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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선미 Jun 27. 2022

파스타체치

병아리콩 파스타

'나는 로마에 정착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로마에 살기 시작한 지 9년 차인 요즘 들기 시작한다. 날씨 좋고 물가 싸고 의료비 적고 음식도 좋은 곳, 거기다 시내에 나가면 눈호강을 할 수도 있으니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는가?라고 생각될 수도 있는 곳인데 말이다. 


 시어머니 실바나는 여름에도 뜨거운 음식을 잘 만들어 낸다. 이주 초기에는 집을 구할 때까지 시댁 식구들과 함께 살기도 했고, 집을 구해 나간 후에도 종종 들러 저녁을 먹었다. 요즘에는 축구경기가 있는 날에나 저녁을 먹으러 가는 정도로 횟수가 줄었다. 모두 모여야 여섯 식구의 작은 가족이지만 주방만큼은 열식 구인양 분주하다. 음식에 진심인 이 가족은 끼니마다, 날마다, 철마다 다른 음식을 먹으려 애쓰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요리학교에서도 보지 못한 다양한 집 요리를 만나게 되었다. 병아리콩 파스타는 겨울에 먹으면 좋은데 우리 집에는 재작년에 얻은 병아리콩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 요즘 궁리가 많다. 


 단단하기가 대리석 같은 병아리콩은 음식에 바로 쓸 수는 없고 반드시 미리 익혀낸 다음 요리해야 한다. 하루 전에 미지근한 물에 담가 충분히 불린 다음, 냄비에 물을 넉넉히 붓고 한 시간 이상을 족히 삶아야 부드럽게 익는다. 불릴 때 식소다를 조금 풀어넣고 불리면 익혔을 때 더 부드럽다. 대신 소금은 미리 넣고 익히면 단단해질 수 있으니 마지막에 넣어준다. 콩을 삶을 때에도 올리브유, 당근, 셀러리, 양파를 함께 넣고 익히면 콩 삶은 물을 쓰기에도 좋다. 


 병아리콩 파스타는 이렇게 익혀낸 병아리콩과 그 삶은 물에 병아리콩 만한 파스타를 넣어 익혀 먹는 음식이다. 콩을 익힐 때 감자를 잘라 넣고 익혀서 푹 익은 감자를 주걱으로 으깨 넣어주면 국물이 더 진해지면서 콩과 파스타가 잘 어우러진다. 실바나는 국물이 너무 흥건하지도 않게 그렇다고 너무 야박하지도 않게 해서 숟가락으로 떠먹을 때 입안을 촉촉하게 해 주고 너무 빨리 국물을 삼키지도 않게 한다. 콩 익히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게 국물의 양 조절이다. 이 음식의 특이한 점은 로즈마리를 넣는다는 거다. 실바나는 생 로즈마리 줄기를 넣어 익히지만 난 건조로즈마리를 마지막에 뿌려주는 방식을 좋아한다. 병아리콩 특유의 냄새를 줄여주기도 하고, 식욕을 불러오기도 한다. 특히 완성된 요리 위에 솔솔솔 뿌리는 재미도 있어 의식처럼 잊지 않고 꼭 하는 편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공을 들여 파스타체치를 완성하면 깊이가 있는 접시에 담아서 낸다. 국물요리를 좋아하고 뜨거운 음식은 뜨거울 때 먹어야 한다고 믿는 나는 김이 폴폴 오르는 접시에 바짝 다가앉는다. 그런데 식탁에는 나만 앉아 있다. 음식을 준비한 사람도,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참견만 한 사람도, 방금 바깥에서 돌아온 배고픈 사람도 식탁에는 없다. 이건 또 왜? 단단한 병아리콩이 물에 불려지고, 깊은 냄비에서 부드럽게 익고, 다시 파스타면과 함께 익어간 긴 시간을 기다려서 이제 먹을 차례인데 막상 로마인들은 너무 뜨겁다고 식을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란다. 


 음식을 하다 보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들이 제법 많다. 난 긴 시간 동안 요리하는 것도 좋아한다. 완성된 요리가 10이라면 처음 콩 불리기는 1, 콩을 냄비에 앉쳐익히기는 3, 감자를 으깨고 파스타를 넣어 익히기는 3이라고 하자. 나머지 3은 기다림과 기대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음식은 점점 부피가 자라고, 색깔이 변하고, 맛이 커진다. 시간의 추이와 함께 음식에 대한 상상이 자라고, 침샘의 분비가 많아지고, 코가 찾아내는 냄새가 많아진다. 그러면서 오감이 전방위적으로 커지게 되는데 난 이 과정을 즐긴다. 


 이렇게 더운 날 두세 시간을 족히 들여 음식을 완성하고도 결정적인 순간을 미룰 수 있는 이 사람들이 나에게는 다르게 보인다. 


 나는 아직 뜨거운 콩을 후후 불며 먹기 시작한다. 감자와 파스타면에서 나온 전분이 걸쭉하면서도 달콤하게 부드러운 국물을 만들고, 파스타가 탱글하게 씹히고, 충분히 익어서 살짝만 씹어도 부드럽게 퍼지는 콩이 함께 섞여 입안을 채운다. 숟가락을 입으로 가까이 가져갈 때마다 로즈마리 향기가 나면서 머릿속에서는 로즈마리가 주었던 좋은 기억을 찾아내느라 바쁘다. 이 과정이 한꺼번에 일어나면서 숟가락질은 더 잦아지고 입안에서는 신나는 벨벳 파티가 연속 열린다. 한여름에 먹는 파스타체치의 맛이다. 


 시내의 소박한 식당에서 10 유로면 사 먹는 음식이지만 식탁에서의 존재감은 대단하다. 냄비 가득 준비한 파스타체치가 거의 다 사라지고 식구들은 아까보다 더 느긋하게 즐비한 음식들을 먹어댄다. 

식탁에서만큼은 로마에 정착할 수 있을지, 원하는 일을 찾게 될지,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있을지 잊어버린다. 음식에 집중하면 일상의 고민은 잠시 유보되고 난 또 하루를 일주일을 살아간다. 나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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