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여름⑨ 잘 먹는 것!

마흔에 법을 공부하다

by 찐인구

크리스마스이브, 사직서를 냈다.

멀쩡하게 잘 다니던 회사를 너무도 평온한 표정으로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내 모습에 부장의 표정은 짐짓 복잡해 보였다. 편집국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느닷없는 사직서 제출은 선후배 기자들 모두 의아해한 선택이긴 했다. 그들이 퇴사 이유를 궁금해하는 건 당연했다. 반응도 다양했다.


“어디 좋은 데로 이직하나 봐.”

“정치권으로 가니?”

“그만두고 뭐 할 건데.”

“힘들어도 그냥 신문사 다녀. 여기가 전쟁터지, 나가면 생지옥이야.”


그 힘든 기자 생활을 16년이나 해놓고, 왜 ‘안정’을 걷어찼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 곧 부장 승진을 앞두고 신문사라는 조직을 벗어나려 하자 주변에서는 걱정과 우려를 가장한 온갖 오지랖이 이어졌다.

나를 걱정한 얼굴들이었지만, 걱정과 오지랖은 종이 한 장 차이.

나는 단 하나의 이유로 그 모든 걸 내려놓았다.


“출근길, 설렘이 없어요.”


이 한 문장이 전부였다.




창밖은 여름⑨ 잘 먹는 것!.jpg 딱 마흔에 16년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찐인구


포장된 넓은 8차선 도로 위에서 누구나 꿈꾸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퇴사를 나는 결국 해냈다.

편집국 사람들은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을 싸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호강에 겨운 결정 아니었다.

태어나서 처음 내린 가장 주체적이고, 선제적인 선택이었다.

안정감은 여전히 일자리 선택의 중요한 기준.

‘안정’ 대신 ‘설렘’을 선택한 나는 경력을 살려 곧바로 공직에 입문했다.

나 또한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나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던지는 무게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마흔 살에 법 공부.


“나이 들어 무슨 공부야.”

“로스쿨 가게?”

“박사 따서 뭐 하게.”

“너무 열심히 살지 마.”


여전히 타인들은 말들이 많았다.

인생의 공백과 쉼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툭툭 던지는 질문과 말들에 나는 딱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월급 따박따박 나오는 회사를 박차고 나와 다른 삶을 살고자 아등바등 거리는 내가 참 등신 같아 보였을까.

아니면 참 무모한 도전이라 느꼈을까.

그들은 인생의 팁을 한 수 가르쳐 주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는지 사족이 길었다.

그 중 몇 마디는 진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시기와 질투는 부러움의 다른 얼굴이라는 걸.

그럼에도 그런 말 한마디에 나는 쉽게 흔들렸다. 또 자주 무너졌다.

상처 난 자존심 어디에도 속내를 털어내지 못했다.


나는 단단하게 묶어주는 건 재미없는 공무원 생활의 지루함이었다.

안정감과 지루함 사이에서 헌법 전문과 각 조항을 수없이 반복해 공부했다.

법학 학사 과정을 3년 반 만에 조기 졸업했다. 그리고 올해 3월, 경찰법 전공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시골에서 도시로 전학을 왔다.

까무잡잡한 얼굴, 투박한 전라도 사투리, 촌스러운 옷차림.

아이들의 눈이 내게 쏠렸다. 그 눈과 관심이 곧 놀림으로 변하겠구나 직감했다.

비슷비슷한 환경 속에 고만고만한 일상을 살아가는 아이들 속에서 나의 등장은 불쑥 나타난 이질적인 존재였다. 혹독하게 놀림당하고 배척받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전학 첫날, 나는 마지막 수업 종이 울리기도 전에 무섭게 도망치듯 집으로 달려갔다.

집은 텅 비어 있었고 내 심장은 터질 것 같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맞벌이로 바쁜 부모의 부재.

전학생에 대한 견제와 텃세.

혼자인 게 익숙한 이방인 신세.


내 삶의 일부였다.

내 외로움의 옆자리에는 일찍 철이 들어앉았다.


운동회에 꼭 오라고 좀 더 떼를 써도 됐지만, 소풍 갈 때 3단 김밥 도시락이 아니라 서운할 법도 한데,

늘 바쁜 엄마에게 괜찮다고 말했던 그때부터 마음이 울컥울컥 거리면서,

마음에 큰 돌덩이를 얹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냥 딱, 내 몸무게만큼의 나를 하나 더 이고 살았다.


나 혼자 도시락을 먹게 된다면, 달리기 하다 넘어지면 어떻게 하지? 이번 글짓기 대회 나가서 잘할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을까? IMF를 뚫고 취업시장에서 정말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공포를 먹고 자랐다.

내 삶의 틈새를 비집고 자란 외로움은 나를 앞으로 이끌었다.

나는 결핍을 알고 그것을 채우려고 애썼다.

공포감과 외로움 그리고 결핍은 나를 옥죄고 몸이 피곤해야 마음이 편한 사람으로 키웠다.




12년 대한민국 공교육을 착실하게 받고 대학 졸업장을 땄다.

돌아 돌아서 어렵게 누군가는 선망하는 기자가 됐다.

같은 직업은 가진 남자를 만나 결혼도 했다.

예쁜 딸을 낳아 키우며 30평대 아파트도 마련했다.

대출도 다 갚았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남부러울 것 없는 ‘정답 같은 삶’을 살았다.

사회 최전선에서 할 말 하면서 사회에 의미 있는 기사를 쓰는 기자라는 직업은 더없이 매력적이었다.

밤 10시 야근, 주말 출근, 연이은 술자리도 거뜬히 해치웠다.

낮은 연봉, 현장 취재 스트레스, 단독 및 기사 압박도 잘 버텼다.


그런데 이상했다.

겉은 멀쩡해 보였지만, 속은 여기저기 뜯긴 낡은 벽지처럼 낡아 있었다.


그래서, 멈췄다.

그리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16년 동안 크고 작은 성공과 성취를 반복하면서 내 감정을 억압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내 감정이 쓰고, 달고, 맵고, 짜다는 것을 몰랐다.

사랑, 행복, 슬픔, 분노, 공포, 놀람, 혐오 등 내 안의 기본적인 감정을 가볍게 여겼다.

시시때때로 내 삶에 위험신호나 경고가 켜져도 괜찮은 척, 안 아픈 척, 모르는 척하기 바빴다.

내 감정은 다룰 줄 몰랐고, 타인의 감정은 마치 내 책임처럼 느끼는 습관이 몸에 배어, 결국 늘 타인의 기대 속에서 움직이며 살았다. 분노, 불안감, 두려움, 슬픔, 우울감, 수치심, 죄책감, 외로움, 무기력함, 질투심 등 부정적인 감정들을 온전히 품어본 적이 없었다. 가족, 친구, 회사, 사회 어디에서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하루하루 도태될까 두려운 마음과 살아남고 싶은 조바심에 ‘나’를 돌볼 시간은 없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내가 다시 신문 밥을 먹고 살 거라 생각하는 이들이 아직도 많다.

어릴 적, 전학 첫날 텅 빈 집에 혼자 앉아 숨을 고르던 어리디 어린, 어른인 척 애쓴 그 아이와 충분히 더 놀고싶다. 아니 그 아이에게 “더 이상 괜찮은 척 안 해도 되고, 빈 방에서 혼자 밥 먹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왜 기자 그만둔 거냐고?”

이제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배워서 남 주려고 법 공부합니다.”


창밖은 여름, 공부하기엔 존나게 뜨거운 폭염이다.

작가의 이전글창밖은 여름⑧ 잘 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