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모든 운동과 취미에는 ‘장비빨’이 있다.
장비가 좋을수록, 많을수록 결과가 좋아진다는 믿음. 달리기, 골프, 낚시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폴댄스에도, 아니 폴댄스야말로 장비빨의 끝판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개 반응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폴댄스를 스포츠라고 하면, 사람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코웃음부터 친다.
“뭐? 봉춤이 무슨 스포츠야.”
“장난하지 마.”
“그럼 너 국가대표 하겠다.”
냉소와 무시는 늘 이렇게 가볍게 도착한다.
2009년 국제폴스포츠연맹(IPSF, International Pole Sports Federation)이 설립됐고, 2012년에는 첫 세계 폴스포츠 선수권대회가 열렸다. 현재 40여 개국 이상이 소속돼 있으며, 각국에서는 국가대표 선발전을 겸한 챔피언십이 열린다. 2017년에는 국제체육연맹(GAESF)으로부터 ‘잠정 승인 스포츠’로 인정받으며 올림픽 종목 편입을 향한 첫 관문도 통과했다.
그럼에도 인식은 여전히 뒤처져 있다.
폴댄스는 체조나 피겨스케이팅처럼 난이도, 기술 완성도, 예술성을 종합 평가하는 종목이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 장애인 종목도 존재한다. 의상 역시 규정이 명확하다. 과도한 노출은 금지되고, 피부 마찰이 필수적인 종목 특성상 남성 역시 짧은 바지나 크롭톱을 입는다. 선정이 아니라 기능의 문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폴댄스를 ‘야한 춤’ 정도로 치부한다. 체력과 기술, 예술성을 동시에 요구하는 고난도의 스포츠임에도, 사회의 시선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느리고, 둔하고, 솔직히 말해 후지다.
그래서 폴댄스에는 그립제, 알로에, 손목과 무릎 보호대, 밴드 등의 장비가 필요하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기술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편견과 싸우기 위해서 말이다. 폴 위에 오르기 전, 폴러들은 이미 한 번 더 싸움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폴댄스에서 장비빨의 정점은 단연 폴웨어다.
가장 많은 오해를 부르는 장비. 처음 폴웨어를 입었을 때의 당혹감을 나는 잊지 못한다.
짧았다. 생각보다 훨씬. 민망함은 길었고, 나는 거울 앞에서 한참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강사는 말했다.
“많이 어색하시죠? 선택이 아니라 필수예요.”
폴댄스에서 폴웨어는 꾸밈이 아니라 기능이다. 피부가 닿아야 폴에 붙고, 붙어야 올라가고, 올라가야 동작이 된다. 노출은 목적이 아니라 조건이었다. 살이 드러나는 건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늘 블랙 계열의 정장으로 몸을 가리는 데 익숙했던 사람이 스스로 벗는 선택을 해야 하는 운동이라니.
폴웨어가 더 낯설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는 오른쪽 배에 맹장수술 자국이 있다. 꽤 크게 남은 흉터다. 평소에는 정장과 셔츠, 허리선 아래로 가려두던 몸의 기록이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흔적,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다고 여겨온 이야기였다. 그런데 폴웨어는 그 흉터를 그대로 세상으로 드러냈다.
짧은 쇼츠와 크롭톱 사이로, 배 한가운데 징그럽게 드러난 수술 자국은 거울 속에서 유난히 또렷했다. 운동을 위해 옷을 입었을 뿐인데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기능이 아니라 아픈 기억이었다. 나는 맹장수술 자국을 숨기기 위해 비키니도 입지 않았고, 가능하면 없는 듯 살고 싶었던 사람에 가까웠다. 폴웨어가 불편했던 이유는 짧아서가 아니라 내가 애써 외면해 온몸의 이력까지 함께 데리고 올라가야 했기 때문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폴웨어는 몸을 예쁘게 만드는 옷이 아니었다. 이미 지나온 몸의 시간을 그대로 인정한 채 지금 이 몸으로도 써보라고 요구하는 장비였다. 폴웨어가 몸을 드러내는 옷이 아니라, 몸을 드러내도 괜찮다고 허락하는 옷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첫 달 동안 나는 검정 반팔에 검정 반바지 레깅스를 고집했다. 봉에 붙지 않아 미끄러지고 동작이 무너져도, 속살을 드러내느니 그 편이 나았다. 학원에서 나만 까마귀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장바구니에 핫한, 소냐레바이, 게이즈, 로우나, 포리즈, 비베이드, 솔블랑, 르니끄, 포럴, 폴핏, 바비핏, 에스엘스포츠, 켈리 등 전문 폴웨어 브랜드 제품이 쇼핑목록에 담기기 시작했다. 짧고 손바닥만 한 옷은 한 벌에 7만 원, 10만 원을 훌쩍 넘겼다. 처음엔 “저런 걸 어떻게 입지?” 싶었던 옷들이 어느새 소재별로, 색깔별로 내 옷장을 채우고 있었다. 전문 폴웨어를 입자 놀랍게도 몸이 폴에 착착 붙었다. 미끄러지지 않았다. 힘을 덜 쓰고도 버텼다. 그제야 알았다. 폴웨어는 나를 노출시키는 옷이 아니라, 나를 더 안전하게 만드는 장비라는 걸.
폴웨어는 몸의 단점을 가리는 옷이 아니었다. 근육이 부족한 날에도, 살이 붙은 날에도, 멍이 퍼렇게 든 날에도 지금의 몸으로도 폴을 타도 된다고 말해주는 옷이었다. 신기하게도 옷이 바뀌자 태도가 바뀌었다. 숨기지 않으니 비교하지 않았고, 비교하지 않으니 버텼다. 버티다 보니 5년째 폴을 탈 수 있게 됐다.
사람들은 여전히 말한다.
“야해 보인다.”
“굳이 그렇게까지 입어야 하냐.”
하지만 수영할 때 수영복을 입고, 발레 할 때 발레복을 입듯 폴 탈 때 폴웨어를 입는 것뿐이다. 그걸 야하다고 말하는 시선이 오히려 촌스럽다.
나는 안다.
폴웨어는 타인의 시선을 유혹하기 위한 옷이 아니라, 내 몸이 나를 믿을 수 있게 만드는 최소한의 장비라는 것을 말이다. 폴웨어를 입는다는 것은 내 몸을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기능의 주체로 대우하겠다는 선언이다. 보여지는 몸이 아니라, 쓰이는 몸으로 서겠다는 선택.
오늘도 나는 폴웨어를 고른다.
예뻐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다.
도망치지 않기 위해서고, 내 몸을 끝까지 써보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선택의 끝에서, 나는 더 이상 숨기지 않는다.
오른쪽 배에 남은 흉한 수술 자국도 부끄러움이 아니라, 이미 한 번 이 몸이 버텨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폴웨어라는 장비빨을 믿고 폴을 탄다.