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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선미 Jan 17. 2022

비코의 병

2020년 5월 16일


  점심을 먹기 전 엄마하고 통화를 했다. 이러저러한 이야기 중에 엄마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하신다. 비코의 병에 대해서였다. 얼마 전부터 비코가 밥을 먹을 때 소리를 지르고 잘 먹지 않는다고 하시더니 결국 병원에 데리고 다녀오신 모양이다. 꽤 큰 고양이라서 혼자 데리고 다녀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난 어떻게 데리고 가셨냐고 묻지도 않았다. 아마도 수레에 싣고 가셨던가 아니면 끌차에 이동장을 올려 묶어서 끌고 가셨을 거다. 언제나 밥을 맛있게 잘 먹는 비코는 얼마 전부터 사료를 먹을 때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설 때가 있다는 거였다. 난 비코 이빨을 살펴보라고 했었는데 어느 결에 병원까지 다녀왔다고 하는 걸 보면 꽤나 심각했나 보다. 지난번 통화에서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 와서 밥을 잘 먹는다고 하더니 다시 아파졌는지 밥을 못 먹는다고. 엄마 곁을 잠시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비코가 우리 집에 온 지 올해로 벌써 12년째다. 내가 기르다가 이탈리아로 들어오면서 엄마에게 맡기고 온 고양이다. 이젠 나보다 엄마를 더 잘 따르고 쫒았다니는 영리한 고양이인데 고양이 나이로 치면 칠순이 넘은 노인 고양이니 이제 이도 아프고 다리고 아프고 보이지 않는 많은 곳이 아프고 불편하리라고 짐작만 해본다. 


  동물병원 의사는 비코 입안에 종양이 있다고 했단다. 주사로 치료가 안되면 수술을 해서 종양을 제거해야 하고 종양 조직검사를 받아야 암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면서, 만약에 암이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단다. 노인들에게 돈이 여의치 않은 경우가 많으니 자녀들하고 상의하고 치료를 진행할 건지 결정하자고 미리 선수를 친 모양이다. 비코가 암에 걸렸을 수도 있으니. 수의사는 친절하게도 수술만 할 때와 암 치료를 할 때의 비용도 간략하게 정리해서 알려준 모양이다. 수술비용만 20만 원 정도가 들 거라고 했다고 하셨다. 노인들에게 20만 원까지는 쓸 수가 있겠지만 그 이상은 너무 많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엄마는 고양이가 아파하는 걸 어떻게 보겠느냐고. 말도 하지 못하는 짐승이 불쌍해서 치료해줘야 안겠냐고 은근하게 속내를 내 비치셨다. 


  난 다르게 생각한다. 고양이가 원하는 건 어떤 걸까? 암 치료를 받고 싶을까? 더 살고 싶을까? 난 엄마에게 수술까지는 해보자고. 하지만 암이라면 치료를 포기하자고 했다. 아니 포기하시라고 했다. 엄마 나이가 83세인데 아픈 고양이를 데리고 병원을 다니는 것도 힘들 것이고. 무엇보다 고양이가 영문도 모르면서 고통을 당하며 치료를 받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만약 나에게도 같은 문제가 생기면 치료를 받지 않을 작정이다. 출생을 자연의 순리에 따라 했다면 죽음도 자연의 섭리에 맞게 맞고 싶다. 나중에는 어떤 생각이 들어서 어떤 요구를 할지 모르지만 이 생각에 변함이 없길 바란다. 고양이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다고 한다. 현재를 사는 것에 모든 것을 거는 고양이가 암 치료를 원할 리가 없다. 영문도 모르고 받는 방사선 치료로 입맛이 없고, 아프고, 주사를 맞아야 하고, 억지로 약을 먹어야 하고. 이런 고통은 인간들이 스스로 미안하지 않고 해 줄 만큼 해줬다는 자기만족을 위해 시키는 행위가 아닐까? 고양이가 12년을 살고 병이 들었다면 그의 마지막을 존엄하게 지켜주는 것이 더 맞는 일 일 것 같다. 고양이답게 죽는 것. 


  시누가 기르는 거북이 디도도 얼마 전 큰 수술을 했다. 디도는 신장에 결석이 생겼는데 수술이 쉽지 않아 두 번째 시도에 겨우 수술을 하고 결석을 제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결석 크기가 엄청 컸다. 겨우 2킬로나 될까 하는 작은 거북의 신장에 직경이 1.5센티미터가 넘는 돌덩이가 있었으니 얼마나 아팠을까. 어항을 온통 갈색 물로 만들어 놓고 나서야 디도는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너무 늦지 않았기를. 하지만 수술 경과가 썩 좋질 않아 집에 왔다가 다시 입원을 했다. 이 상황이면 최후를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디도는 20년째 시댁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마주하고 있다. 비코도 디도도 우리도. 죽음이 비극적인 사건일까? 비코가 죽는다면 난 무척 슬플 거다. 아직도 어린 비코가 집에 왔을 때를 선명히 기억한다. 하마 인형 위에 널어놓은 빨래처럼 자던 모습이며, 집 앞 소나무에 올라가 내려오지 못하고 울던 모습, 아다지오 연못 앞에서 행복에 겨워 뒹굴던 모습, 앞집 창문에 올라앉은 암고양이를 기다리던 모습. 비코는 나에게는 아들 같은 고양이다. 하지만 비코는 나보다 세월을 빨리 살았고 이제 칠순의 고양이이므로 언제든 병은 생길 수 있는 거다. 난 비코가 비극적으로 오래 살기보다 고양이답게, 연장되지 않은 수명을 살기 바란다. 나이 많은 엄마에게는 좀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존엄한 죽음보다 더 생명을 귀하게 만드는 게 있을까? 


한 때 동네 최고의 미남 고양이었던 비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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