아침 일찍 회의에 매주 하는 회식이 그저 힘들고 불만이었을 텐데 이상하게 딱히 힘들거나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일일이 숙소를 찾아다니며 하루 일과를 세우는 것보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하고 주어진 업무를 매뉴얼대로 해내는 것이 더 수월한 것 같았다.
정말 인생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일까? 나에게 꾸지람하는 상사도 싫지 않았다. 그래, 내가 실수할 수도 있지! 내 험담을 하는 동료도 밉지 않았다. 그래, 다 내 맘 같을 순 없지. 회식하는 날은 저녁 밥값 굳고 좋지 뭐, 아침 회의 덕에 나도 아침형 인간으로 살아보지 뭐.
회사생활이 마냥 즐겁다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괴롭지는 않았다. 업무체계도 엉망이고 급여도 복지도 좋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하지만 직원들의 이직률이 너무 높았고 회사 분위기는 언제나 위태위태했다. 그렇다면 내가 너무 현실에 안주한 것은 아닐까. 매일매일 시키는 일만 제대로 한다면 생활비 걱정 없이 저축도 하고 여행도 다닐 수 있겠지만 하루하루 재밌을 것 같진 않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이곳에서 나의 미래는 없었다.
하지만 서른 살, 또 다른 도전을 하기에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새로운 꿈을 꾸어도 될까?
서른이지만 여전히 20대와 같은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20대의 인생을 아무리 되감아보아도 일도 인간관계도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이 없었다. 열심히는 살았지만 무언가를 꿈꾸며 살지는 않았다. 꿈이 없으니 계획도 없었다. 심지어 작은 도전조차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목적 없이 그저 주어진 ‘일상’에 최선만 다했을 뿐인데 나는 열심히 살았다고 착각을 했다.
이제는 솔직하게 실패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다시 되돌릴 수 없다면, 서른이지만 지금이라도 새로운 꿈을 꾸어야 한다.
“지금이 새로운 꿈을 꾸기에 딱 좋은 타이밍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배낭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 1년 후 나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쇼핑몰 사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주변에선 하나같이 나를 뜯어말렸고 시작도 안 했는데 이미 다 망한 것처럼 나를 걱정했다. 내가 남미 여행을 가겠다고 했을 때도 나를 뜯어말렸던 게 생각났다. 여행처럼 사업이라는 것도 겉으로는 화려하고 남들 보기엔 부러워만 보여도 현실은 무척 달랐다. 남모를 고충이 상당했다.
열심히 준비하고 시작했지만 현실은 참담했다. 며칠 째 하나도 판매하지 못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그 흔한 포토샵조차 다룰 줄 몰랐고 네이버에 검색어를 치면 보이는 것이 광고라는 것도 몰랐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회사생활이 할 만해 졌다며 또다시 실패한 현실에 안주하고 싶지 않았다. 하나도 바꾸지 못한 현실에 다시 갇혀 우물 안 개구리로 남고 싶지 않다.
나름 열심히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을 너무 쉽게 봤다. 무거운 배낭 메고 다니면서 고생 좀 하면 눈앞에 뚝딱 펼쳐지던 아름다운 풍경들이 세상의 전부인 양 단단히 환상에 빠진 모양이다.
힘들게 남들 가기 힘든 여행 좀 다녀왔다고, 인생사 마음먹기 달렸다고 우쭐대며 회사생활 좀 쉬워졌네, 그러니 이제 도전을 해보겠다며 그새 거만해진 모양이다. 기고만장해진 나는 제대로 큰코다쳤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용기로 착각한 무모함이 넘쳤고 그 내면 깊은 곳에는
‘그 험난한 배낭여행도 해냈는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조금 있었다.
하지만 망치더라도 망가지지는 않을 자신은 있었다. 그것은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겸손한 마음으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작은 목표부터 세우기로 했다.
‘내가 지금 대기업에 다닌다면 얼마의 연봉을 받을 수 있을까?’
그게 첫 번 째 목표였다.
당장 밤낮으로 포토샵을 익혔고 수많은 쇼핑몰을 참고하며 각종 서적과 강의를 통해 마케팅부터 공부했다. 낮과 밤이 뒤섞인 채 무식하게 공부하고 일했지만 딱히 좌절하거나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돈이 없어서 한동안 친구들도 안 만났고 아파도 병원을 못 갔다. 그러다가 저렴하게 광고를 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사기를 당하고 말았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궁핍한 생활에 큰 타격을 받았고 결국 당장 생활비가 없어 대출까지 받아야 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이르렀다.
광고 사기는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왜 광고대행사는 무료로 네이버에 광고를 해주는 것일까’라는 의문만 가졌어도 피할 수 있었다. 광고의 흐름과 생태계를 알기 위해 독하게 매달렸다. 신기하게도 직접 광고를 하고 나니 매출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2년을 버티니 좀 살만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대출금을 모두 갚을 때까지는 수많은 좌절감과 패배감에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로 수많은 밤을 지새웠다.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도 많았고 죽고 싶다는 작은 생각이 혹시나 현실이 될까 두려워 자주 다니던 양화대교와 한강 대료를 일부러 피해 다녔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다 견디고 보니 무너지지 않고 버텨주었던 나는 실로 강한 사람이었다. 부자가 된 것은 아니지만 노력하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또 다른 도전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도전의 원동력은 남미 여행이었다. 그때의 선택은 서른 살의 나에게 용기를 주었고 서른 살의 도전은 ‘미래의’ 나에게 자신감을 주고 계속 꿈을 꾸게 했다.
이것이야 말로 긍정적인 나비효과가 아닐까? 이제는 두 번째 꿈을 가져보려고 한다.
폭풍 같은 서른을 보내고 수많은 시련을 겪고 나니 서른 살에도 도전할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서른 살은 도전하기에 딱 좋은 타이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