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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선미 Jan 17. 2022

나도 미나리를 보았다

2021년 3월 20일

   계획 없이 미나리 영화를 보게 되었다. 홍대 역 앞에 있는 메가박스의 상영관은 아주 높은 곳에 있어서 여러 번 에스컬레이터를 갈아타고 올라갔다. 좁고 긴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면서 약간의 흥분을 느꼈다. 영화관 안에는 우리보다 먼저 온 한 커플이 있었을 뿐 거의 비어있었다. 그 후로 두 명이 더 들어와서 모두 7명이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중간에 필름을 자른 것처럼 시작했다. 지루해하는 아이의 얼굴이 보이고 운전석 백미러에는 긴장하고 불안해 보이는 엄마가 보였다. 마른눈. 워낙 유명한 영화라 이렇게 저렇게 주워들은 이야기가 많아선지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에는 문제가 전혀 없었다. 또 아주 단순한 짜임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우선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좋았던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의 속도가 아주 편안했다는 것이다. 공기를 호흡하는 것처럼 영화는 몸에 꼭 맞게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이어졌다. 도입, 전개, 절정, 결말의 틀에 따라가지 않고 자기만의 속도를 유지하면서. 그 안에 아주 섬세한 소품과 연출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80년대 이민 온 한국 가족의 살림살이 재현은 정말로 정교했다. 양동이 안에 들어있는 파란 바가지, 미국 양동이와 나란히 서 있는 노란색 들통, 서랍장 위에 개켜놓은 이불은 미국식 살림살이들 사이사이에서 그 가족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때가 묻은 파란 바가지는 왜 캘리포니아를 떠나 아칸소까지 따라왔을까? 노란 칠이 많이 벗겨진 찌그러진 들통은 어떻게 미국까지 올 수 있었을까? 서랍 장위에 이불을 개 얹는 사람들. 모란이 그려진 액자. 사실 이런 잡동사니들은 그들이 이른 성공을 했다면 모두 버려졌거나 보이지 않게 가려졌을 텐데 이들은 성공하지 못한 이민자들로 아직 미국 사람도 한국사람도 아닌 그 사이에 껴버린 사람들이었던 것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영화는 많은 설명을 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영화는 마치 앞만 보고 가는 아이처럼 한 가족에 대해서만 집중하고 대담하게도 이야기를 풍성하게 할 수도 있는 배경이나 주변을 과감히 생략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은 아름답거나 섹시하거나 근육으로 단련되지도 않은 사람들이다. 트레일러 집 아래에 있는 작은 땅 위에 헨리 폰다처럼 서있는 아빠는 외로워 보인다. 병아리 성별 감별을 더 잘하기 위해 집에서까지 연습을 하는 엄마는 거의 절망적이다. 하지만 영화는 절망적이라고 울지도 화내지도 않는다. 울고불고 화내고 뒤통수 잡고 쓰러지고 후회하고 싸우는 전형적인 한국 드라마의 룰을 따르지 않고 그렇다고 억지로 웃기고 큰 규모로 놀라 자빠지게 하는 미국 영화의 룰을 따르지도 않는다. 이런 강함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건지 궁금해졌다.


  두 번째로 좋았던 건 이 가족을 둘러싸고 등장하는 최소한의 미국인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뉴욕이나 시카고처럼 대도시에서 옮겨다 놓은 사람들이 아닌 정말 아칸소에 사는 사람들 같았기 때문이다. 턱이 기이할 만큼 커다란 의사, 키가 2미터는 될 듯한 지나가는 여자, 처음 보는 아이에게 넌 왜 얼굴이 그렇게 납작하냐고 묻는 눈만 크고 비쩍 마른 못생긴 아이,  밤새 놀다 와서 아이에게 비밀을 지켜달라 하는 이가 시커먼 아빠,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정신줄을 놓쳐버린 남자,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초라하고 균형이 맞지 않는 얼굴과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수많은 미국 영화에 등장하는 멋진 몸매에 세련된 얼굴을 한 미국인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아서 신기하기도 했고 현실적이기도 했다. 우리도 시골에 가면 항상 초라하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옷차림을 한 그 동네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던가. 감독의 경험을 영화로 만들었다고 하더니 정말 그랬었나 보다. 할머니가 손자를 데리고 개울가로 가서 '미국 바보들은 모르지'라고 말하는 때는 정말 신이 났었다. 미국의 그 누구도 이 가족들보다 나을 것이 없어 보이는데 오히려 가장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이들이라니. 비빌 언덕이 없어진 사람들만큼 외로운 사람들은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는  화재가 나고 집 나가는 할머니를 돌려세운 가족은 고단한 잠에 빠진다. 화재를 내고 죽을 기회마저 놓친 할머니는 의자에 앉아 바닥에서 정어리처럼 나란히 잠든 가족을 내려다본다.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피에타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결국 가족을 보호해 주는 사람은 반신마비에 말도 못 하는 늙은 엄마다. 그래도 이런 엄마라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얼마나 많은 것을 굳이 설명하지 않고도 말하던지. 보고 나서도 여운이 오래 남았다. 

 

  영화 미나리가 인기가 많아지니 미나리 반찬도 인기가 많아져서 요즘 미나리 값이 따라 올랐다고 한다. 신문에도 미나리에 대한 기사가 나오기도 한다. 80년대 시골에는 돌미나리가 흔해서 요맘때면 쭈그리고 앉아 잠깐 동안 베어다가 데쳐서 고추장에 무쳐먹곤 했다. 햇볕을 보고 자라 붉은빛이 돌던 어린 미나리를 먹을 때 나던 향과 고추장의 단맛이 생각난다. 정말 아무데서나 논 근처에 물이 있는 곳이면 잘 자라던 미나리. 요새야 돌미나리를 볼 수도 없고 파는 곳도 없으니 슈퍼에 있는 늘씬하고 푸른 미나리에 만족해야 한다. 


  미국만이 아닌 전 세계 구석구석에서 살고 있는 많은 미나리들을 생각한다. 나도 그중 하나지만 비빌 언덕 없이 외롭게 살아가는 미나리들에게 위안이 되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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