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엄마를 기억하며
자꾸만 행주, 러닝셔츠, 베갯보가 누렇게 변해가는 거다. 자주 빨래를 하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하고 빨래가 많이 모이기도 전에 해 봐도 누렇기는 마찬가지다. 햇볕에 바짝 말리면 더 하얘지지 않을까 해서 해가 쨍쨍한 날 때 선글라스까지 쓰고 널어봐도 부서질 듯 바짝 마르긴 해도 희어지진 않는다. 세탁기 최대 온도인 90도로 설정해서 빨아봐도, 미지근한 40도로 빨 때보다는 낫지만 맘에 들게 희어지지는 않았다. 요리 수업하러 사람들이 왔을 때 어떻게 흰 빨래를 희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베이킹파우더를 넣어보라며 콕 집어 제품 이름을 알려주는 사람도 있고, 역시 락스만 한 게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냥 버린다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베이킹파우더도 넣어봤고, 락스를 넣어서 중간중간 희끗희끗하게 탈색이 된 셔츠도 생겼고, 손으로 비벼 빠느라 손목이 아프기까지 했지만 맘에 쏙 들만큼 효과는 없었다.
남편은 평생 목을 안 씻는 건지 베갯보, 셔츠, 러닝 셔츠를 누릿 누릿하게 만들어 놓는다. 희고 보송보송한 러닝셔츠를 그는 언제 입어봤을지… 그의 셔츠나 속옷을 희게 만드는 게 나의 의무는 아닐 터… 그래도 거듭된 빨래로 천들이 나달 나달 해 질 때까지 빨아대도 점점 더 누래지는 옷들을 견딜 재간이 없다. 손가락 사이에 남는 찐득한 느낌의 기름때, 다 마른빨래에서 나는 기름에 결은 듯한 쿰쿰한 냄새는 질색이다. 결국은 전통적인 방법을 써보기로 한다. 삶는 거다. 집에 있는 가장 큰 냄비를 꺼내고 가장 눈에 거슬렸던 남편의 러닝셔츠 열 장을 우선 삶기로 했다. 빨랫비누를 칠하고 냄비에 앉혀 가스불에 얹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비누가 녹아 푸른빛의 물이 냄비 안으로 돌고 집안에서는 빨래 삶는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깨끗한 냄새다.
엄마는 일곱 식구의 빨래를 혼자 해 내셨다. 세탁기도 없었고 집안에 수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커다란 고무 함지에 빨래 거리를 담아 이고는 윗마을 빨래터로 가셨다. 물이 샘솟아서 연속 흐르는 그곳은 날마다 동네여자들이 빨래를 하러 오는 곳으로, 여름이면 꼬질꼬질하기 짝이 없는 우리들의 머리를 감기거나 적당한 목욕을 시키던 곳이기도 했다. 엄마는 빨래 함지에 빨랫비누, 빨래 방망이 등을 같이 넣어서 이고 갔다. 머리에 인 함지를 한 손으로 꼭 잡고 다른 손은 휘휘 저으며 빠른 걸음으로 앞서가면 나는 막대기 하나를 쥐고 하릴없이 따라갔다. 빨래터는 제법 커서 한 번에 여섯 명 정도가 동시에 빨래를 할 수 있었다. 추운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아 일 년 내내 먼 이웃 동네에서 올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입김이 하얗게 뿜어져 나오는 겨울에 엄마는 고무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빨래를 했는데 손이 시리지 않느냐고 물으면 물이 따뜻해서 괜찮다고 하셨다.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손가락을 물속에 넣어보면 분명히 차가웠는데 물이 따뜻하다니. 빨래터에 도착한 엄마는 수인사를 하자마자 자리를 잡고 썩 썩 썩 빨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우선 빨랫감을 흐르는 물에 적신 후 네모난 빨랫비누를 그 위에 비벼서 묻히고 두 손으로 젖은 옷을 돌판에 비비면서 거품을 내는 거다. 쭈그리고 앉아 빨래를 비비게 되니 돌 위에 빨래를 비빌 때마다 엉덩이가 들썩들썩거리고, 다 비빈 빨래를 물에 축일 때는 입술 사이로 스스스 소리를 내곤 했다. 때가 쩐 바지나 양말, 속옷은 방망이를 이용했는데, 비누를 칠한 옷을 돌판 위에 얹고 오른손으로 방망이로 때려서 때를 빼내는 거다. 방망이질을 할 때면 고개를 왼편으로 살짝 비틀고 야무지게 두드렸다. 방망이질이 한창일 때 엄마는 또 한 번 들썩들썩 엉덩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초벌 빨래가 지나고 물에 빨래를 헹굴 때면 가져온 함지에 물을 담아 비누기가 아직 남아 있는 빨래를 물에 흔들어 한 손으로 들어 올리면서 다른 손으로 맞잡아 비틀어 짰다. 비누기가 빠지라고 물속에서 빨래를 휘휘 저을 때면 여지없이 스스스 하는 소리를 내곤 했다. 여러 번 헹구어 비누기가 다 빠지면 빨래터 앞에 있는 탱자나무에 걸쳐둔다. 탱자나무는 촘촘하게 엉겨있고 손가락 길이만큼 기다란 가시가 많아서 무거운 빨래도 잘 잡아줬다. 햇볕이 좋은 날이면 이집저집 빨래가 널려서 집집마다의 속사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그러나 고작 500명 남짓 살던 작은 섬마을에는 같은 장사치가 지나가며 물건을 팔았기 때문에 비슷한 속내복, 양말, 스웨터가 걸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빨래를 걸어 널어놓고 나면 물이 빠지길 기다려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물이 빠지지 않은 빨래를 다시 집까지 이고 가야 하는데 무게가 여간 많이 나가는 게 아니었다.
가끔 햇볕이 좋고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면 아이들은 강제로 머리를 감기기도 했다. 샴푸나 린스가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빨래하다 남은 비누를 머리에 묻혀 비벼서 감기는 거다. 아직 차가운 물에 머리를 담그고 그 위에 빨랫비누까지 칠하면 여간 난감한 게 아니다. 눈으로는 비눗물이 들어가 눈이 맵고 아픈데, 차가운 물에 머리를 담가야 해서 허리를 잔뜩 구부린 채 엄마와 싸워야 하는 거다. 눈이 맵다고, 머리카락이 당긴다고, 춥다고 아무리 항의를 해도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번 비누칠을 하고 목덜미며 손등이며까지를 물에 담가 씻어냈다. 이러는 동안 빨래에서는 물이 빠지고 엄마는 함지박에 빨래를 담아 이고 아직도 억울한 나에게는 비누곽을 쥐어주셨다. 집에서 올 때 들고 온 나뭇가지는 버리고 비누곽을 들고 아직도 덜 마른 머리카락에 머리를 감는 동안 이리저리 몸을 비트는 통에 다 젖어버린 바짓가랑이를 한 채 엄마를 따라 집으로 가곤 했다.
엄마는 때가 찌든 흰 빨래는 커다란 양은 냄비에 모아 두었다가 삶곤 했다. 식구가 많았으니 빨래도 많았고 찌든 속옷이며 수건, 이부자리 등도 많았으리라. 커다란 냄비에 비누를 썩썩 묻힌 빨래를 넣고 물을 적당히 넣은 다음 불을 때면 솔솔솔 빨래 삶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지금 그 비슷한 냄새가 나고 있다. 젊은 엄마를 추억하는 건 언제나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