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아픈 손가락이 있다. 내게는 오른쪽 엄지손가락이 그렇다. 정확히 말하면 엄지손톱이다. 짧고 뭉뚝하다. 사람들은 그것을 ‘개구리손톱’, ‘우렁이손톱’, ‘뱀손’이라 부른다. 손가락 끝마다가 뱀 머리처럼 둥글고 폭이 넓다. 미화할 여지없이 그냥 못생겼다.
나는 오래도록 이 못난 엄지를 숨기며 살았다. 중력은 늘 아래로 작용했고,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사람들의 손가락은 좌우가 쌍둥이처럼 닮아 있지만, 내 손은 그렇지 않다. 오른쪽만 유난히 튀어나와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손을 접고, 말아 쥐고, 몸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중력을 거스르기 전까지는,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시절, 줄을 서거나 친구와 손을 잡아야 할 때면 나는 항상 눈치를 보며 재빠르게 오른쪽에 섰다. 어린 마음에도 오른손 엄지손톱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계절과 상관없이 오른쪽 엄지손가락은 손바닥 안으로 접어 쥐고 다녔다. 손은 늘 반쯤 숨겨진 상태였다.
어느 날은 빨래집게를 엄지손톱에 꽂고 잠들기도 했다.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진다는 피노키오를 떠올리며, 자고 나면 내 손톱도 조금은 길어져 있기를 바랐다. 다음 날 아침, 이불 위에 널브러진 빨래집게를 집어 들어 내 코에 꽂으며 장난을 치던 오빠를 원망해 보았지만, 손가락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돈 많이 버는 손이라고 했고, 엄마아빠는 재주 많은 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말들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어린 나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미신을 가장한 마음 달래기용이라는 것쯤은.
나는 못생긴 손가락과의 동거가 불편했다. 변형도 성형도 어렵다면, 전략을 바꿔야 했다. 어린 나는 ‘용불용설(用不用說)’에 희망을 걸었다. 쓰지 않으면 약해지고, 약해지면 결국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원래 인간에게도 꼬리가 있었지만, 사용하지 않다 보니 이제는 꼬리뼈만 남았다는 이야기처럼. 용불용설을 주장한 생물학자 라마르크는 이를 ‘흔적기관(痕跡器官)’이라 설명했다는데, 그렇다면 나 역시 이 못난 오른쪽 엄지손가락과 손톱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양손제로게임 대신 한 손제로게임을 했고, 가위바위보도 왼손으로, 공기놀이도 왼손으로 했다. 밥도 왼손으로 먹으며 어설픈 양손잡이 식생활을 이어갔다. 의도적으로 왼손 우선의 삶을 살면서, 나는 오른손 엄지손가락과 손톱을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외면은 소멸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삐삐, 전자사전, MP3, PCS, CD플레이어를 거쳐 아이폰과 갤럭시, 노트북에 이르기까지 각종 전자기기와 함께 나의 불편은 시대를 따라 진화했다. 뱀손은 미용적인 콤플렉스에 그치지 않았다. 일상을 살아가는 데 불편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원치 않아도 내 손가락은 언제나 시선의 중심에 놓였다. 선생님이든 친구든 지인이든 꼭 한 마디씩 보탠다.
“어머, 손가락 생김새가 참 특이하네.”
“다친 거야?”
“어쩜 이렇게 뭉뚝해.”
말로 끝나면 다행이련만, 꼭 만져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다.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왼손도 그러냐고 묻고, 비교까지 해야 상황이 끝난다. 그런 순간을 수없이 겪다 보니, 나에게도 내성이 생겼다.
그리고 나는 종종, 본의 아니게 바보가 된다. 피아노 건반이나 리코더처럼 손가락을 써야 하는 악기 앞에서는 특히 그렇다. 불편하다기보다 둔하다. 문자나 카톡을 보낼 때도 오타가 잦다. 작은 버튼을 누르거나 화면을 터치하는 일이 늘 어렵다. 민원발급기의 지문인식 칸에서는 사이즈가 맞지 않아 실패가 반복된다. 일회용 장갑이 맞지 않거나, 손에 맞는 볼링공을 찾기 어려운 정도의 불편은 차라리 사소하다. 장갑을 쓰지 않으면 되고, 볼링을 치지 않으면 되니까. 문제는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도 없는 불편이라는 데 있다. 나만 아는, 아주 사적이고 내밀한 사소함들.
이 못난, 못생긴 오른쪽 엄지손가락과의 불편한 동거는 폴댄스, 그러니까 ‘봉춤’을 추면서 끝이 났다. 학창 시절 단체사진이나 가족 경조사 사진 앞에서조차, 손을 활용한 브이나 파이팅, 하트 같은 연출에 늘 소극적이던 나는 이제 폴을 잡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따봉”을 외치는 여자가 되었다. 폴댄스는 온몸을 쓰는 운동이지만, 그중에서도 손의 역할이 크다. 첫 수업 때, 바닥에서 천장까지 곧게 이어진 금속 봉을 붙잡고 그저 매달렸을 뿐인데, 강사는 돌고래처럼 높은 목소리로 환호했다. 폴을 잡고 한 바퀴를 돌고, 투 클라임을 성공했을 때는 칭찬이 쏟아졌다.
“어머, 회원님 진짜 잘하시네요.”
“와, 금손가락이세요.”
“어쩜 이렇게 힘이 좋아요.”
연신 엄지 척이 날아들었다. 민망하고 쑥스러워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동작을 제대로 해내면 잘했다고, 실패해 미끄러져 내려오면 괜찮다며 다시 도전하자고 했다. 누가 봐도 어색하게 폴에 매달려 아등바등 버티고 있을 때조차 환호가 들려왔다. 허벅지가 터질 것 같은 통증에 얼굴이 일그러져도, 그곳에서는 예쁘다는 말이 먼저였다.
폴을 붙잡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짧고 뭉뚝한 나의 오른쪽 엄지는 더 이상 숨겨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아래로 끌어당기던 시선과 판단 대신, 위로 버티는 힘이 필요했다. 중력은 여전히 아래로 작용했지만, 그 힘을 거슬러 몸을 붙들어 매는 것은 바로 그 못난 엄지였다. 나는 더 이상 손을 접어 숨기거나 말아 쥐지도 않는다. 대신 폴을 잡고, 몸을 들어 올리고, 나 자신을 믿는다. 그렇게 나의 못난 엄지는 중력을 거스르며 나를 버텨냈고, 나는 그 손으로 비로소 나를 지탱하는 법을 배웠다. 또 한 가지 어떤 콤플렉스는 사라지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쓰임을 얻는 순간, 몸은 스스로를 변호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