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권의 일기장
3. 일기를 시작해 보자
2011년 1월 1일
일기를 시작해 보자
세월이 유수와 갓구나
아니 벌서 12월이 다 지나가고
새 아침이 발간네
나는 6시 부터 일어나서
해뜨는 걸 보려고
거실에서 두 손 모아 기달렷는데
8시 21분에 떳다
나는 두 손 모아 소원성취 일워달라고
천번 만번 빌고
나를 비롯해서 아들 딸 8남매 다
건강하게 해주시라고 빌었다.
엄마 일기장의 첫권 첫날의 일기입니다.
새 일기장을 받으시고 엄마는 며칠을 기다리셨다가 새해 첫날부터 일기를 쓰기로 결심을 하셨나 봅니다.
똑 떨어지게 엄마의 일기장은 새해 첫날을 기록하는 일로 시작됩니다.
12 식구 살림을 챙기면서 집안의 대 소사를 잘 기억하고 미리 계획하고 실천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조상님 제사에 시부모님 생신에 여덟 자식들 생일과 24 절기를 챙기는 일까지 엄마는 하나도 빼놓고 잊어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농사일도 마찬가지였지요. 각종 씨앗을 뿌리는 시기, 모종을 심는 시기와 수확할 적절한 시기를 기억해서 적당한 날을 잡고 계획을 세워 일을 해 내셨지요. 그런 한평생을 살아오신 습관이 처음 일기장을 쓰시는 날도 택일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엄마에게 일기 쓰기의 시작은 중요한 일이었나 봅니다.
‘일기를 시작해 보자’
팔십 년 인생을 살아온 엄마의 일기의 첫 시작은 결연합니다.
좌고우면 없이 일기에만 온 정신을 또렷이 집중하는 문장입니다.
엄마는 이 일기를 시작으로 4년 3개월 동안 파란만장했던 당신의 삶과 자식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셨습시다.
그 기나긴 기록의 시작이 담백하면서도 결기가 있어 읽는 제 마음이 웅장해집니다.
‘세월이 유수와 같구나’라는 문장은 뼈에 사무칩니다.
엄마의 세월은 마치 거대한 강물이 굽이굽이를 돌아 먼 길을 가듯,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흘러갔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당신 생은 12 식구의 몫을 짊어지고 흘러야 했기에 어느 누구보다 더욱 무겁게 흘렀을 것입니다. 그 길고 무겁던 세월도 당신에게는 눈 깜짝할 세월이었겠지요.
‘나는 6시 부터 일어나서
해뜨는 걸 보려고
거실에서 두 손 모아 기달렷는데
8시 21분에 떳다’
평생 새벽 일찍 제일 먼저 일어나 정화수를 떠 놓으시던 그 마음이 느껴집니다.
아직 세상이 잠들어 있는 새벽에 차가운 거실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동쪽을 향해 하염없이 앉아 계셨을 그 뒷모습이 떠오릅니다.
새해의 염원을 담아 떠오르는 태양에게 손과 마음을 모으던 거실은 한 가족의 안녕을 비는 숭고하고 경건한 기도처였을 것입니다.
2시간 21분! 그 시간 동안 엄마에게는 얼마나 많은 상념이 떠올랐을까요.
그 고요한 기도 속에서 이끌어 낸 것은 ‘나를 비롯해 아들 딸 팔 남매 다’ 모두 건강하기를 비는 마음이었습니다. 당신이 건강해야 자식들에게 짐이 안 될 것이고 그래야 모든 자식들이 평안하게 건강을 누릴 수 있을 것이리라 생각하셨을 겁니다.
엄마에겐 자식들이 전부였고 자식들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절대적 이셨는지 이 첫 일기에서부터 느껴집니다.
엄마! 첫 일기를 쓰신 후 15년이 지나서 글을 읽어보니 가슴에 사무치는 일이 많기만 합니다. 우리 팔 남매는 엄마의 바람대로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유치원생 같은 글씨체로 또박또박 눌러쓰신 엄마의 일기장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엄마의 삶도 추억해 보고 저희들 사는 모습도 들려드리겠습니다.
벌써 다음 장에는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